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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종은 그런 남자 아니다

솔직히 말해보자. `최수종` 하면 떠오르는 인상이 무언가? 반듯하다, 젠틀하다, 부드럽다…. 20년이 넘도록 똑같은 이미지에만 안주하는 것 같아 선뜻 마음이 가지 않는다고? 섣불리 판단하지 마시라. 최수종도 이미 그 정도는 알고 있다.<br><Br>[2008년 6월호]

UpdatedOn May 23, 2008

Photography 오중석 Editor 박지호 Hair 채이 Make-up 장희경(Nine Apple) Styling 이현하

뭐,이왕 말 나온 김에 한마디 하자면 데뷔 이래 20년이 넘도록 최정상의 자리에서 단 한 번도 내려온 적이 없는 그의 경력이 ‘징글징글’해 보였다. 얼마나 철저하게 이미지를 관리했으면 맹수들이 득실대는 정글과도 같은 연예계에서 단 한 번 미끄러진 적도 없었을까 싶었던 거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게 그런 것 아닌가? 가끔 실수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나기도 하는 게 인생의 또 다른 맛 아닌가 말이다.
이런 식으로 꼬투리를 잡자면 한도 끝도 없다는 거, 안다. 마치 ‘지진아’가 공부 잘하는 모범생을 뒤에서 씹어대는 꼴인 것 같아 찜찜한 기분도 지울 수 없다. 맞다. 문제의 원인은 그것이다. 동시대에 살고 있는 멋진 남자 중 한 사람이라는 것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왠지 모르게 감정이입은 잘 되지 않는다는 것. <왕건>부터 따지자면 10년째 ‘사극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섬세하고 부드러운 로맨틱 가이라는, 데뷔 이래 일관된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 묘한 불일치. 그래, 이럴 때는 그냥 솔직하게 대놓고 물어보는 거다.

당신이 ‘연기 경력 21년째를 맞은, 드라마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배우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은 대다수 사람들이 인정하는 바다. 사생활도 깨끗하고, 집안에 충실한 최고의 가장이라는 것도. 그런데 왠지 모르게 감정이입이 잘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남자들이 많은 이유는 뭘까?
하하. 글쎄? 잘 모르겠다. 솔직히 남들이 뭐라 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연예인이라는 게 원래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기 좋은 직업 아닌가. 아내에게 너무 잘해줘도, 아니면 조금만 썰렁한 모습을 보여도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이혼이 임박한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나를 둘러싼 루머에 일일이 신경 썼다가는 애초에 고혈압으로 쓰러졌을 거다.

루머? 당신을 둘러싼 이런저런 루머에 대해 들은 바가 있는가?
그럼. 나도 엄연히 귀가 있고, 눈도 있는데.(웃음) 와이프를 두들겨 패고 난 다음 미안해서 그렇게 자주 이벤트를 열어주는 거라며? 심지어 다른 여자들을 수시로 집에 데리고 들어와도 와이프가 다 받아준다는 소문도 있더라. 뭐, 하도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 이젠 별 감흥도 없다.
참, 그러고 보니 정말 바로잡고 싶은 억울한 루머가 하나 있긴 하다. 수술한 쌍꺼풀이 풀리지 않도록 매일 밤 집게로 콕 ‘찝은’ 채 잠자리에 든다는 소문 말이다. <왕건> 때부터 짙은 쌍꺼풀 때문에 끊임없이 구설수에 올랐었다. ‘쌍꺼풀 짙은 동안(童顔)은 사극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난은 물론, 쌍꺼풀을 더 짙게 만들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수술을 받는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심지어 최근작인 <대조영>에 캐스팅되었을 때에도 ‘쌍꺼풀’ 운운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더라. (느닷없이 한쪽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며) 아예 이번 기회에 <아레나>에서 사진을 찍어 게재해주면 안 되겠나? 이게 어딜 봐서 수술한 눈인가.(웃음)

그냥 솔직히 툭 터놓고 이야기해도 될까? 20년 넘도록 너무 반듯하고 착한 이미지만 유지해온 탓에 마음이 잘 가지 않는다는 남자들이 많다. 어릴 때부터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자랐을 것 같은 귀공자 타입이라는 점도 그렇고. 하루아침에 청춘 스타의 위치에 올라 평탄하게 현재 위치에까지 이르렀다며 은근히 질시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내가 지금껏 평탄하게 살아왔다고?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그리고 나는 그다지 착하지도 않다. 어렸을 때, 집안이 무척 풍족했던 건 맞다. 한 번도 걸어서 등교해본 적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대학에 막 입학할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말았다. 솔직히 장례식을 치르는 내내 아버지를 처절하게 원망했다. 빚만 잔뜩 남기고 가신 탓에 그야말로 집안이 풍비박산 났기 때문이다. 끼니 때마다 라면 하나 끓여 먹기 힘들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도 한때는 구원의 빛이 비치는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적도 있다. 교회 장로님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도 남의 자식을 공부시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학업을 끝까지 마치지 못하고 중간에 떠밀리듯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친척 어른이나 선배들이 가끔 돈 만원이라도 쥐어주면 동생과 함께 포장마차에 가서 소주잔을 기울이기에 바빴다. 그때 어머니는 머무를 집 한 칸 없어 친구 집을 전전하고 계셨는데도 말이다.

아, 그런 과거사가 있는 줄은 몰랐다. 그동안 다른 인터뷰에서는 통 들어본 적이 없는 내용인데?
굳이 옛일까지 일일이 들춰내 말하고 싶진 않았다. 그때는 정말 막 나갔었다. 동생과 술에 잔뜩 취해서는 과천 산동네에서 뛰쳐나와 예전에 살던 반포 근처를 밤새 헤맨 적도 많다. 잘 곳이 없으니까 고속버스터미널 벤치에 누워 그냥 잠들기도 했고. 어느 날, 옆에서 자던 한 노숙자가 “학생, 이거 덮으면 꽤 따뜻해”라며 신문지를 한 장 건네주더라. 그때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노숙자는 자신보다 내가 더 불쌍해 보여서 그런 행동을 했을 것 아닌가. 그때 결심했다. 앞으로 남에게 사소한 도움이라도 절대 받지 않겠다고. 꼭 크게 성공을 거둬서 나보다 못한 사람을 돕는 우월한 위치에 서겠다고.
그래, 정말 간절하게 성공하고 싶었다. 돈도 정말 많이 벌고 싶었고. 내가 지금껏 왜 이렇게 가정에 충실해왔는지 아는가?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이 아직까지 마음속 깊이 사무쳐 있기 때문이다. 난, 그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결코 나 자신과 가족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드라마 <사랑이 꽃피는 나무>로 하루아침에 청춘 스타로 등극한 뒤로는 무난하고 평탄한 길만 걸어온 건 사실 아닌가? 선한 이미지에 집착한다는 세인들의 편견도 이 때문에 생긴 것 같다.
<사랑이 꽃피는 나무>에 출연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연기자가 되리라는 꿈을 꿔본 적 없다. 당장 생계를 잇기도 곤란할 지경이어서 극장 매점, 공사판 등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그 와중에 미국에서 잠깐 공부했던 혜택을 봤다. 고등학교 3학년인 여학생의 과외를 하게 된 것이다. 당시 어머니가 하반신을 제대로 못 쓸 정도로 몸이 안 좋으셨기 때문에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의 아버지가 KBS 예능국장이었던 거다. 탤런트를 한 번 해보라는 제안을 듣자마자 내뱉은 첫마디가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그럼, 돈을 많이 벌 수 있나요?”였다. 내가 모험을 피해왔다고? <사랑이 꽃피는 나무>가 성공했다고 해서 단박에 돈더미 위에 앉게 된 건 아니었다. 여전히 나는 매니저도 없는 연기 초년생에 불과했다. 2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연기’라는 걸 접해본 적도 없었던 내가 하루아침에 연기를 생업으로 삼게 되었다. 그야말로 내겐 하루하루 버텨나가야 하는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던 것이다. 무엇을 가리고 말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아, 솔직히 한 작품만은 정말 피하고 싶었다. 아마, 기자들도 잘 모를 거다. 내 영화 데뷔작이 무언지 아는가? <날으는 일지매>다. 초등학생을 위한 여름방학용 영화. 처음에 제안이 들어왔을 때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었다. 그런데 집안에 문제가 생겼다. 지하 단칸방에서 간신히 쌀독을 채우고 살 정도로 빠듯한 살림살이였다. 그런데 동생에게 문제가 생겨 급하게 5백만원이라는 거금이 필요해진 거다. 감독이 새하얀 천 보자기에 만원권을 하나 가득 담아와서는 내 앞에 펼쳐놓은 그 순간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어머니는 뭐라고 말도 못하시고 조용히 자리를 피하셨다. 뭐, 별다른 선택지가 있었겠는가?

그런 일들이 있었구나. 그래도 최정상에 올라선 다음에도 안전한 선택만 해온 것은 사실 아닌가? 그 흔한 악역 한 번 맡아본 적 없다.
그 대목이 정말 답답하다. 한 번 구축된 이미지라는 게 정말 쉽게 바뀌는 게 아니더라. 물론 배우라면 일상생활에서 자기 절제에 철저해야 한다. ‘바른생활맨’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순재, 안성기 등 대선배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하루 최소 시간만 자고, 담배를 피우지 않으며, 커피도 멀리 한다. 그래야 연기자로서 롱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생활과 연기는 다르다. 나라고 왜 다양한 역할에 욕심이 없었겠나. 그런데 프로듀서나 제작자들은 항상 ‘안전빵’ 작품만 내게 들고 오더라. 기존 내 이미지를 활용하면 최소한의 시청률이 보장된다는 계산 탓이었다. 가정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던 내게 그것을 거부할 권리는 없었다. 더군다나 내가 활발히 활동했던 당시, 배우는 철저히 선택받는 입장이었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 을의 위치였다는 뜻이다.

봉사 활동만 해도 그렇다. 사견을 전제로 말하자면 무릇 셀러브리티라면 의무적으로라도 입양, 환경운동, 봉사 활동 등에 참여하는 게 맞다고 본다.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뻔하디뻔한 이미지 관리 차원 아니겠느냐는 거지.
뭐, 솔직히 기부를 할 때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웃음) 젊었을 때 일화에서 출시된 음료, 맥콜 광고에 출연한 적이 있다. 조용필 선배 등 당대 최고 스타들이 최고의 개런티를 받고 출연했던 광고였다. 당연히 영광이었지. 그런데 CF가 나가고 난 뒤 기독교 계통 신문에 한 목사가 쓴 기고문이 대문짝만 하게 실렸다. ‘우리 아들이 최수종을 싫어하는 이유’라는 제목이었다. 교인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통일교’가 만든 제품 광고에 나올 수 있느냐는 거였다. 고심 끝에 어머니에게 상의를 했다. 어머니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시더라. 좋은 일에 쓰라는 계시와 같은 거라고. 그래서 개런티 전액을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기부했다. 그랬더니 일주일 만에 같은 신문에 ‘우리 아들이 최수종을 다시 사랑하게 된 이유’라는 칼럼이 등장하는 것 아닌가. 솔직히 젊은 혈기에 울컥하는 마음을 참기 힘들더라. 그런데 살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봉사 활동에 합류하게 되는 계기가 찾아온다. 내 아내가 세 번이나 유산했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세 번째 아이를 잃었을 때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머리가 반쯤 돌아버린 것 같았다. 너무 화가 나서 애꿎은 병원 문을 발로 부수기까지 했다. 아무튼 병원을 다 뒤집어놓고 나왔다. 그러다가 드디어 첫아이가 태어났다. 여기저기서 몰려온 기자들과 인터뷰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바로 옆방에 있던 산모가 아이를 사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 솔직히 기쁘기보다는 서글픈 마음이 앞섰다. 우리 부부 또한 얼마 전까지 똑같이 비참한 신세였으니. 그때 그 병원에 익명으로 기부를 했다. 이후 아이들을 위한 봉사 활동만은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더라.

아, 너무 몰아치듯 질문을 퍼부었다면 미안하다.
궁금한 점이 너무나도 많아서.(웃음) 예전에 연예인으로 살아가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정말 쉽지 않다. 아마 어렸을 때 집안에 문제만 생기지 않았어도 절대 이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 거다.(웃음) 누군가에게서 조지 클루니에 얽힌 에피소드를 들은 적이 있다. 한 행사장에 조지 클루니가 나타났는데 2시간 동안 그 특유의 미소를 한 번도 풀지 않은 채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똑같은 말투로 인사를 하더라는 거지. 보다 못한 한 지인이 “그냥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이야기하면 안 돼?”라고 물었더란다.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하더라는 거지. “내가 웃음을 거두면 자기한테 화난 줄 알아.”
나 또한 비슷한 경험이 많다. 45분 내내 축구화를 신고 뛰다가 너무 지쳐서 잠깐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쉬고 있었다. 지나가던 50대 아저씨가 내 어깨를 툭툭 치더니 이렇게 말하는 거다. “최수종 씨, 집에 무슨 일 있어요? 좀 웃어요!”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심지어 지쳤을 때도 사람들은 자신만의 고정관념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게 가장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년 동안 맹수들이 득실대는 정글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글쎄, 천직이어서?(웃음) 농담이다. 솔직히 아직도 연기를 잘 모르겠다. 지금도 사극에 출연할 때마다 국어사전을 들고 다니며 장단음을 익히곤 한다. 잘 모르는 대목은 선배에게 사전을 들이밀며 물어보기도 하고. 난, 아직 살아남은 게 아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살아남아야 한다.

평소 인터뷰와는 달리 질문도, 대답도 상당히 거칠었다.(웃음) 와일드하게 마음속 이야기들을 내지르고 나니 속이 좀 시원한가?
시원하다. 그리고 기사 말미에 꼭 좀 써달라. 나, 그렇게 순둥이 같은 착한 남자 아니라고. 그리고 4천만 국민 모두를 오싹한 공포로 몰아넣을 ‘쎈’ 악역, 꼭 한 번 맡아보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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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WORD

CREDIT INFO

Photography 오중석
Editor 박지호
Hair 채이
Make-up 장희경
Styling 이현하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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