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에 생활감이 없어요.” 이엘은 이게 고민이라고 말했다. 배우는 그런 게 고민일 수도 있구나, 싶었다. 촬영장 대기실에서 맨 얼굴의 이엘을 봤다. 스스로가 바라는 생활감은 없을지언정 멋진 얼굴이다. 눈꺼풀에 뭘 바르지 않고도 영화 <내부자들>에서 주은혜가 ‘라이방’을 벗던 순간 펼쳐지던 신선한 눈매. 코앞까지 클로즈업해도 비현실적이던 얼굴. 그대로다. 그 얼굴이 좋아서 다가가 몇 컷을 촬영하기도 했다. 카메라와 호흡을 맞추던 이엘이 잠시 스태프 쪽으로 시선을 빼면, 우리는 모두 그녀를 보던 시선을 황급히 거뒀다. 마치 죄 지은 사람처럼. 그때마다 이엘은 고양이처럼 웃었다. 거울을 한 번 보고는, ‘아, 좀 무서운 얼굴인가’ 하고 말하기도 했다. 얼굴에 색을 입히고 선을 그리면 이엘은 드라마틱하게 변했다. 그러면 이엘은 자신의 몸과 얼굴을 캔버스처럼 썼다.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그녀를 보면서 들쭉날쭉하는데 이엘은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았다. 필름이 천천히 감길 때나, 플래시가 번쩍 터질 때나 오롯이 자신을 가다듬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이엘이라는 이름은 물론 예명이다. 본명은 김지현. 세상에 김지현이 너무 많아서 승부를 못 볼까봐 직접 새 이름을 찾아 나섰다. 작명 사이트를 죄 뒤져가며 찾다가 마음에 걸린 이름이 이엘이다. 그녀는 원하는 삶을 사는 것에 대한 의지가 뚜렷하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모두 다니다가 그만뒀다. 하고 싶은 것은 하고,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삶을 만든다.
“예쁘게 포장하면 그건데. 하하. 학교는 그냥 저에게 의미도 재미도 없었어요. 사실 어린애들이 많이 하는 생각이죠. ‘나 학교 다니기 싫은데.’ 제가 반골 기질이 센 것 같아요.” 시나리오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이러면 안 되는데, 제가 재미를 못 느끼면 정중히 고개 숙이며 접어요. 이야기가 저에게 와 닿지를 않는데, 어떻게 그 이야기 속에서 저를 보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겠어요?” <내부자들>로 많은 사람들에게 이름과 얼굴을 알리게 되었지만 사실 이엘은 지금껏 14편의 드라마와 8편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다.
“쉬지 않고 일했어요. 행복하고 감사했죠. 그런데 지금까지는 제가 가진 여성성을 부각시켜서 강하게 표현하는 연기를 해왔어요. 마담, 화류계 여성처럼요. 아마 언젠가 다시, 지금껏 했던 것과 비슷한 역할이 또 들어와도 작품이 재미있으면 저는 그냥 할 거예요. 이제는 다른 옷을 입을 수 있도록 좀 더 준비해놓으려고 해요. 언젠가는 여성성까지 다 벗어버려야 하는 연기를 해보고 싶거든요. 그 인물의 존재 목적만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연기요. 아, 영화 <카모메 식당>의 사치에처럼 아주 평온하고 일관된 사람도 되어보고 싶고요.”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