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ds 김도훈(<씨네21> 기자) Editor 이지영
가십부터 먼저 시작해볼까나. 한국 영화의 세계에는 실체 없는 몇 개의 VIP 클럽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그 유명한 ‘청담동 클럽’ 말이다. 영화계 사람들이 술자리에서나 입에 담는 이 클럽의 멤버는 박찬욱, 김지운 등을 중심으로 한 몇몇 감독이다. 그러니까 90년대 후반 등장해 ‘웰메이드 영화’라는 말을 탄생시킨 몇몇 젊은 감독을 제철 굴비처럼 한데 묶어서 지칭하는 거다.
청담동 클럽에 맞먹는 또 하나의 영화계 지하 클럽은 이른바 ‘천만 클럽’이다. 간단하다. 국내 박스오피스에서 천만 관객을 불러들인 적이 있는 감독들을 한데 모아서 부르는 이름이다. 그저 ‘<실미도>의 강우석, <태극기 휘날리며>의 강제규, <왕의 남자>의 이준익, 그리고 <괴물>의 봉준호’라고 길게 쓰는 게 귀찮은 영화 저널계가 손쉽게 만들어낸 단어라 생각하면 된다.
청담동이든 천만이든 실체가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새롭게 데뷔하는 대부분 신인 감독들은 청담동 클럽 혹은 천만 클럽의 회원이 되고 싶어한다. 예술과 흥행의 균형을 절묘하게 타는 세련된 웰메이드 영화를 만들거나, 혹은 투박하지만 힘 있는 영화를 만들어 천만 명을 극장으로 불러들이거나. 재수가 좋으면 둘 다 쟁취하거나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2008년 한 해, 청담동 클럽과 천만 클럽의 회원권 가치는 부도난 캘리포니아 피트니스 회원권 정도에 맞먹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예술적인 점수는 차치하더라도 두 클럽의 멤버들이 공히 박스오피스에서 기록적인 폐퇴를 겪었기 때문이다. 청담동 클럽의 김지운은 천만 클럽 타이틀의 석권까지 노리며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만들었으나 국내 박스오피스에서 제작비나 겨우 건지는 데 만족해야 했다. 최종 성적은 7백만이다. 원래 6백만대 후반에서 끝나게 될 운명이었으나 배급사와 제작사가 7백만은 만들어보자고 투합했다는 소문도 있다. 김지운의 후배 류승완의 <다찌마와 리>는 관객과 소통하는 데 결국 실패했다.
천만 클럽의 거성들도 만만치 않게 쓴맛을 보고 있다. 이준익은 70억원짜리 <님은 먼곳에>로 돌아왔다. 이준익 감독은 거대한 웰메이드 역사극을 만들 만큼 디테일한 감독은 아니다. 대신 그에게는 된장처럼 구수한 정서가 있다. 문제는 찐득한 정서 하나만으로 70억짜리 영화를 대차대조표에 맞춰내기란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거다. 강우석의 <공공의 적: 강철중 1-1> 역시 마찬가지다. <한반도>라는 재앙과 시네마서비스의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겸손해진 강우석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장르로 돌아왔다. 하지만 지루한 동어반복의 세계에 끝없이 박수를 보낼 관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강철중 시리즈는 정말로 생명을 다 했다. 강제규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는 한동안 할리우드 진출이라는 테제를 내세웠다. 하지만 할리우드는 좋은 재능을 삼킨 뒤 단물만 쏙 빼먹고 처참하게 버리기로 유명한 장의사다(시간만 축내다 돌아온 이명세를 생각해보라). 강제규는 대신 2백억짜리 블록버스터급 TV 시리즈 <아이리스>의 제작자로 복귀한다. 그러나 드라마는 드라마고 영화는 영화다. 강제규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특수효과를 잔뜩 버무린 거대한 블록버스터에 대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다. <태극기 휘날리며>를 뛰어넘는 물건을 내놓아야만 한다는 강박관념 말이다.
재미있는 건 봉준호다. 그는 청담동 클럽의 예술적 고고함과 천만 클럽의 자본주의적 도도함을 모조리 끌어안은 유일한 감독이지만 두 클럽의 그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그는 이준익처럼 관객의 울컥하는 가슴만 믿고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충무로식 모험은 하지 않는다. 강우석이나 박찬욱처럼 자신의 영화사를 차린 뒤 비즈니스맨과 아티스트의 자리를 넘나들며 골머리를 썩이지도 않는다. 김지운이나 강제규처럼 그럴듯하게 육중한 넥스트 빅 싱을 내놓아야 한다는 강박도 없다. 그는 2008년 이후 한국 영화계에서 천만이라는 숫자는 불가능한 목표임을 이미 잘 알고 있으며 능력 이상의 관객 동원을 원하지도 않는다(그는 <괴물>의 관객을 5백만 정도로 예상했고 해외 판권으로 미리 닥칠 손해를 메울 수 있어서 기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게다가 신작 <마더>는 기껏해야 중·저예산의 드라마다).
봉준호는 옳다. 천만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천만 관객의 시대가 된 것은 지난 10년간 끊임없이 확장된 멀티플렉스 덕이다. 이를테면 한국 영화 천만시대 직전 최고 흥행작인 <친구>(2001년)는 개봉 주 스크린 수가 1백60개였다. 그것도 기록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천만 영화 <실미도>의 개봉 주 스크린 수는 두 배에 가까웠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아예 5백13개의 스크린을 장악하며 전국 스크린의 50%를 휩쓸었다. 아마도 그것이 한국 영화 마지막 꿈의 세기였을지도 모른다. 당시 영화 관계자들은 천만 영화들이 일궈낸 흥행 성과에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이후 한국 영화의 수익 모델과 한국 상업영화의 시스템 구축에 거대한 플러스 요인이 될 거라고 분석했다. 시장을 감안하지 않고 대작 영화를 추구하는 기획이 쏟아져 나올 것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비판은 기립 박수에 완전히 묻혔다. 당시 승승장구하던 제작사 싸이더스의 이야기를 되새겨보자. “예년처럼 단기적으로 시장이 혼란스러운 상황이 올 수도 있지만 해외 시장 개척 등을 함께 고려한다면 굳이 우려할 필요까진 없다.” 과연 그러한가. 한류는 끝났다. 일본 쪽에 미니멈 개런티 3백만 달러에 배급권을 넘기면서 호탕하게 웃음 지었던 <실미도>의 재현은 이제 더 이상 없다. 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일본 바이어들은 “더 이상 시놉과 캐스팅만 보고 몇백만 달러를 지불할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큰돈 풀어 큰돈 먹기는 지금 한국 영화계에서 불가능하다. 충무로 라스베이거스 시대는 막을 내린 지 오래다. 오래 살아남고 싶다면 봉준호 같은 영특한 비즈니스 마인드를 갖춰야만 한다.
비즈니스맨이 아니라 예술가로서도 봉준호는 기막힌 줄타기의 명인이다. 절대 나쁜 소리가 아니다. 이를테면 박찬욱과 김지운. 그들은 예술가로서 자아가 지나치게 강하다. 심지어 예술을 유희로 생각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영화는 일제시대 만주를 배경으로 하건 현대의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하건 실제 세계 상을 우리에게 비춰주지 않는다. 모든 것은 탈색된 세계다. 그들이 특정한 시대를 불러낼 때는 그것이 예술가의 욕망과 환상을 창조하는 데 근사하고 적합해 보이기 때문일 뿐이다. 반면 강우석과 강제규와 이준익은 끝없이 자신들이 살아온, 혹은 살아가는 시대에 집착한다. 그들이 블록버스터를 만드는 이유는 어떤 방식으로든 한국의 과거와 현실, 때로는 미래에 대해서 한소리 하고 싶어서인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봉준호는 다르다. 그의 영화는 예술가의 환상을 최대한으로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시대적인 함의 또한 놓치지 않는다. <플란더스의 개>부터 <살인의 추억>을 지나 <괴물>에 이르는 그 아름다운 순환 곡선을 보라. 그는 관객이 살아가는 이 시대의 고민과 죄악과 흥분과 희열을 자신이 원하는 환상과 엮어낼 줄 안다. 그는 청담동 클럽과 천만 클럽의 나머지 회원들이 좀처럼 엮지 못하는 두 요소를 귀신처럼 봉합해버린다. 정말이지 봉준호만이 해낼 수 있는 경지의 서커스다.
물론 봉준호가 <괴물> 이후 장 마르크 로셰트와 뱅자맹 르그랑의 동명 프랑스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설국열차>를 영화화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그 역시 균형을 잃어버리고 비틀거리나 싶었더랬다. <설국열차>의 무대는 지구가 완전히 얼어붙은 미래의 지구다. 설국열차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최후의 생존자들을 가득 싣고는 끊임없이 달린다. 자체적인 계급 제도가 형성된 열차는 인간 세상의 축약본이나 다름없다. 인류의 암울한 계급적 영속성을 열차라는 메타포에 집어넣은 프랑스산 SF 디스토피아 만화의 영화화라고? 도박도 이런 도박이 어디에 있는가. 하지만 영리한 봉준호는 “<설국열차>는 2011년 개봉이 목표”라고 못 박더니 비교적 작고 가벼운 프로젝트들을 손에 얹고 유유자적 놀기로 마음먹었다. 하나는 레오스 카락스, 미셸 공드리와 함께한 삼부작 옴니버스 영화 <도쿄!>, 다른 하나는 김혜자와 원빈을 주연으로 내세운 드라마 <마더>다.
재미있는 건 봉준호다. 그는 2008년 이후 한국 영화계에서 천만이라는 숫자는 불가능한 목표임을 이미 잘 알고 있으며 능력 이상의 관객 동원을 원하지도 않는다. 봉준호는 옳다. 천만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
곧 개봉을 앞둔 <흔들리는 도쿄>는 10년간 히키코모리(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자폐증)로 살아온 남자가 피자 배달부 소녀를 사랑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집 밖 나들이에 성공한다는 이야기다. 봉준호의 장점은 이 소박한 중편에서도 오롯하다. 히키코모리 남자가 10년간 소름끼치는 결벽증으로 창조해낸 다다미방의 질서는 봉준호 영화와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편집과 미술의 디테일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후반부의 스펙터클은 압도적이다. 이 작은 제작비의 중편에 무슨 스펙터클이냐고? 피자 배달부를 찾아 나선 남자는 도쿄를 가로지르며 끊임없이 달리고 또 달린다. 그리고 남자는 발견한다. 수천만 명의 주민이 모두 히키코모리가 되어 집 안에만 틀어박힌 이상한 도쿄를. 마치 <28일 후> 시작부의 텅 빈 런던이나 <나는 전설이다>의 텅 빈 맨해튼을 연상케 하는 <흔들리는 도쿄>의 텅 빈 도쿄는 압도적으로 우아하고 또 아름답다. 문제는 대체 봉준호가 이 장면을 어떻게 찍어냈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도쿄 중심가를 텅 비울 만한 제작비가 없었을 것이며, 도쿄 중심가는 단 한순간도 텅 비지 않았다. 모든 비밀은 봉준호의 머릿속에 있다. 그러나 그 비밀을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이 조그마한 프로젝트에 1년 가까운 시간을 바치면서까지 완벽한 완성도를 추구한 봉준호의 집념이다. <흔들리는 도쿄>가 남의 권유로 뛰어든 잠시 쉬어가기 프로젝트라면, 곧 촬영에 들어갈 <마더>는 정말로 봉준호의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본격적인 차기작이다. 재미있는 건 이 영화가 <괴물>만큼이나 미스터리하다는 거다.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김혜자를 먼저 염두에 둔 뒤 이야기를 떠올렸다”고 한다. 봉준호가 머릿속에 짊어진 김혜자의 이미지는 ‘의외성’이다. 예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봉준호는 말했다. “그에게서 다른 면을 많이 봤다. 연기가 아니라 실제로 히스테리가 폭발한 느낌이랄까. 몹시 불안정하고 강박 같은 인상을 받았고 거기에 매혹된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러나 <마더>에 대해서 봉준호는 여전히 함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디 인터뷰에서 끌어 모은 퍼즐 조각들을 한번 맞춰보자. 원빈은 “살인 누명을 쓰는 스물여덟 살짜리 남자”로 “사건에 걷잡을 수 없이 휘말려 들어가면서 어떻게 하지 못하는 캐릭터”다. 그리고 어머니 김혜자는 “시골에서 아들의 구명을 위해 도시로 가는 캐릭터”다. 그렇다면 <마더>는 살인 누명을 쓰고 기소된 스물여덟 살 아들을 구명하기 위해 도시로 올라온 연약한 어머니의 이야기다. 봉준호에 따르면 어머니가 홀로 사실을 파헤침에 따라서 “어둡고 축축한 비밀이 하나씩 열리기 시작한다”고 한다. 윤곽은 뚜렷하다. 그러나 디테일은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 파악할 수가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게 있다면 이번에도 이 기막힌 예술적, 상업적 서커스의 지휘자는 우리 모두 혀를 내두를 영화를 내놓을 거라는 사실이다. ‘천만 이후’라는 한국 영화 신세기의 묵시록적 아비규환 속에서도 봉준호의 이름은 오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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