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구는 저녁 8시에 약속을 잡았다. 영화 촬영 스케줄을 마치고 바로 오겠다고 했다. “화보 인터뷰는 정말 오랜만이라 피곤하더라도 제일 현장감 있을 때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좀 더 자연스럽고 싶어서요.” 촬영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자정이 가까워올수록 진구의 눈에는 활기가 돌았다. 마지막 컷을 마치고 다 함께 박수를 칠 땐, 이제 막 기분 좋은 레이스를 마친 사람처럼 눈이 번뜩였다. 진구는 영화와 드라마가 꽃 같은 미남들을 중심으로 재편될 때, 자신의 자리를 단단히 지켜온 배우다. 언제나 뜨겁거나 시린 남자였다. 화면 속 진구는 그런 온도가, 가벼운 말보다 묵직한 행동이 꼭 맞는 옷처럼 잘 어울렸다. 화면을 벗어나 마주한 진구의 얼굴에는 건강한 빛이 돌았다. 우리는 촬영을 마치고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마주 앉았다. 진구는 가볍고 간결하게 말했다. 대화는 탁구공처럼 또각또각 오갔다. 한밤의 스튜디오에는 그의 시원한 목소리가 기분 좋게 튀어 올랐다.
진짜 배우처럼 살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묻고 싶었던 게 있다. 배우로 살면 어떤가?
캡이다. 캡.
배우는 직접적으로 자신을 재료로 쓰는 직업이지 않나. 나를 가지고 뭔가를 만들면서, 존재 의미를 얻는다는 것 자체가 매력적이다.
백이면 백, 배우들은 그렇게 생각 할 거다. 확실히 그 부분은 배우가 직업인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요소다. 배우는 스스로 학대하기에도, 칭찬하기에도 좋은 직업인 것 같다. 이런 말 너무 뻔뻔하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나는 나를 칭찬함으로써 위안을 삼는다. ‘훌륭해, 베스트, 굿’ 이러는 건 아니고, ‘됐다, 저 정도면 다음 작품 할 수 있겠다, 일 안 들어오진 않겠다’ 이런 정도? 종종 지난 내 작품들을 찾아 보면서 그런다.
재미있는 취미다. 주로 어떤 때 찾아보나?
다음 날 촬영할 대본 들여다보다 갑자기 힘들고, 내일 촬영도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뭔가에 부딪쳤을 때 본다. 자괴감이나 외로운 마음이 들 때도 본다. 아, 사실 <논스톱 5> 같은 것은 안 본다. 내가 봐도 못했다 싶은 것, 혹평받은 작품들은 안 본다. 힐링이 가능한 것들만 본다. ‘으샤으샤’ 하려고. 못하진 않는구나. 그래. 내일 현장에 가서 쫄 필요 없어. 스스로 되뇌는 거다. 근데 다른 배우들도 그럴 거다. 한 10명 중 3명 정도는 분명히 그럴걸!
최근에 한 온라인 뉴스 인터뷰에서 엄청난 이야기를 했더라. “아마 지구상에서 내가 제일 웃길 것이다.” 진실인가?
뭐, 내가 내 입으로 웃기다고 하는 건 괜찮지 않나. 그런데 주변 지인들 역시 그렇게 말한다. 웃기는 것으로는 단연 내가 압도적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진구는 웃기는 남자랑은 거리가 먼데.
지금까지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도 없다. 사적인 자리에서 충분히 쏟아내고 있다. 이런 모습은 나의 ‘레어템’인 거지.
그런 진구를 제대로 못 보여줘서 기획사에서는 좀 아쉬워하겠다.
한때는 그랬다. 그런데 코미디와 개그는 코드가 맞아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코믹한 영화나 시트콤을 할 때에는 내게 맞는 옷을 못 입었던 것 같다. 아무리 궁리해도 코드가 안 맞으면 못 웃긴다. 내가 안 웃긴 걸 억지로 웃기려니까, 당시에는 무척 오그라들고 받아들이기 힘들더라. 거짓말한다는 죄책감도 있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시청자들도 못 웃겼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안 웃기는 사람이 된 거다. 나는 주로 치고 들어가는 타이밍으로 웃기는 사람이다. 타이밍의 천재… 왜 자꾸 웃나. 많은 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하는 거다. 검증된 사실이다.
누굴 웃기는 걸 무척 즐기는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웃기는 걸 너무 좋아했다. 내가 살면서 처음으로 다수 앞에 나갔던 때가 ‘웃기러’ 나간 자리였다. 어느 날, 학교 오락 시간에 장기 자랑이 펼쳐졌는데 친구가 영구 흉내를 내더라고. 반 친구들은 자지러지게 웃는데 나는 하나도 안 웃긴 거다. “저거 아닌데. 저 친구가 ‘쪼’를 모르네.” 후에 친구에게 그 ‘쪼’를 몰래 가르쳐주기도 했는데 안 되더라. 그 친구가 다음 오락 시간에 나를 추천했다. 얼굴 발개져서 나갔지.
그래서 터지던가?
한 방에 터뜨렸다. 내가 인생에서 처음 겪어보는 반응이었다. 박수, 웃음, 환호성. 엄청나더라. 이거다! 싶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사람들 앞에서 뭔가를 하고 리액션을 받는 일을 꿈꾸게 됐다. 배우를 하겠다고 딱 정해놓았던 것은 아니고.
그때 느낀 희열이 꿈의 시작이었다면, 배우가 된 뒤 무대에도 많이 올랐어야 했던 것 아닌가?
예전에 뮤지컬을 한 번 해봤다. 그런데 무대라는 곳은 몇 차례고 같은 상황에서 같은 대사를 해야 하지 않나. 나는 그게 힘들었다. 두 번째 공연 때까지는 이 장면이 슬펐는데, 세 번째 무대부터는 안 슬픈 거다. 내가 감흥을 못 받으니까 그때부터는 거짓말해야 하는 거다. 지금은 영화나 드라마 쪽이 더 안정감 있고 편안하다. 연기하기에도 수월하고.
곧 시작하는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는 서대영이라는 남자로 등장한다. 인물 설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더라. 날 때부터 배냇저고리 대신 깔깔이를 입었을 것 같은 군인. 진구에게 더할 나위 없이 딱 맞는 옷인 것 같다.
<태양의 후예>에 달려든 이유는 첫 번째도, 두 번째도 김은숙 작가였기 때문이다. 서대영이 아니었다. 투입이 결정되던 때 내가 맡을 캐릭터가 어떤 인물인지도 몰랐다. 일단 기분이 너무 좋았다. 어떤 역할인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당연하지, 김은숙인데!
배우 눈에는 김은숙 작품의 어떤 점이 멋진가?
일상의 대화에서는 등장하지 않을 법한 말들. 그런데 그게 유치하지 않은 데다 잘 들린다. 목소리가 작은 배우든, 큰 배우든, 전달력이 좋은 배우든 아니든 김은숙 작가의 작품 속에서 말하면 모두 전달력을 얻는다. 그런 마력이 있다. 드라마를 보면 딱 알겠지만, 서대영 역시 일상적이고 평범한 말을 전혀 하지 않는다.
어떤데?
괴짜다. 오글거린다. 대본 나오면 종종 (송)중기가 놀리고 그랬다. “형, 13부 대본 아직 못 봤죠? 큰일 났어요.” 드라마 <상속자들>에서 이런 대사 있지 않았나. ‘나 너 좋아하냐?’ 서대영이 이런 말을 많이 한다. 뻔뻔하게, 싹 식은 얼굴로. 그래서 오글거리거나 웃기게 들리지 않는다. 하기 전엔 이걸 어떻게 연기하지 싶었는데 내 몸에, 서대영 몸에 딱 들이대니까 말이 되더라. 그게 김은숙의 힘이다. 느끼한 대사든, 평범한 대사든, 유치한 대사든 전부 다 일상적인 말로 만들어버린다.
매력 있을 것 같다, 서대영.
사전 제작한 드라마라 지금은 촬영을 다 마쳤다. 방송만 남았다. 다 찍고 보니까 ‘와, 서대영 죽인다, 진짜 멋있다’ 싶다. 왜 남자들의 로망 있지 않나. 사랑해도 사랑한다고 말 못하고, 뒤에서 묵묵히 사랑하는 남자. 씁쓸하고 쓸쓸한 사랑이 주는 낭만. 하지만 단단하게 지키고 있는 사랑. 서대영이 그걸 하거든.
그런 사랑이 많은 남자들의 로망인가?
사실, 실제로 하고 싶진 않겠지. 그런데 다들 보고 싶은 욕망은 있을 거다. 게다가 서대영은 목석 같은 사람이다. 의리 있고. 서대영은 남자들도 많이 좋아할 캐릭터다. 딱 남자들이 좋아하는 요소를 다 가지고 있다. 아, 그리고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순정남’ 코드도 있다.
진구를 만나러 간다고 했더니 남자들이 더 크게 호응하더라. 남자들이 인정하는 몇 안 되는 남자 배우라고 했다.
그러게. 왜 그렇지?
1백 퍼센트 연기로 승부하는 배우라고 표현하는 남자도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 이야기한 서대영처럼, 남자들이 품은 로망을 표현하는 캐릭터를 많이 해왔기 때문일 것도 같다. 그냥 남자, 진짜 남자의 이미지를 가진 몇 안 되는 배우여서 그럴 수도 있을 테고.
확실히 남자들에게 호감을 얻을 수 있는 캐릭터를 많이 하긴 했다. 그런 배역이 많이 들어오더라. 좀 더 남자다운 것들. 멜로도 내가 할 수 있는 멜로가 있고, 송중기가 할 수 있는 멜로가 따로 있다. 종이 완전히 다른 거다. 살다 보니 이런 얼굴이 됐고 목소리도 말투도 이런 사람이 되었는데, 이런 모습에 어울릴 법한 옷들을 입게 된 거지.
분명 진구가 할 수 있는, 진구만의 장르가 있다. 그런데 동시에 어떤 작품에 진구가 나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진구? 그럼 이런 역할이지 않을까?’ 하고 쉬이 예상되기도 한다.
나는 그런 부분에 대해 걱정하거나 고민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차 아주 자연스럽게 내가 입고 있던 특정한 옷을 벗는 과정에 놓여 있는 것 같다.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말이다. 한 꺼풀씩 벗어내는 캐릭터가 나에게 온다. 영화 관객에게 처음으로 임팩트를 준 건 <비열한 거리>라고 생각하는데, 그 속에서 내가 맡은 역할이 무척 셌다. 그 이후로 내 이름 앞에는 악역, 깡패, 거친 남자 같은 말들이 붙었다. 근데 신기하게도 영화 <기담>의 감독님은 <비열한 거리>를 보고 내게서 연약한 소년을 봤다고 했다. 감독님이 보신 그대로 <기담>에서 나는 연약한 소년이 됐다. 나의 이면을 보고 날 캐스팅하는 경우가 점점 잦아지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조금씩 다른 기회들이 더 자주 올 것 같다. 그래서 굳이 거칠지 않은 역할을 찾진 않는다.
특유의 성질로 받아들인다는 거네.
아주 좋은 성질이라고 생각하니까. 이걸 잃으면 오히려 이도 저도 아닌 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반드시 가져가려고 한다.
갈증을 느끼지는 않나?
갈증 없다. 큰 갈등도 없다. 순조롭다. 편안하다. 정말이다. 흐르는 대로 흘러갈 거다. 지금껏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 순조로움이 좋은가?
감사하지.
그조차 갈등 없는 결론이네. 뭘 하든 ‘뭐 있어, 그냥 하는 거지’ 하는 편인 것 같다.
맞다. 나는 굵직한 고민을 별로 하지 않는다. 대신 잔고민이 많지. 아주 작고 쓸데없는 고민들. 레고를 사고 싶은데, 엄청 많이 사고 싶은데. 지를까 말까? 그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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