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전 밀라노 컬렉션 마지막 날, 구찌의 쇼룸에 갔다. 쇼장처럼 온통 빨갛게 연출한 공간, 삼면에는 전날 열린 2016 F/W 시즌 쇼에 등장했던 따끈한 룩들이 자리했다. 그 자체만으로도 압도적이었지만 개인적인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었다. 엄지 손톱만 한 비즈를 박아 넣은 태슬 로퍼에 꽃 자수 장식 연보라색 양말을 고이 접어 끼워놓은 장면. 그걸 보며 전날 쇼의 스타일링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흰 바지에 컬러풀한 양말을 덮어 신고 징이 촘촘히 박힌 로퍼를 매치한 것, 목둘레가 다 늘어난 티셔츠에 아스트라칸 소재로 만든 케이프와 술 장식이 달린 구피 모자를 조합한 것, 실크 블라우스에 트레이닝 재킷을 짝지은 것 등이 머릿속을 차례로 스쳤다. 엉뚱하지만 막상 해보면 ‘쿨내’가 진동하는 조합들.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구찌가 트렌디한 이유는 바로 여기 있는 게 아닐까, 현재의 패션을 새롭게 만드는 건 기발한 디자인보다 생각지 못한 스타일링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맥락으로 주류에 오른 디자이너가 또 한 명 있다. 고샤 루브친스키다. 지난 몇 시즌간 그는 패션계에 ‘소비에트 연방의 소년들’이란 참신한 주제를 전파했다. 원색의 후드 티셔츠나 약간 작아 보이는 청바지, 두툼한 스웨트 팬츠 같은 일상적인 옷을 간단하게 조합한 그의 컬렉션은 선풍적이었다.
큼지막한 스웨트 셔츠를 낡은 청바지 안으로 넣어 입고 벨트로 허리를 조이는 식의 어렵지 않은 스타일링과 무신경한 태도 같은 것들이 고샤 루브친스키만의 오라를 만들어낸 것이다. ‘패션 키즈’들을 팬층으로 확보한 덕에 그의 컬렉션은 출시와 동시에 유행으로 이어진다. 2016 F/W 시즌에서 엿보이는 군용 벨트와 굵은 서스펜더 같은 액세서리가 어느 남자 아이돌의 패션이 되는 건 시간문제라는 뜻이다.
아기자기한 아이디어와 꽉 찬 스타일링으로 컬렉션의 완성도를 높인 사례도 있다. 프라다와 로에베가 대표적인 경우다. 프라다는 이번 시즌 ‘어른 아이’같은 남자들을 등장시켰다. 길게 뺀 티셔츠 소매로 여러 겹의 레이어링을 드러내고, 얇은 셔츠 안에 집업 하이넥 티셔츠를 속옷처럼 매치했는데, 이 사소한 스타일링이 주제를 더욱 살렸다. 2016 F/W 시즌은 더욱 정교하다. 양털을 트리밍한 칼라를 목도리처럼 활용하는가 하면 셔츠의 칼라를 떼었다 붙일 수 있도록 만들어 다양한 스타일을 가능케 했다.
정점은 코트와 재킷 주머니에 꽂힌 다양한 크기의 수첩들. 가죽 체인이 달린 이 수첩들은 부둣가와 선원이란 테마를 한층 풍요롭게 만들었다. 로에베 역시 2016 F/W 시즌 룩북 이미지를 통해 빈틈없는 스타일링을 선보였다. 코트의 소매를 팔꿈치까지 끌어올려 에스닉한 스웨터를 드러내고, 러프하게 마무리한 코트의 벨트엔 작은 주머니들을 달았다. 여기에 스터드가 가득 박힌 워커를 매치했다. 신의 한 수란 건 이럴 때 쓰라고 만든 표현이다. 털 부츠 같은 걸 신었더라면 패션이 아니라 그냥 ‘사냥꾼 흉내’에 불과했을 테니. 옷 한 벌의 영향력은 줄었고, 디자이너의 명성 또한 한물갔다. 트렌드를 끌어가는 건 이렇듯, 예상치 못한 스타일을 제시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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