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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아레나>는 검은색을 선봉에 내세웠다.
우선 표지부터 보자. 성자(盛者)의 얼굴을 하고 블랙 수트를 입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사진 위로 ‘Back to Black’이라는 단호한 타이포를 얹었다. 고지를 탈환한 자의 위용을 띤 그의 전면과 <아레나> 9월호에, 착 달라붙는 타이틀이라 생각했다. 블랙으로의 회귀는 이 가을의 패션 트렌드를 한 방에 표현하는 문장임에 틀림없으며 <아레나> 독자를 상징하는 블랙칼라 워커들에게 무더위로 느슨해진 생활의 태엽을 억세게 조이라는 계절적 메시지까지 덤으로 얹을 수 있다며 자가 최면에 돌입하기도 했다.
잡지 마감에 잔고개들이 어찌 없을까마는, 이달에도 역시 ‘Back to Black’이라는 거대한 타이틀에 얽매여 기자들의 마감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아레나> 9월호는 가을 패션의 거대 트렌드인 블랙을 테마로 한 기사들과 쇼핑 리스트, 화보들로 점철된 데다 블랙칼라 워커(혹 이 용어의 본질을 모르는 독자를 위해 295페이지에 창간호에 이은 앙코르 뜻풀이를 덧붙였다)의 심미안과 세심한 생활양식을 바탕으로 한 편집 수칙을 철저히 고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과욕을 부렸다. 마감을 하루 남기고 각 섹션의 대문을 블랙 칼럼들로 전면 재배치하기 위해 마감조(매달 기자들에게 돌아가는 당직 시스템의 일종)인 조우영과 김현태에게 끊임없이 일거리를 물어다주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사소한 욕심의 군더더기를 털어내지 못해서겠지만, 어떻게든 독자들에게 가을의 트렌드와 <아레나>의 편집 의도를 각인시키겠다는 머슴정신 때문이기도 했다. 덧붙여 마감 초읽기에 들어간 지금,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혹 <아레나>를 띄엄띄엄 읽는 독자는 없을까 하여 편집 의도랍시고 절절하게 사족을 단다. 또한 ‘Style for men’이라는 <아레나>의 슬로건이 트렌드의 경박함으로 인지되는 것에 대한 소소한 오해들을 풀어보고자 함이다. 블랙칼라 워커라는 나름의 촉수가 발달한 절개 곧은 남자를 말함이지, 지조와 의리를 버리고 ‘유행’이라는 단어에만 편승한 자가 아니라는 <아레나>의 신조에 대해 말이다. 이런 와중에서도 참으로 다행스러운 건, 남자들에게 있어 트렌드라는 것은 항시 ‘Back to Black’의 쳇바퀴 안에 있다는 것이다. ‘Back to Black’이라는 ‘Back to Basic’과 한 끗 차이이며 ‘편안함’의 근원이 되는 ‘베이식’의 범주 안에 있으므로. 누가 뭐래도 검은색의 이미지는 편안(便安)함이다. 앞선 유행의 선봉에 선 것도 블랙이고 그 수문을 지키는 것도 블랙이다. <아레나>는 채도 0의 블랙이 갖는 근원색으로서의 자질에 부합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을 당신에게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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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아, 인사동이 간절하다. 미로 같은 골목과 끈적끈적한 막걸리, 설탕을 뿌린 듯 달착지근한 늦여름 공기에 취한 자들이 내뿜는 미열이 가을을 재촉하는 축시(丑時)경의 풍광이 그립다. 검은색이 내려앉은 그곳은 엉성한 개발론과 해외자본의 진출로 전통성을 잃어간다는 정의구현의 찬란한 담론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소박한 취객들로만 가득한 안위(安慰)의 공간이 된다. 마감이 끝나면 감사와 사죄를 인사동의 검은 골목 한켠에서 나누고 싶다. 부끄러움으로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엔 검은 밤이 최고 아닌가.
감사하고픈 사람이 있다. 오다가다 인연을 맺게 된 축구선수 이관우. 사실, 과거 한 잡지의 데스크로 일하면서 화보를 찍기 위해 그를 섭외했고, 안타깝게도 콘셉트가 바뀌는 바람에(물론, 그 콘셉트를 뒤집은 흉악범도 바로 나다) 책에 싣지 못한 적이 있다. 그 후 언제 크게 한번 쏴야지, 맘(만)먹었으나 결국 전화 한통 못 하고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버렸다. 그런데 <아레나> 9월호를 위해 대전에 있는 그(물론 지금은 수원에 살지만)에게 또 한 번 안부가 아닌 뻔뻔한 섭외 전화를 날리고 말았다. 2년 만에 전화를 걸어 “잘 지내시나?”라는 말을 건네기가 어찌나 부끄럽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촬영에 응해준 그가 또 얼마나 고맙던지. 술 한잔 사겠다는 뜬금없는 약속을 또 해버렸다. 하하. 그런데 그는 담배도 끊었고, 술도 거의 안 마신단다. 에라, 마음으로 술잔을 날리며 다음번엔 편집장이 아닌 누나의 이름으로 ‘안부’ 전화를 하리라 약속해본다.
사죄하고픈 사람도 있다. 대상은 지난 <아레나> 7월호를 정독했을 독자들이다. 또 한 번 얼굴이 붉어진다. 지난 <아레나> 7월호에 ‘빈센트 앤 코’ 론칭 관련 기사를 실었음을 고백한다. 국내에 브랜드가 론칭하면 신속하게 독자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기자 정신에 충실한 것이었으나 소개할 만한 가치가 없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난 지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물론 브랜드가 론칭되었다는 간략한 박스 기사였으나 예리한 감식안을 발휘해야 할 기자의 본분에 어긋났음은 물론이다. 죄송하다. 부끄러워서 또다시 검은색 인사동표 장막 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이 작은 박스 기사가 에디터들의 훌륭한 기사들에 대한 의심으로 번지지 않게끔 하는 것도 내 몫이다. 맞다. 십수 년 전 인사동의 처마 높은 술집에서 만난 작가 김운경이 그랬다. 얼굴 벌게지는 게 부끄러워서 검은색 야구모자를 눌러쓴다고. 지금 이 순간, 나 역시 챙 넓은 검은 모자 속으로 얼굴을 감추고 싶은 심정이다. 잘못에 대한 나의 사과를 받아주길, 용서받은 나는 더더욱 당신을 미치도록 사랑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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