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을 깨기 위해 노력하는 배우들이 있다. 이기우가 그렇다. 큰 키에 훌륭한 체격, 깔끔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장점이자 부숴야 할 벽이라고 말했다. 최근의 일이다. 이기우는 연기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만의 색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그 색에 깊이를 더하는 것을 배우로서 목표로 삼았다. 지금 이기우의 머릿속에는 연기와 영화만이 가득하다. 틀을 깨기 위해 선택한 것은 악역이다. 준수한 외모의 어리숙한 남자가 보여주는 순수한 악. 3월에 방영할 드라마 <기억>에서 그가 맡은 역이다. 이제 다시 이기우를 주목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거의 매해 작품에 출연했다. 최근에는 꽤 다작을 한 편이고. 왜일까?
영화가 하고 싶었지만, 데뷔 때보다 영화계가 침체됐다. 큰 영화에만 쏠리는 경향도 있고, 티켓 파워가 비교적 약한 배우들은 작은 영화 외에는 하기 어려운 고충도 있다. 그래서 영화보다 드라마 위주로 출연하다 보니 다작이 된 것 같다.
영화와 드라마의 제작 시스템이 다르다 보니, 배우가 준비하는 것에도 차이가 있을 테고?
드라마는 시청자의 반응에 따라 제작 의도가 바뀌는 경우도 있다. 영화는 개봉 후 관객에게 판단을 맡기는 방식이고. 그런 점에서 영화의 제작 방식이 더 매력적이지.
관객은 쉽게 추측하곤 한다. 배우가 출연한 작품을 보고, 저 배우의 성향이 이런 작품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배우에게도 저마다 사정이 있을 것이다. 이기우의 성향에 맞는 장르는 무엇일까?
액션이다. 그 외에는 코미디, 드라마, 로맨틱 코미디도 좋아한다. 키가 크고, 얌전하고, 젠틀해 보이는 이미지가 두드러져서 주로 그런 역할이 들어온다. 하지만 실제 나와는 다르다. 최근에는 기존 이미지에서 탈피하고 싶다는 욕구가 쌓여 있다. 그래서 기존과 비슷한 역할은 정중히 고사하고 있다. 악역을 택한 것도 그런 이유다.
<기억>이란 작품 말인가?
맞다. <베테랑>의 유아인, <리멤버>의 남궁민과 비슷한 포지션의 악역을 맡았다. 그들과 다른 모습으로 연기하기 위해 엄청 고민하고 있다.
이기우만의 악역이란 어떤 모습일까?
나만의 색을 보여주기 위해 콘셉트를 잡을 때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많이 했다. 이번 드라마는 기대가 큰 만큼 걱정도 되거든. <프라이멀 피어>에서 에드워드 노턴의 소시오패스 연기를 참고했다. 내 배역이 재벌 2세에 분노장애조절을 겪는 캐릭터인데, 평소에는 어리숙한 모습으로 포장하고 다니는 것으로 콘셉트를 잡았다.
많은 작품에 출연했으니, 애착이 가는 캐릭터도 있을 것 같다.
나와 가장 가까운 인물은 <클래식>의 태수다. <극장전>의 전상원도 그 나이대의 나와 가장 비슷했던 것 같고. 20대 중반에 들어섰을 때인데, 전상원은 수능 마친 뒤의 이야기와 나이대가 당시 나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또 홍상수 감독님이 나를 닮은 상원이를 그려주신 것도 같다.
홍상수 감독과는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어렸을 때 이야기부터 가족 관계, 장래 희망, 여자친구 이야기나 학교 이야기 등. 술 마시면서 그런 대화를 나눴다. 그러고 나서 전상원이라는 캐릭터를 보니까 내 과거와 닮은 구석이 있더라고. 촬영날 아침에 감독님이 현장에서 대본 쓰시는 작업이 처음에는 불안하고, 무서웠다. 나중에는 그게 너무 편하고 재밌더라. 오늘 어떤 대사가 나올지 모르니 배우도 집중하게 된다.
배우들은 각본을 미리 받고, 캐릭터 분석을 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대부분은 그렇다. 캐릭터를 잡고, 참고할 레퍼런스를 찾는다. <극장전>은 참고서 대신 감독님과 대화를 하면 된다. 그날 현장의 분위기, 날씨나 환경에 따라 대본이 달라진다. 고양이가 지나가면 고양이 지나가는 것도 써 있다. 정말 살아 있는 느낌이다.
<클래식>의 태수는 데뷔작이라 인상적이었던 건가?
그때 시나리오라는 걸 처음 받았다. 14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현장에서 주고받았던 대화나 상황이 기억난다. <클래식>의 감독님, 스태프들, 현장이 내게는 첫 경험이었기에 잊을 수 없다. 그 인연으로 곽재용 감독님과 꾸준히 연락하고, <시간이탈자>라는 영화도 흔쾌히 도와드렸다.
이기우만의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있다면 무엇일까?
예전에는 내 연기관이나 철학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배우는 인물 하나만 연구하는 존재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감독님의 디렉션에 대한 의존도가 컸다. 지금은 누구보다 내 색깔을 스스로 잘 알기에, 주관대로 밀어붙여보기도 하고, 감독님을 설득해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다 보니 연기 욕심이 강해지더라. 선배들에게 고민 상담을 했더니, 본인들도 그런 과정을 겪었다며 그 과정을 진중하게 대하면 연기도 성장한다고 하더라. 지금은 더 열심히 집중한다. 예전보다 더 많은 걸 건다고 할까?
무엇을 건다는 거지?
시간.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찾고 연구하는 예전보다 더 진지해졌다. 고민도 많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재밌고 신나기도 한다.
배우는 일종의 예술가다. 그래서 새로운 자극을 찾는다. 그게 책이거나 사람, 음악일 수도 있다.
함께 연습하고, 데뷔도 비슷하게 했는데, 성공한 친구들을 보면 큰 자극이 되기도 한다. 사실 그것만큼 큰 자극은 없다. 하지만 그들처럼 되고 싶다는 건 피상적인 욕심이었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연기의 폭을 넓히고 싶은 욕심이 더 크다. 그러다 보니 더 많은 영화를 찾아보게 된다.
미드나잇 피크닉이라는 아웃도어 숍을 운영하고, 스포츠도 좋아한다고 들었다. 그런 활동들이 연기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인테리어와 미술에도 관심이 있었다. 매장 인테리어를 혼자 다. 못질부터 나무 자르고, 뚫고, 박고, 페인트칠 전부 다 했다. 인테리어는 무난한 것보다는 부족해도 개성 있는 게 좋다.
그 정도면 손재주가 매우 뛰어난 편 아닌가?
어렸을 때부터 나무로 가구를 만들고, 부자재로 뭔가 만드는 걸 좋아했다. 사실 평소 나는 소탈하고, 느슨하고, 유연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작업을 할 때는 예민해진다. 내 작업을 누가 도와준다고 하면, 조금만 다른 모양이 돼도 용납을 못한다.
자신만의 세계를 열어두는 편인가? 간혹 출입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거든, 세계를 공유하는 걸 불편해하는 성향 말이다.
주변에 좋은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준다. 인프라 공유하는 걸 좋아한다. 매우 열린 편이라고 해야겠지. 하지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곳을 침범당하는 건 용납 안 한다.
마당까지는 들어와도, 건물 출입은 안 된다는 건가?
하하. 집 안에는 안 넣어주는 스타일인 것 같다. 이런 성향이 연기에도 영향을 끼친다. 나는 카메라 앞에서만 연기를 하고, 화면 밖에서는 일상으로 돌아오는 타입이었다. 최근에는 연기관이 바뀌면서 캐릭터를 한 6개월 동안 입고 지내려고 한다. 훈련이라고 해야 하나? 워낙 열린 성격이다 보니 이게 내게 더 맞는 것 같다.
그럼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소시오패스인가?
그렇지. 아직 초반이라 촬영 외에는 괜찮은데, 현장에 가면 확실히 내가 달라지는 게 느껴진다. 현장에서 그런 눈빛을 하고 시간을 보내면 쾌감도 느껴진다.
연기하길 잘했다고 느낄 때는 언제인가?
어려서 막연히 꿈꾸던 일을 10년 넘게 하고 있는 것에 자기 만족을 느낀다. 또 매번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인생을 살아보는 것. 아마 많은 배우들이 비슷한 얘길 할 텐데, 그게 배우란 직업의 가장 큰 매력인 것 같다. 또 그 모습으로 시청자를 정말 속일 때도 쾌감을 느낀다.
맞다. 속이는 것만큼 재밌는 것도 없다.
내 악역을 보고 설령 사람들이 욕을 한다고 해도, 배우에게는 칭찬으로 들린다. 그래도 내 연기가 저분한테는 잘 먹혔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하하.
사실 악한 모습이 잘 연상이 안 된다.
인상이 순한 편이라서 고민이 크다. 에드워드 노턴의 데뷔작을 레퍼런스로 잡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에드워드 노턴이 선량한 인상의 청년으로 나오는데, 그게 나와 조금은 비슷하다.
선악의 기준은 내게 잘해주냐, 못해주냐의 차이 아닌가? 선악은 타인이 결정해주는 것 같다. 그래서 순수하게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한 사람이나 상대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이번 캐릭터도 아직 대본에는 그다지 나쁜 면이 없다. 금수저를 물고 나와서 도덕적으로 나쁜 짓인 줄 모르고 산다. 그에게는 당연한 자기 삶이다. 하고 싶은 대로, 생각나는 대로 사는 것인데 남들에게는 무례해 보이는 거지.
데뷔할 때, 10년 뒤의 모습을 상상한 적 있나?
서른 넘은 나이에 나는 뭘 할까? 그때도 연기를 하고 있다면 다행이겠구나, 데뷔 초에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욕심이 커지더라. 서른 중반이 되니까. 후배들에게 닮고 싶은 배우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실력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졌다. 특히 요즘은 키 큰 친구들도 많아져서, 그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선배도 되고 싶다.
큰 키가 콤플렉스였나?
큰 콤플렉스였다. 방송국에 가면 프로필이 산처럼 쌓여 있는데, 그중에서 나는 가장 키가 컸고, 그래서 가장 먼저 버려졌다. 또 내가 특출나게 잘생기거나 재능 있는 배우도 아니었다.
배우로서 본인의 약점과 강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얼굴이 선하게 생긴 데다가 바르게 자란 느낌이 강하다. 그러니까 준수하게 생긴 거지. 또 키에 비해 가늘고 여린 목소리도 단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점들이 양면성을 띤 역할을 할 때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 멀쩡하게 생겨서 나쁜 짓 하면 감정 기복이 더 커 보일 수도 있으니까.
지금 이기우가 바라보는 것은 무엇일까?
예전에는 화목한 가정의 행복한 가장이었다. 요즘은 그런 마음이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연기에 대한 생각뿐이다. 정말 연기를 잘하고 싶다. 30대 중반에는 색깔 있는 배우가 되고, 40대에는 그 색깔을 깊게 만드는 작업을 하는 게 목표다. 그러니까 이젠 내 색깔을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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