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힙합 신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고 활발하게 돌아가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 어느 때보다 지루하다. ‘스웨그(Swag)’로 무장한 힙합이라는 장르의 멋은 상투적으로 변했고, 힙합을 좇다 부를 거머쥔 래퍼들의 ‘스웨그’가 본질인지 아니면 부를 좇는 데 힙합을 수단으로 쓸 뿐인지, 여전히 눈치를 보며 방향을 잃은 래퍼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이야기만 늘어놓으며 명분을 잃어간다. 힙합이라는 장르의 시초에 작정하고 접근해본다면 한국 힙합 신에선 그 누구도 오리지널리티를 획득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이런 게 진짜 힙합이다’라는 관념까지 뒤틀린 뿌리를 틀고 있다. ‘힙합’이라는 틀 안에 제 스스로 발목이 잡혔다.
이런 상황에서 발표된 천재노창의 EP
지난 5월 발표한 ‘All Day’ 싱글을 듣고 인터뷰 요청을 했었다. 그때 EP를 준비 중이란 말을 듣고 좀 더 기다렸다.
나는 힙합 음악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여러 가지 스타일의 곡들을 만들어둔다. ‘All Day’는 원래 장기하 씨나 유세윤 씨가 부르면 어떨까, 하면서 만들었다. 그래서 가이드도 일부러 그런 느낌으로 불렀지. 그런데 저스트 뮤직 멤버들이 ‘이건 너만 할 수 있는 감성이야’ 하길래 ‘내가 힙합 하는 사람인데 이런 걸 해도 되나’ 잠깐 고민하다 그냥 냈다. 가이드 부른 상태에서 새로 녹음 안 하고 조금만 손대서 발표한 거다. 가사가 장난스러우면서도 실제 있을 법한 이야기잖나. 그렇게 가벼운 느낌이었는데 타블로 형의 진지함으로 신기하게 밸런스가 잡히더라.
복고적인 감성이나 바이브도 좋아하나 보다.
어렸을 때 아버지 차 타면 산울림, 봄여름가을겨울 노래가 흘러나왔다. 좋아한다기보다는 원초적으로 몸에 배어 있는 것 같다. 아버지가 ‘All Day’ 듣고 좋아하셨다.
그 싱글을 통해 이어서 발표할 EP로 반전을 주려고 했던 건가?
동료들이 부추겨서 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해서 제목도 일부러 바꾼 거다. 카니예 웨스트(Kanye West)가 발표한 싱글 제목으로. ‘쟤, 또 카니예 따라 했나?’ 하는 사람들에게 내 싱글 자체로, 그리고 곧 이어질 EP 앨범으로 반전을 주면 좋겠다 싶었지.
이번 EP 앨범이 흥미로웠던 건 가사에서 제기하는 문제가 힙합이라는 틀 안에 갇혀버린 힙합 신 자체를 이야기해서다. 신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해서 더욱.
원래 앨범 작업 시작할 땐 타이틀이 ‘사르카즘(Sarcasm)’이었다. 나도 불만이 많았거든. 왜 다들 트렌드를 따라가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옛날 거, 구린 걸 하고 있나? 혼자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 거지. 그런데 한 발자국 떨어져 들여다보니 내가 제일 트렌디한 걸 많이 만들고 있더라. 결국 비꼬는 대상 또한 나 자신이 되겠구나, 했지.
앨범 안에서 던지는 질문의 대상은 그럼 누구인 건가?
내가 앨범 안에서 비꼬면서 ‘힙합이라는 게 이런 거냐?’ 식으로 한 랩은 다 질문이다. ‘힙합’이 들어간 문장은 내가 정답이라는 게 아니고, 모두 나 자신이나 듣는 이들에게 던지는 질문인 거다. ‘대체 힙합이라는 게 뭐냐?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하는 거지. 우리는 힙합이 탄생한 미국과는 아예 다른 문화권에서 태어나 자랐고 사상 자체도 다를 수밖에 없는데, 이 안에서 우리끼리 누가 진짜 힙합이네, 누가 제일이네, 그런 얘기해서 뭐할 거냐, 어차피 다 음악 아니더냐, 이런 걸 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거다.
‘그렇다면 결국 네가 제시하는 답은 뭔데?’라는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나에겐 답이 없다. 그래서 이 앨범은 ‘혼란’, 그 자체인 거다. 이 앨범 이전까지 제대로 된 내 앨범이 1장도 없었지만 그동안 뭔가 답을 내리고 앨범을 내야 한다고, 모든 게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성숙함을 일단 드러내고 계속해서 발전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맞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더라.
이 앨범은 최근의 날 선 감정을 갈고 갈아 극단으로 치닫도록 뾰족하게 만들어낸 앨범이다. 천재노창은 항상 무언가와 싸우면서 음악을 하는 느낌이 든다.
다수라는 대중에 노출되는 순간 나는 단 한 사람이다. 그들이 화살을 하나씩 쏴도 나는 그걸 다 맞는다. 반대로 내가 하나의 화살로는 많은 사람들을 다 맞힐 순 없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곡에 화가 드러난다. 사실 그런 경험을 하면 굉장히 무서워진다. 세상이 나를 버리는 것 같고. 래퍼도 사람이기 때문에 두렵고 무섭고 우울한 감정을 많이 느낀다. 물론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사람도 많지만 나 같은 경우는 그런 걸 더 크게 받아들이는 성격이다. 세상이 무서워지면 그 세상에 잡아먹힌다. 그래서 오히려 더 센 척, 뻔뻔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거다. 약하고 힘든 걸 드러내면 사람들은 더 괴롭힌다.
싸움을 즐기는 건 아니고?
아니, 나는 너무 힘들다. 이번 앨범 역시 자신만의 근거나 논리로 비판한 사람이 있더라. 물론 쿡 박혔지. 하지만 이번엔 방향이 틀렸다. 나는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똑바로 알고 이 앨범을 냈거든. 그래서 지금은 신경 안 쓴다.
한국 힙합 신의 현실적인 맥락에서 봤을 때 천편일률적인 분위기에서 다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이 앨범은 좀 다른 시각이나 표현으로 접근해 좋더라.
나도 그렇게 자부한다.
결과적으로 이 앨범을 통해 본인의 감정을 해소했나?
여태껏 내 음악을 못하고 있다 해버렸으니 속도 후련하고 스스로 대견하고 뿌듯한 게 제일 크다. 생각도 더 깊어지고 넓어졌고.
오랫동안 화살을 쏴야지, 쏴야지 하면서 당기고 있던 시위에서 활이 떠난 상황이다. 쏘는 순간의 카타르시스도 있을 텐데.
물론이다. 활시위를 3년 동안 당기고 있었으니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그 활이 날아가 누구에라도, 어디에라도 맞잖나. 그 자국도 언젠간 없어질 거고. 모든 해소감이 있다. 족쇄를 끊어버린 느낌이다.
음악이 고통일 수도 있겠다.
아니, 음악 하는 것 자체는 언제나 즐겁다. ‘행’ 가사에 ‘늪과 아름다움’을 다루는 부분이 있는데… 늪에 빠져 있다, 나는. 아름다움 속에 늪이 있을 수도 있는 거고, 늪 안에 아름다움이 있을 수도 있다. 아티스트로서의 자아인 ‘천재노창’과 인간으로서의 ‘노창중’은 분명 거리가 있다. 천재노창은 내가 완성하고 싶은 이상적인 자아인 거고 노창중은 한없이 여리고 예민한 인간일 뿐이다. 지금은 내가 죽을 만큼 힘든 시기라 아티스트로서의 자아가 더 크게 모습을 드러낸다. 보호 본능이다. 그래서 곡 작업이 더 잘된다. 나는 ‘불행해야 행복한’ 아티스트인 것 같다.
* Nouvelle Vague
<아레나>가 선정한, 지금 이 순간 가장 반짝이는 것은 물론이요, 훗날 또한 기대되는 아티스트 서포트 시리즈.
EDITOR: 조하나
PHOTOGRAPHY: Jdz Chung(정재환)
HAIR&MAKE-UP: 서은영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