맞다. 내게 홍콩은 ‘한때’ 꿈과 이상의 도시였다. 꼭 20년 전, 눈부신 마천루를 배경으로 트렌치코트를 휘날리며 거리를 횡보하는 주윤발 일파를 스크린에서 처음 접한 이래 홍콩은 언젠가는 꼭 한 번 거닐어봐야 할 이상향으로 각인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딱 10년 뒤, 홍콩 땅을 직접 밟자마자 환상은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본토 반환 이후 중국의 여타 평범한 도시들과 다를 것 하나 없었다. 빽빽한 마천루의 규모는 상하이에 미치지 못했고, 아시아의 문화 수도라는 찬사는 유감스럽게도 이미 도쿄의 몫이었다. 무엇보다 톈안먼 사태 10주년을 맞고도 본토의 눈치를 보느라 바짝 숨을 죽이고 있는 모습이라니. 그날, 홍콩의 이미지는 커다란 뿔테 안경에 하늘을 향해 삐쭉 솟은 짧은 헤어스타일, 펑퍼짐한 몸매에 헐렁한 청바지를 걸친 채 땀을 비 오듯 흘리며 거리를 휩쓸고 지나가던 수많은 청년들의 잔뜩 구겨진 표정으로 각인되고 말았다.
루이 비통이 홍콩 아트 뮤지엄에서 ‘창조에 대한 열정전’을 개최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저절로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아르노 회장과 마크 제이콥스는 물론, 프랭크 게리, 무라카미 다카시, 리처드 프린스, 길버트&조지 등 이 시대를 대표하는 아티스트들이 총출동하는 성대한 전시회를 왜 하필이면 홍콩에서 개최하려 하는 걸까? 매년 명품 시장의 규모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아시아가 그렇게나 중요하다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루이 비통에 열광하는 도쿄, 아니면 세계 미술의 중심지로 급격히 떠오르고 있는 베이징, 그도 아니라면 초고속으로 비약하는 중국의 상징 상하이가 더 적합한 것 아닐까?
홍콩 국제공항에 발을 내딛는 그 순간까지도 질투, 혹은 냉소가 뒤섞인 의문은 좀처럼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시퍼런 바다 건너편, 홍콩 섬에 빽빽이 늘어서 있는 마천루를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홍콩 아트 뮤지엄을 직접 대면하는 순간 의문은 스르르 풀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루이 비통을 사로잡은 건 뮤지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이 풍경이었으리라. 한자와 영어가 뒤섞인 채 번쩍이는 네온사인, 야산 중턱까지 침범한 휘황찬란한 마천루와 나란히 늘어서 있는 허름한 빈민가, 중국인과 말레이시아인, 중동인과 영국인이 완벽하게 뒤섞여 있는 이 메트로폴리탄적 풍경 말이다.
3층짜리 뮤지엄 건물을 칭칭 휘감은 리처드 프린스의 ‘애프터 다크’ 시리즈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런던, 암스테르담, 샌프란시스코, 코펜하겐 등 세계 주요 도시를 상징하는 대중소설책의 표지를 모아 제작한, 리포토그래피 기법으로 인쇄된 역동적이면서도 밝은 색채로 뒤덮인 이 거대 패브릭은 아시아와 서구가 완벽히 혼합된 세계 유일의 도시 홍콩에서 그야말로 강력한 오라를 발산했다. 그제야 “세상의 모든 것이 믹스된 홍콩이라는 도시의 활력과 모더니티에 경배를 보내기 위해 이번 전시회를 기획했다”는 루이 비통의 슬로건에 조금씩 고개가 끄덕여졌다.
슬그머니 뮤지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본인이 직접 설계한 ‘루이 비통 창조재단’의 조감도를 배경으로 소탈한 미소를 짓고 있는 프랭크 게리와 딱 마주쳤다. 허 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로스앤젤레스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등을 창조해낸 세계 최고의 거장이 불편한 노구를 이끌고 이곳까지 직접 날아오다니. 그렇다. 루이 비통은 자랑을 하고 싶었던 거다. 파리 볼로뉴 숲 한가운데에 당당하게 들어설, 예술과 컬래버레이션으로 점철된 지난 1백50년의 역사가 오롯이 담길 ‘루이 비통 창조재단’의 건물이 얼마나 위풍당당한지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인 거다. “난 파리를 사랑합니다. 박물관과 미술관도 좋아하고, 무엇보다 그곳의 예술 향취를 사랑합니다.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이번 프로젝트를 제안하며 볼로뉴 숲 안에 있는 아클리마타시옹 공원으로 데려갔을 때 마법과도 같은 경험을 했어요.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9세기 프루스트의 세계로 빠져든 것 같은 느낌이었죠. 그 순간의 느낌을 건축학적으로 포착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보람 있는 작업이었습니다. 몇 년 뒤 파리를 찾는 당신은 공원과 자연이 녹아들어 있는 갤러리 내부 공간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게 될 겁니다.”
바로 옆 섹션에는 루이 비통과 역사적인 컬래버레이션을 수행해온 위대한 예술가 두 사람이 180도 상반되는 태도로 관람객을 맞고 있었다. 미국 현대아트의 한 정점을 점하고 있는 리처드 프린스는 퉁명스런 표정을 지은 채 지극히 쿨한 태도로 딴청을 부렸고, 100m 밖에서도 톡톡 튀는 외모를 즉시 간파할 수 있는 무라카미 다카시는 특유의 오버액션으로 카메라를 잔뜩 불러 모았다. “무명이었을 당시, 세계 최고의 럭셔리 브랜드와 어떻게 컬래버레이션을 수행할 수 있었느냐고요? 우하하. 저도 모릅니다. 마크(제이콥스)가 잠깐 정신이 나갔었나 보죠. 부자가 되어 좋겠다고요? 그럼요. 제가 데리고 있는 직원만 1백20명에 달합니다. 최소한 그들에게 들어가는 것만큼은 벌어야죠. 물론 무명이었던 나를 화려하게 데뷔시켜준 루이 비통에게 감사를 보냅니다. 하지만 이젠 내가 훨씬 더 유명할걸요? 우하하.”
이처럼 세계적인 셀러브리티들이 발에 채일 정도로 곳곳에 넘쳐나다 보니 마크 제이콥스가 행사장 한구석에 방치되는 놀라운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불과 몇 년 전, 홍콩 방문 당시 마치 약에 중독된 듯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나타나 충격을 안겨줬던 마크는 그 사이 혈색도, 기분도, 창조성도 비약적으로 증대한 듯 보였다. 지금 한창 사랑에 빠져 있는 그는 뉴욕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구하느라 여념이 없다는 멘트를 이어나갔다.
루이 비통을 사로잡은 건 한자와 영어가 뒤섞인 채 번쩍이는 네온사인, 야산 중턱까지
침범한 휘황찬란한 마천루와 나란히 늘어서 있는 허름한 빈민가, 중국인과 말레이시아인,
중동인과 영국인이 완벽하게 뒤섞여 있는 이 메트로폴리탄적 풍경이었을 것이다.
2층에 위치한 본 전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에 따라 작품의 가격이 수십만 달러 이상 점핑할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미술 컬렉터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LVMH그룹의 아르노 회장. 아직 그 규모조차 정확히 파악되지 않은 그가 보유한 무수한 컬렉션 중 홍콩과 어울릴 만한 작품들만 세심히 뽑아낸,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섹션이다.
영국 아티스트 길버트&조지의 20년 전 모습이 아로새겨져 있는 거대한 부조 작품 ‘Class War, Militant, Gateway’가 입구에서부터 관람객을 압도한다. 이런, 저 한구석에 똑같은 타입의 넥타이와 날렵한 수트를 쌍둥이처럼 맞춰 입은 실제 길버트와 조지가 사이좋게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해맑은 얼굴로 한국에서 날아온 에디터 앞에서 한국 음식 예찬을 늘어놓는다. 어느덧 작품 이야기는 뒷전이고, 런던에 사는 지인을 따라 광주까지 날아가 각종 한국 음식을 맛보았다는 수다가 10분 넘게 이어졌다.
저만치서 장만옥이 연인의 팔짱을 낀 채 말보로 맨과 미국 풍경을 교차시킨 리처드 프린스의 작품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뒤를 졸졸 뒤따르다 보니 어느덧 바스키아의 작품을 지나 ‘카오 페이’라는 낯선 이름 앞에 도달하게 됐다. ‘세컨드 라이프’라는 온라인 속 제2의 삶을 모티브로 창조한 그녀의 작품 ‘RMB City’ 속에는 중국과 홍콩이 아니라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상상력이 넘실댄다.
리먼 브라더스와 장자와 마르크스가 함께 밭을 갈며 생을 꾸려가는 유토피아를 향한 열망이라니.
다음날 아침, 거리를 향해 오픈되어 있는 페닌슐라 호텔의 커피숍에서는 베이지색 수트에 ‘땡땡이’ 타이를 맞춰 입은 길버트와 조지가 홍조를 띤 채 모닝 커피를 즐기고 있었고, 리처드 프린스는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의 작품으로 칭칭 래핑된 홍콩 아트 뮤지엄 앞길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홍콩이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 기묘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조화로운 풍경이 눈앞에 하나 가득 펼쳐졌던 거다. 덤으로 비행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서둘러 도착한 공항 카운터 앞에는 빨간색 체크무늬 치마를 입은 마크 제이콥스가 1시간째 지연되고 있는 운항 스케줄에 짜증을 내며 연인의 품에 안겨 앙탈(?)을 부리고 있었다.
참, 그로부터 일주일 뒤 톈안먼 사태 20주년을 맞은 날, 홍콩 빅토리아 공원에는 사상 최대인 15만 명의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운집했다고 한다. 그렇다. 나는 ‘홍콩’ 갔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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