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 이기원 Photography 박원태
칼럼은 칼럼일 뿐
잡지에 실린 섹스 칼럼을 접할 때면 다른 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섹스 칼럼을 읽을지 항상 궁금했다. 재미로 읽을까 아니면 교재로 사용할까, 그것도 아니면 관음증을 채우는 도구로 쓸까. 이 궁금증은 글쓴이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가 섹스 칼럼을 쓰는 여자와 잠을 자고 싶은 남자도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낳았다. 섹스를 할 때마다 ‘거기서 좀 더 왼쪽 아래로…’ 혹은 ‘애무를 3분은 더 해야 할 것 같은데!’, 결정적으로 ‘크기를 고려할 땐 이 자세가 좋아’ 등과 같이 구체적이고 세심한 가르침을 줄지도 모르는 여자와 말이다. 그때 나는 여자친구가 섹스에 대해 잘 아는 건 좋은 점보다는 피곤한 점이 더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여자친구가 바로 ‘그런 여자’가 됐다.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우리 이야기를 쓰는 건 아닐까 하는 조바심이 들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여자친구가 섹스의 달인이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더 컸다.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고수보다는 중수와 하수 그 중간에 가까운 사람인데….
불행하게도 걱정은 현실로 변했다. 이론적으로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여자친구 앞에서 나는 한순간에 포르노에서 본 것 이외에는 아는 것이 없는 남자가 되어버렸다. 나는 잘못 알고 있고, 어설프게 알고 있고, 테크닉을 무용하다고 생각하는 촌놈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열심히 피스톤 운동을 하고 있는데 그녀가 말했다.
“섹스는 리듬이야. 당신 혼자 움직이지 말고 나와 리듬을 맞춰봐. 이렇게 10분을 계속해도 난 못 느껴.” 오랜 연인이지만 직격탄을 맞으니 적잖이 당황스러웠고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자존심의 문제를 가뿐히 ‘스킵’하고 나니 우리의 섹스 라이프는 훨씬 다채롭고 즐거워졌다. 그녀는 지난 6년간 나와 섹스하면서 말하지 못했던 부분을 야금야금 얘기하기 시작했고, 나 또한 그랬다. 요즘 우리의 섹스는 마치 재미있고 비밀스러운 공모를 하듯 긴밀한 협조 속에 이루어진다. “거기 베개 좀 줘봐.” “여기다 놓을까?” “아니, 그 아래가 낫겠어. 그래, 거기. 그래…. 그래! 좋아….”
물론, 나쁜 점도 있다. 처음에 염려한 대로 여자친구가 쓴 섹스 칼럼을 본 지인들이 “너네 이야기 아니냐?”라고 묻는 것이다. 표지에 여자친구가 쓴 기사의 타이틀 ‘섹스 9년차 에디터가 솔직히 답한 Crazy Sex Q&A’가 실린 달에 여자친구는 수시로 주위 남자들의 재미없는 농담을 받았다고 한다. 어떤 남자는 ‘이번 달 기사 봤어요. 9년차라니, 저보다 선배시네요. 앞으로 가르침 좀 받을 수 있을까요?’라는 능글맞은 문자를 보내기도 했고, 어떤 남자는 남자친구랑 진짜 ‘그렇게’ 하냐며 기사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언급하더란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아니라고 딱 잡아떼는 게 상책이다. 우린 오랜 연인이지만 여전히 수줍어하고, 서로의 욕망에 ‘그 따위로’ 충실하지는 않다고 항변하면 그만이다. 실제로 내가 읽은 것이 정확하다면 우리 이야기는 거의 없었고 있다 하더라도 절묘한 재편집 과정을 거쳐 실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는 예습보다는 복습을 주로 했으니까. 공부 못하는 애들이 책에 나온 내용은 무조건 다 맞다고 생각하고, 책을 많이 안 읽는 애들이 책 속 내용은 다 작가가 경험한 것이라고 믿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칼럼은 그저 칼럼일 뿐이다. 지금은 친구의 애인들에게 여자친구의 섹스 칼럼을 권하기도 한다. 섹스 칼럼을 읽거나 쓰는 것은 또 다른 분야의 재테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섹스 칼럼을 읽어라, 꾸준히 노력한 결과 종잣돈을 모은 경험자의 조언이다.
안동선(<코스모폴리탄> 에디터)의 연인
이 말은 기억나
“오럴 섹스는 불가결의 수순으로 생각하면서 커닐링구스는 여친이 튕기는 날에 해주는 특별 서비스로 여긴다. 그들은 커닐링구스가 한 치 혀로 오르가슴을 선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걸 모르는 바보다.”
2008년 3월 <코스모폴리탄>‘Get Him to Go There’
→ “커닐링구스가 뭐여?”라고 묻던 나는 이런 칼럼들을 읽으며 ‘득템’을 한다. 7년차 커플인 우리에게 때론 이런 기사는 연서에 다름 아니다.
너까지 그럴 줄 몰랐다
결국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매달 나에게 쓸 만한 섹스 아이템이 없냐고 물어볼 때마다 ‘언젠가 기사도 쓰라고 하겠구나’ 싶었다. 섹스 기사 한 번 쓸 때마다 정자가 백만 마리씩 죽네 마네 하더니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그가 처음 <아레나>로 옮길 때가 생각난다. 그는 이런저런 상황으로 어쩔 수 없이 섹스 기사를 맡게 되었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자기는 소변기를 깨트릴 만한 정력의 소유자가 아니며, 왕성한 성욕의 소유자는 더더욱 아니며, 친구들과 술 마시고 시덥잖은 농담이나 하는 것이 더 즐거운 사람이라며 말이다.
그는 조금만 기다리면 다른 기자에게 섹스 기사를 넘길 거라며 큰소리를 쳤지만, 여전히 섹스 담당 에디터이며, 이제는 본인 스스로 은근히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섹스 칼럼을 쓰는 것이 싫다.
‘그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당신이?’가 내 솔직한 심정이다.
몇 달 전 그가 ‘극단적인 섹스 실험기’라는 제목의 칼럼을 준비한 적이 있다. 그가 자신을 위해 한 번만 동참해줄 수 있겠느냐고 말했는데, 그 내용인즉슨 영화 <색,계>에서 양조위와 탕웨이가 나눴던 그 애크러배틱한 포즈를 실험해보자는 거였다. 나는 그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일단 뭔가 실험에 이용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고, 그의 토실토실한 몸으로는 애초에 그런 자세가 불가능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난 그에게 이렇게 소리쳐버렸다. “그럴 거면 차라리 다른 여자를 찾던가. 내가 무슨 실험 대상이니?”
머리를 긁적거리며 날 위로할 말을 찾던 그를 보면서 미안하기도 했지만, 그 이후 그는 비슷한 종류의 부탁은 한번도 한 적이 없다. 일련의 사건이 있은 후 나는 섹스 기사를 소비하는 이들도, 섹스 기사를 쓰는 내 남자친구도 미워하게 됐다. 3분 컵라면 먹듯이 섹스를 원하는 남자 이야기나, ‘옛다 한 번 먹어라’라는 식으로 남자와 섹스를 했다는 여자 이야기, 달리는 차 안에서 남자에게 흔쾌히 오럴 섹스를 해줬다는 식의 에피소드들을 굳이 만들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평상시엔 그런 데 별로 관심이 없는(척하는) 그가 꼴통 마초들이나 낄낄대며 볼 만한 기사를 굳이 기획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그런 섹스를 원하는 남자들이 정상으로 보이기나 하는지.
혹시나 해서 그에게 물었다. 알고 보면 오빠도 교복 차림의 여동생을 그리며 자위를 하고, 바니걸 옷차림의 여자에게 오럴 섹스 받기를 원하며, 여자친구 입 안에 사정하길 상상하느냐고. 그는 왜 그런 걸 물어보냐는 표정으로 딱 한마디 했다. “당연하지.” 그러거나 말거나 내 남자친구는 올해도 계속 섹스 기사를 쓸 것 같은데, 한 가지만 당부하고 싶다. 부디 기사에 나오는 남자들 반만이라도 잘해주시길. 입만 살아가지고.
이기원(<아레나> 에디터)의 연인
이 말은 기억나
“지금도 남자들은 샤워장에서 서로의 페니스를 훔쳐보며 비교하느라 눈알을 굴리기 바쁘다. 그 시선 안에는 더 큰 페니스를 가진 녀석이 더 많은 여자를 만나, 더 많은 섹스를 하고, 상대를 애걸복걸하게 하고 말 것이라는 본능적인 질투가 담겨 있다.” 2008년 7월 <아레나>
→ 아직도 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다는 걸 남자들은 모르는 것 같다.
대체 어디까지 갈 건데?
내 남자친구는 나보다 나이가 열몇 살이나 더 많고, 심지어 자유분방하다는 유럽의 대도시에서 오래 산 경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남자가 분명 오대양 육대주의 모든 여자들과 한 번씩 섹스를 해봤을 거라고 상상했었다. 하지만 정작 사귀고 보니 이 남자, 여성 편력이 화려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폭이 좁은 것 같았고, 현란한 테크닉을 구사하는 섹스의 달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연애에 대한 책을 쓰겠다고 했다. 그때쯤은 나도 이미 그의 과거사를 상당 부분 알고 난 뒤였으므로 ‘그가 찌질남으로 보이면 어떡하나’ 내심 걱정스러웠다. 게다가 그는 보통 남자들보다 훨씬 더 여성적인 성향을 지닌 남자였고 난 그런 모습을 세상 사람들에게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가 연애에 대한 책을 쓰는 동안 난 조력자가 되어서 함께 고민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여자인 내가 거꾸로 대한민국 남성의 입장을 대변하며 마초적인 발언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연애에 관한 책을 쓰고 나더니 그때부터 그는 연애와 섹스에 관한 글을 잡지에 쓰기 시작했다. “쪽팔리게 섹스 칼럼이 뭐냐”고 겉으로는 무시했지만, 결국 이번에도 난 대놓고 과대 포장을 해서라도 이 남자가 좀 더 근사한 남자로 보이도록 도와주었다.
그런데 요즘은 내 남자친구가 고수였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몇 년 전에는 사랑 어쩌고 하는 달콤한 카운슬링만 하던 남자가 얼마 전부터는 아예 섹스 칼럼을 고정으로 꿰차고 앉아서 표현 수위를 점점 높여가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수위를 조금씩 높여온 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요즘은 나와 의논도 하지 않고 자신의 지나간 연애사와 섹스 경험까지 늘어놓는다. 내 남자의 구체적인 과거사를, 그것도 공개된 지면을 통해서 확인하는 기분이라니. 그건 섹스 칼럼을 쓰는 남자의 여자친구로 지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다.
사실은 그것도 내 잘못이다. “다 지나간 일인데 뭐 어때”라며 동의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요즘은 그가 쓰는 섹스 칼럼을 안 읽으려고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다. 그것도 직업의 일부니까 뜯어말릴 수는 없지만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남자,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걸까?
이동준(<무비위크> 섹스 칼럼니스트)의 연인
이 말은 기억나
“여자의 신음소리가 남자를 흥분시키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건 남자들 생각이지만, 실제로는 남자를 배려하기 위한 게 아니라 그녀들 스스로 자신을 응원하는 소리일 수도 있지 않을까?” 2008년 11월 <무비위크>
→ 솔직히 이런 생각까지 해내는 걸 보면 내 남자친구의 여자 경험이 생각보다 정말 많은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애무 좀 해줄래?
그녀가 섹스 칼럼을 쓰게 된 것은 내 영향이 크다. 4년 전 모 사이트 편집장과 함께 술을 마시게 됐는데, 그 자리에 나와 편집장이 합세해 그녀에게 칼럼을 써보라 부추겼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좀 부담스러워하며 딱히 할 말도 없다고 고민하던 그녀는 막상 칼럼을 시작하자 수위 조절을 고민하기는커녕 오히려 막 나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댓글을 읽으며 마음을 졸이는 것은 오히려 내 몫이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기반으로 한 섹스 칼럼이긴 하지만, 어쨌든 야한 소재를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노는 여자’라는 비난성 댓글이 많이 달렸고, 주장이 다소 강한 글에는 ‘여자 마초’라는 욕도 심심찮게 올라왔다. 처음에는 그녀도 그런 댓글에 다소 신경을 쓰는 듯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무감각해져갔다. 그녀가 고민하는 것은 오히려 이런 쪽이었다.
“쓰다 보면 칼럼이 아니라 야설을 쓰는 것 같아.”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그녀의 칼럼을 읽지 않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읽어볼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칼럼이 과감해질수록, 조금씩 엄습해오는 이 불안감은 뭔지….
불행하게도 걱정은 현실로 변했다. 이론적으로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여자친구 앞에서 나는 한순간에 포르노에서 본 것 이외에는 아는 것이 없는 남자가 되어버렸다. 나는 잘못 알고 있고, 어설프게 알고 있고, 테크닉을 무용하다고 생각하는 촌놈이었던 것이다. |
가끔 그녀는 소재가 없어서 큰일이라고 혼잣말을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왠지 내가 기발한 소재를 제공해주어야 할 것 같은 책임감도 몰려온다. 섹스 칼럼니스트로서 감을 잃지 않으려면 남의 이야기를 찾아다니기보다는 자기 경험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을 들을 때면 마흔을 목전에 둔 나의 마음은 두 근 반 세 근 반….
몇 달 전 <아레나>에 실린 ‘여자가 원하는 애무’ 원고를 쓸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녀는 원고를 쓰고 나는 청소 중이었는데, 계단을 닦고 있던 나를 그녀가 불렀다.
“여자가 원하는 애무에 관해 써야 하는데, 감이 잘 안 오네. 지금 애무 좀 해줄래?”
한 손에 걸레를 쥔 채,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어깨에서 목까지 입을 맞추어야 했다.
“어때? 느낌이 와?” “어, 고마워.”
나는 다시 계단을 닦으러 갔고 그녀는 원고를 썼다. 섹스 칼럼니스트의 연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그녀의 과거를 알아야 한다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문제는 그녀의 현재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제일 무섭다.
박소현(섹스 칼럼니스트)의 연인
이 말은 기억나
“지나친 전희 요구와 후희 압박은 우리 자신을 수동태로 전락시키기도 한다. 섹스에 있어서 수동태가 되면 그것은 곧 ‘싫지만 한번 해 줄게’로 변질되고 결국은 그 함수에 스스로 묶여 평생 섹스에 있어 자유롭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2005년 10월 10일 <딴지일보> 남로당
→ 남자 입장에서는 무조건 호응하고 싶은 글이었다.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