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y 서영진 Cooperation 레일유럽(Rail Europe) Editor 이지영
Nice 니스
칸영화제에 다녀온 선배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야! 니스가 백 배 낫더라. 니스가 칸보다 훨씬 좋았어!” 니스에 대한 기대가 엄청났던 것은 모조리 칸에 다녀온 선배들 때문이었다고 백 퍼센트 단언할 수 있다. 칸에서 기차 타고 20분만 가면 닿는 니스는, 그러나 그 가까운 거리와는 상관없이 칸과는 전혀 다른 무엇이 반드시 있을 거라고, 나는 당연하게도 상상하고 있었다.
빛나는 상상이 엄청난 공포로 다가오는 데는 사실 얼마 걸리진 않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두운 밤 니스 빌 역에 도착해 숙소를 찾다 보면, 정말 이곳이 선배들이 말하던 그 니스가 맞는지 회의하게 된다. 계속해서 드르륵거리는 트렁크 가방을 질질 끌면서 내 기대 역시 이 트렁크 가방의 바퀴처럼 드르륵거리고 있었다.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거리, 간혹 불이 켜져 있는 전화방 창문 너머로 느껴지는 엄청난 이질감이 니스의 첫날 밤에 대한 기억이다 (심지어 어마어마한 실망과 니스를 추천했던 이들에 대한 분노와 의구심이 솟구쳤다).
내가 이곳에 왜 왔을까 고민하다 잠들었던 지난밤은, 그러나 다행히도 쨍한 햇볕 가득한 아침으로 바뀌어 있었다. 흔히 ‘지난밤의 악몽’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나는 니스의 지난밤이 딱 그랬다. 그래서 창문을 통해 하얗게 들어오는 햇살마저도, 어쩌면 현실이 아닌 양 낯설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놓을 수 없다는 것이 맑게 갠 아침의 감정이었다. 계속해서 딱딱한 바게트를 씹으면서, 뜨거운 커피를 홀짝홀짝 넘기면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거다.
“앗! KFC다!” 여행지에서의 낯설고 서러운 감정을 씻어내주는 데에는 프랜차이즈 식당만 한 게 없다. 그저 ‘맥도날드’나 ‘KFC’만 봐도 반가운 것이다. 게다가 나의 전날 밤이 어땠는가. 관광객이라곤 단 한 명도 만나보지 못한, 감정적으로 무척이나 한쪽 구석에 처박힌 객쩍은 상태 아니었겠나. 그러니 KFC를 보고 이토록 촌스러운 탄성이 나올 수밖에.
조금 더 걸어가자 니스의 중심가 격인 마세나 광장이 나오고, 그렇게 얼마를 더 걸으니 바다가 손에 잡혔다. 저기 멀리 보이는 건 TV에서나 보던 화이트 컬러의 석회질 건물들이렸다! 흔히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풍경이란 어쩌면 이런 광경을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얼어붙어 있던 의구심이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었다.
니스는 갖출 건 다 갖춘 곳이었다. 눈앞에 짙푸른 바다가 있고, 적당히 구수한 분위기의 구시가지(시장 골목을 떠올리면 되겠다)가 있었다. 제법 커다란 백화점도 하나 있었고, 파리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레스토랑도 여러 곳 즐비해 있었으며, 무엇보다 노천 카페가 관광지의 그것에 비해 천박하지 않은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워낙 규모가 크지 않아서일까. 사람이 북적이는 구시가지 중심에 서 있어도 이곳이 시끄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제 나이 또래보다 훨씬 더 성숙한 외모로 건방진 표정을 지으며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어도 이상하게 번잡스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분명 내 눈앞엔 아주 작은 가게들이 오밀조밀 펼쳐져 있고,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골목은 좁디좁아 두 사람 이상 지나가기조차 힘든데도 말이다.
‘파리에 있는 건 여기 다 있다’는 걸 느낀 것은, 어느 빵집 윈도 앞에 발길이 멈췄을 때였다. 미니 마카롱은 1유로, 보통 크기의 마카롱은 2.5유로. 브라우니는 아주 진한 초코와 아몬드 두 종류. 타르트는 에그, 살몬, 앤초비가 각각 올려져 있는 것과 한데 어우러져 있는 것들이 각각 10종류씩. 분명 홈메이드로 짐작되는 못난이 쿠키는 각 1유로였다. 유독 이곳 빵집만 이토록 찬란한 것은 아니었다. 몇 발걸음 더 내디뎌 당도한 또 다른 빵집 문 앞에는 친절히도 시식용 바게트가 무려 9개의 바구니에 각각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곳이 그토록 먹을 게 많다는 파리인지, 그보다 한참 떨어진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니스의 구시가지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분명 니스. 조금 더 이곳만의 장기를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알록달록 이국적인 건물과 북적이는 구시가지와 짙푸른 바다만으로 부족했다. 왜? 이곳은 칸이 아닌 니스니까. 그토록 많은 이들이 입을 쩍 벌려 칭송해 마지않던 니스니까. 저녁 7시. 칼같이 닫아버린 상점들을 뒤로한 채 다시 해변가로 발길을 돌렸다. 한낮의 햇살이 저기 지평선 뒤로 지고 있는 니스의 해변가는 그러나 적막했다. 이게 정말 전부일까. 니스는 왜 이토록 반짝이지 않는 걸까. 지난밤의 악몽까지는 아니어도 니스는 분명 여행자에게 특유의 친밀감을 주는 도시는 아닌 게 분명했다. 해가 저무는 바닷가에는 시끌벅적한 관광객은커녕, 롤러블레이드를 즐기는 몇몇 로컬들이 전부였으며, 그들은 그저 해변가를 달리고 있을 뿐이었다. 문이 꽉 닫힌 상점. 인적이 순식간에 사라진 바닷가. 그리고 광장. 다시 숙소로 돌아오던 길에 새삼 눈에 들어온 건, 심지어 여행자의 쓸쓸함을 두 배로 가중시켜주는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었다(그들은 보기 좋게 깔깔거리며 피자와 와인을 즐기고 있었다).
니스가 좋다고 칭찬을 연발했던 이들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정답은 이튿날 칸에 도착해서야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칸에 먼저 들렀다 니스로 옮겨온 이들이라면 니스의 ‘덜 관광지스러운’ 면모에 반했을 것이다. 니스는 광안리 같았다. 관광지로 뻔히 알려진 해운대에서 식상함을 느낀 이들이 대체재로 찾는 곳. 그러니까 니스는 칸의 지양하고 싶은 면모를 덜어낸 서브 관광지였던 것이다. 니스는 분명 칸과 비교해봤을 때 사람이 적고, 덜 인위적이며, 덜 관광지스럽다. 그래서 아마 칸에서 관광지 특유의 시끌벅적한 촌스러움(흔히 관광지는 로컬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무시당한다)에 질린 선배들이 이곳 니스를 추천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녁 7시면 가차 없이 문을 닫아버리는 상점과 번쩍거리는 네온사인이 존재하지 않는 니스의 밤은 분명 처절하게 심심했다. 그곳엔 그 흔한 카지노도, 여행자의 객쩍은 감정을 위로해줄 만한 클럽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니 관광지와 로컬 마을의 어정쩡한 중심에 선 나는 니스의 할 일 없는 밤을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Cannes & Eze 칸 & 에즈
칸과 에즈를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 소개하는 일은 극 대비를 전하기 위함이다. 말 그대로 칸은 이름난 관광지요, 에즈는 소위 지나치기 쉬운 자연 그대로의 바닷가 마을이기 때문이다. 신기한 것은, 이 두 곳이 기차로 30분 이내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바닷가’라는 표현이 어울릴 법한 에즈는 그러나 바다 고유의 푸른색을 감상하기에 최고로 완벽한 곳이다. 니스에서 바라보는 바다도, 칸에서 걸어보는 바다도 에즈의 그것을 따라오진 못한다. 니스나 칸에서 접하게 되는 바다가 멀리 동떨어진 느낌이라면, 에즈의 바다는 손에 바로 닿을 수 있는 ‘내 발 밑의’ 바다다. 역에서 내려 조금만 내려가면 바로 바다, 그것도 정말 투명하고 완벽하게 파란 바다가 헛꿈처럼 펼쳐진다. 정류장이 있을 뿐,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이곳엔 당연지사 인적이 드물다. 기껏해야 가까운 곳에서 잠시 소풍 나온 것으로 보이는 단란한 가족뿐. 이곳엔 바다와 나만 있다. 온몸을 적셔도 티끌 하나 묻어나올 것 같지 않은 완벽히 맑은 바다는 참으로 생경했다. 그저 바다색이 너무 예뻐서 내렸을 뿐인데, 창밖의 바다보다 백 배쯤은 더 아름다웠다. 적어도 관광지의 바다와 극 대비를 이루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길 가다 주운 5백원짜리 동전처럼 에즈의 바다는 사소하지만 반가웠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내린 건 순전히 행운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오롯한 에즈에서 불과 30분만 가면 회전목마가 반짝이는 칸에 도착할 수 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칸은 정말 관광지의 전형이었다. 그런데 그 들썩임이 그리 싫지 않았던 것은, 내가 아마도 상대적으로 침잠해 있는 도시, 니스와 에즈를 거쳤기 때문이리라. 어찌됐든 칸의 발랄함은 가끔은 먹어줘야 힘이 나는 스테이크처럼 반갑고도 즐거웠다. 도로 양옆으로 쭉 뻗은 야자수는 제주도처럼 훌륭했고, 대극장 계단에 융단처럼 깔려 있는 레드 카펫은 마치 시상식 5분 전처럼 흥분됐다. 관광객들은 마치 안젤리나 졸리와 브래드 피트라도 되는 양 그 레드 카펫 위에 서서 포즈도 취해보고 플래시 세례를 만끽하며 사진을 찍는다. 그러한 모습이 어찌나 관광지스러운지 그들을 바라보며 한참을 웃었다. 마치 한 편의 코미디 쇼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달까.
로버트 알트만과 대니 보일의 손도장이 새겨져 있는 극장 앞 광장에 앉아 있자니, 아주 자연스러운 습관처럼 부산영화제가 떠올랐다. (해안가에서 펼쳐지는 영화제라는 점에서 어쩐지 느낌이 닮아 있다.)
다른 건 느껴지지 않았다. 니스가 광안리라면, 칸은 해운대였으니까. 칸은 니스처럼 덜 꾸며진 관광지의 어쭙잖은 느낌이 나지 않았다.
아예 완벽하게 관광지의 풍모를 지니고 있다고나 할까.
대극장으로부터 오른쪽으로 해변을 끼고 걷는 크루아제트 거리엔 즐기기로 마음먹은 관광객들이 북적였다. 해가 질 무렵 니스의 해변가에서 가장 인상적인 기억이 홀로 롤러블레이드를 타는 젊은이였다면, 이곳 칸의 해질녘 풍경은 그에 비해 상당히 다채로웠다. 마치 알랭 들롱처럼 생긴 늘씬한 노신사가 네이비 컬러의 카디건을 어깨에 두르고 걷는다거나, 빨간색 머리를 풍선처럼 부풀리고 빨간 립스틱을 꼼꼼히 챙겨 바른 마나님이 노년의 여유를 만끽한다거나 했다.
허리가 무척이나 잘록한, 99% 완벽한 몸매를 갖춘 미녀는 금발을 찰랑이며 산책로를 걸었다. 손에 들린 건 아주 커다란 로고가 박힌 명품 백. 또래 친구들 역시 비슷한 모습의 미녀들이었다. 선글라스를 머리 위에 얹고 뽐내듯 워킹하는 그녀들의 모습이 재미있어서 한참을 바라봤다. 해변가를 걷는 모습치고는 그들의 복장과 자태가 꽤 우스꽝스러웠지만, 칸이 니스보다 재미있다고 느낀 것은 이 거리에서 바라본 이들 관광객들의 화려하고도 들썩이는 패션 덕분이었을 것이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 어둑한 밤이 되도록 사람이 그리웠던 나는 그곳에 서서 그들을 바라봤다. 가끔은 관광지도 특유의 철없는 재미가 있다는 것을, 니스와 에즈를 거쳐 칸에 당도한 뒤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니스, 에즈, 칸. 만약 이 세 곳을 둘러볼 계획이라면, 부디 나와는 반대의 순서로 방문하시길. 여행자의 서러운 감정은 묵혀둘수록 제격인 장맛이 아니니, 붕붕 신나게 들썩이는 이곳부터 방문하시길.
Arles 아를
아주 커다란 우연이 겹치지 않는 한, 다시 오지 않게 되리라 확신하게 되는 도시가 있다. 여행 사상 최악의 경험을 했던 도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딜 가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대도시가 아닌 곳. 게다가 갖은 고생을 감수해가며 안쪽 구석까지 찾아가야 만날 수 있는 곳은 한 번이면 족하다는 얘기다. 아를이 기대 이하였다는 말은 아니다. 어쩌면 이곳은 내게 여행 중 유일무이한 감정을 선사해준 곳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적어도 내 인생에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아를을 다시 찾을 일은 없을 것이다. 독특하면서도 남다른 매력은 오래 두고 자주 찾겠다는 의지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아를은 인기 관광지의 당연한 조건(끝내주는 경치, 더 끝내주는 레스토랑)을 갖춘 곳은 아니었다. 나는 그저 스페인 국경에 가까운 프로방스 지역 특유의 분위기를 느껴봤다는 것. 그것만으로 아를을 기억할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가 살았던 곳으로 유명한 이곳은, 그래서인지 전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을 시골 마을임에도 적잖은 관광객들로 붐빈다. 워낙에 마을 자체가 작아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옛것에 중독이라도 된 듯 커다란 매력을 느끼는 유럽인들에게 아를은 꽤나 의미 있는 관광지인 것이다. 론 강을 끼고 있는 이곳에, 기원전 1세기 로마시대의 유적이 가득하니 살이 축축 늘어지고 발목이 두꺼운 유럽의 중년들은 꼭 한번 와보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들은 수고스럽게도 이곳 아를에 당도해 고대 극장, 원형 투기장, 라마르틴 광장, 생 트로핌 성당 등을 두루 살펴보며 탄성을 연발한다.
반 고흐의 ‘밤의 카페’에 등장하는 카페가 이곳 아를의 절정이다. ‘반 고흐 카페’라 불리는 그림 속의 카페 ‘LE CAFE LA NUIT’는 여전히 동일한 모습으로 성업 중이며(무려 ‘반 고흐 카페’라는 이유로 맥주 한 잔에 2유로씩은 비싸다) 주변의 노천 카페들과 자그마한 광장 역시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관광객을 맞는다.
카페에서 맥주 한 잔을 걸친 뒤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그다지 황홀하지도 실망스럽지도 않다. 다만 아주 선명히 기억되는 감정이 있다면, 이곳만 해도 벌써 국경이 뒤바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를의 뒷골목을 걷는 동안 인종이 뒤섞여 있다는 것을 금세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래서 아를은 생경했다. 분명 세계 문화유산 목록에 올라와 있다는 생 트로핌 성당도 의미가 있었지만, 그곳을 벗어난 길목엔 프랑스와 스페인의 모습이 딱 반절씩 섞여 있다는 게 낯선 발견처럼 느껴졌다. 어둑해진 길을 걷다가 발견한 케밥집은 그래서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 히스패닉 계열의 사람들로 가득한 식당은 아무래도 아직은 어색했다. 시골 마을 특유의, 멋 부리지 않은 제과점에서 파는 투박하고 못생긴 쿠키도, 이제껏 내가 봐왔던 알록달록한 마카롱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에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잘게 썬 양고기에 치즈 가루가 잔뜩 뿌려진 샐러드를 먹었지만, 이 음식이 프랑스 남부의 그것인지 스페인의 향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내가 앉아 있는 이곳은 분명 아를이지만, 내 옆에는 강한 스패니시를 구사하는 히스패닉 계열 사람들이 앉아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를은 반은 프랑스 같았고, 나머지 절반은 스페인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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