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y 보리 Retouching 신호준 Set Styling 노제향 Feature Editor 박지호 Fashion Editor 민병준
“막상 공식 인터뷰에 응하려니 무척 쑥스럽구먼. 그냥 지금껏 살아온 인생 이야기나 쭉 듣고 가면 안 되겠나? 난 내세울 게 없는 집안에서 평범하게 자랐어. 시골에서 성장한 탓에 별다른 문화 혜택도 받을 수 없었지. 어릴 적 외갓댁에 들렀다가 우연히 고가구의 아름다움에 푹 빠지고 말았어. 그런데 주변에 누가 설명해줄 사람이 하나라도 있어야 말이지. 학창 시절 용돈만 생기면 이런저런 가구 화보를 사들여 달달 외우고 다녔지만 갈증을 속 시원히 풀기엔 역부족이었어. 20대에 서울로 상경해서는 이태원, 을지로를 전전하며 빈티지 가구들을 보러 돌아다녔지. 결국 40대에 한국 최초의 이탤리언 레스토랑 ‘아지오’를 오픈하고 나서야 어릴 적부터 마음 한구석에 품어왔던 꿈을 본격적으로 실현해갈 수 있었어.
처음에는 주변 사람 모두가 뜯어말렸다고.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지만 어렵게 번 돈을 기껏 낡아빠진 가구를 사 모으는 데 탕진한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는 거였지. 그것도 수십억 단위의 돈을 퍼부었으니 말이야. 그런데 사람들이 놓친 게 하나 있어.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푹 빠져 살아가다 보면 돈은 자연스럽게 뒤따르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거야. 지금의 나를 보라고. 세계 곳곳을 연결하는 막강한 네트워크를 갖췄을 뿐 아니라 감히 값으로 따질 수 없는 ‘aA’라는 고부가가치 브랜드 이미지를 획득하지 않았는가. 자고로 멀리 보고, 크게 볼 수 있어야 하는 법이야.
빈티지 가구의 매력이 뭐냐고? 그 당시의 시대 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스쳐 지나간 덕에 말로 형언할 수없는 묵직한 광채를 발한다는 것이겠지. 모든 가구에는 그 디자이너만의 독특한 철학이 담겨 있어. 1920년대 파리에서 활동했던 아일랜드 출신 에일린 그레이를 가장 좋아해. ‘양성애자’로서 진보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독특한 가치관이 미니멀의 극치를 보여주는 작품들에 잘 담겨 있기 때문이지. 톰 딕슨은 솔직해서 좋아. 산업혁명 이후 등장한 디자인은 곧 커머셜일 수밖에 없다고. 예술가인 척하지 않고 디자인을 산업 논리로 접근하는 담백함이 그의 작품 곳곳에 오롯이 담겨 있지.
왜 하필 홍대 앞에 고가의 빈티지 가구로 장식된 카페를 열었느냐고? 그게 바로 빈티지 정신이기 때문이지. 서서히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갈 때 훨씬 더 광채를 발한다는 진리. 물론 이유가 하나 더 있어. 20대 때 딱 한 번,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을 후회한 적이 있었거든. 가구를 그렇게나 좋아하지만, 난 앞으로도 고작 광적인 수집가밖에 되지 못할 거라는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이지. 어릴 때 더 많은 가구를 접해봤더라면, 더 풍부한 예술적 소양을 키울 수 있었다면 나도 그 누구 못지않은 대단한 디자이너가 될 수 있었을 거라는 뒤늦은 한탄. 그야말로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 그래서 요즘 친구들에게 마음껏 보여주고 싶은 거야. 젊은 친구들이 디자인 감각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겠다는 거지. 돈이 없어서 예술적 감각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원천봉쇄당하는 것은 우리 세대로 족하다, 이거야.
그리고 난 무엇보다 홍대 앞이 좋아. 나와 비슷한 보헤미안 감수성을 가진 젊은 친구들이 넘쳐나는 곳이거든. 생각해보게. 청담동의 번듯한 거리에서 바닥에 퍼질러 앉아 소주 한 잔 기울인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하지만 홍대 앞은 그렇지 않아 최신 스타일로 ‘새끈’하게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철퍼덕 주저앉아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며 소주잔을 기울이는 풍경이 잘 어울리는 공간이라고. 그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나날이 리프레시되는 충만한 삶을 만끽하고 있지. 내 인생, 이 정도면 충분해. 남은 재산, 저세상으로 떠날 때 싸갖고 갈 것도 아니잖아? 무라카미 류가 20~30대에 탕진한 돈으로 얻은 풍족한 경험 덕택에 평생 소설을 쓰며 먹고 사는 것처럼 나도 지금껏 가구에 투자한 것만으로 남은 인생을 충분히 끌고 갈 수 있다고. 이 정도면 충분한 것 아닌가?”
Arena Says
김명한 대표가 유럽과 미국, 남미와 동남아시아, 일본, 중국, 아프리카 등지에서 사 모은 빈티지 가구는 약 10만 점에 달한다. 컬렉션의 종류도 광범위하기 이를 데 없다. 모더니즘 디자인의 선구자 찰스&레이 임스, 덴마크 디자인의 아버지 핀 휼, 20세기 가장 중요한 디자이너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피에르 폴린의 대표작은 물론, 1850년대 프랑스 우체국에서 실제로 사용되었던 편지 분리 데스크, 190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영국 최초의 목제 냉장고 등 독특한 아이템이 그야말로 넘쳐난다. “나만의 선택 기준? 무엇보다 그 가구만의 오라에 꽂혀야 해. 그 디자이너만이 갖고 있는 독창성과 오리지널리티도 중요하지만 선배 디자이너들의 영향을 솔직하게 반영하는 정직성도 중요하지. 거기에 독창적인 해석까지 뒷받침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테고.” 김 대표가 가장 최근에 꽂힌 디자이너는 스페인 출신의 헤이미 아이언. 30대에 불과한 나이인데도 클래식을 재해석하는 능력이 일품이란다. 바르셀로나 출신인 탓에 가우디의 자연주의 영향을 짙게 받은 독창성이 돋보인다고. 훌륭한 디자이너는 주입식 교육이 아닌 어릴 때부터의 환경이 키운다는 그의 지론을 입증하는 최신 사례인 것이다.
Profile 오십삼 세라는 나이가 무색하도록 최신 스타일을 고수하는 김명한 대표는 ‘빈티지 가구’라는 아이덴티티를 평생 가슴속에 품고 살아왔다. 십수 년 전, 한국 최초의 이탤리언 레스토랑 아지오를 오픈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가구를 사 모으기 시작해, 지금은 세계 시장을 주름잡는 컬렉터 위치에까지 올라섰다.
‘내 레스토랑을 찾아준 사람들은 모두 빈티지 가구를 수집할 수 있게 도와준 기부자’라는 게 김 대표의 지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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