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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러 가기`와 영화 보기

그 옛날 버스를 타고, 종로에서 내려, 친구와 만나 오징어 땅콩을 사고, 단성사나 피카디리로 영화를 보러 가던 일련의 행위가 떠오르는가? 멀티플렉스의 증가는 영화를 보러 가는 문화 행위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영화를 `보러 가는` 행위 자체가 너무나도 좋았다는 한 필자의 멀티플렉스 극장 문화 유감. <br><Br>[2008년 6월호]

UpdatedOn May 23, 2008

Words 이주영(영화 칼럼니스트&클럽컬처 매거진 <블링> 편집장) Editor 이지영
Photography 김지태 assistant 이승준

아! 옛날이여!
‘종로에서 영화 보기와 강남에서 영화 보기’란 주제의 원고를 청탁받자마자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건 과거를 문득 추억하게 만드는 훌륭한 기제이며, 또한 ‘영화 보기’라는 행위 자체를 사유할 수 있게 만드는 좋은 기회가 아닐까 싶었다. 현재 우리는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멀티플렉스’라고 불리는 고래의 거대한 입 앞에서 티켓을 구입하고, 그 뱃속에 가득 채워진 비밀의 방으로 입장하지 않던가. 또한 우리는 한 건물에 수 개의 극장이 모두 존재하는 거대한 박스오피스 앞에서 수많은 상영작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고민을 떠안고 있다. 이런 상황을 돌이켜보건대 과거의 영화 보기와 현재의 영화 보기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리고 당신의 학창 시절과 현재의 정황을 비교해보더라도 극장 문화가 확연히 달라졌음을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울산이라는 소도시에서 자라났다. 어린 시절부터 분명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다 확신하는 영화광이었다. 아버지는 종종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 종로에서 영화를 보고 버스비가 없어 흑석동까지 걸어갔던 기억을 나에게 들려주시곤 했으니 말이다. 각설하고 어린 시절 필자의 영화 관람 기억은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과 많이 다르다. 당시 소도시에서는 입장권 개념은 있었으나, 번호가 매겨진 좌석의 구별은 없었다. 내 생애 (용돈을 모아 직접 표를 산) 최초의 영화는 <델타포스>라 기억된다. 당시 최고 주가를 올렸던 액션 히어로 척 노리스가 주연을 맡은 화끈한 영화였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고등학생 입장가’의 이 영화를 보러 극장에 입장하는 순간 시쳇말로 ‘뺀치 먹을까’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모른다.
지방 극장에서 영화 보기는 고등학교 시절까지 계속됐다. 좌석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은 탓에 마음에 드는 영화는 하루에 몇 번씩 보고 나오기도 했다. 혹은 상영 도중에 입장해, 다음 회 상영 중간까지 보고 나온 기억도 있다. 일명 ‘영화 잘라 보기’다.
서울 출신 지인들에게 물어보니 어린 시절 극장에서 겪은 아련한 추억을 갖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이돌 스타의 영화를 보기 위해, 혹은 개봉일 첫 회 관객에게 주어지는 ‘대박’ 기념품을 받기 위해 대한극장을 에둘러 감싸고, 단성사 앞에서 새벽부터 진을 치고, 국도극장을 가득 메웠던 기억들. 1998년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한 멀티플렉스 시대의 도래와 함께 이러한 행위들은 이제 아스라한 추억의 편린으로만 남아 있다.

영화 보기 행위의 전환
1998년 4월 4일, 아마도 한국 영화산업은 이날을 영원토록 기억할 것이다. 대기업 자본에 의해 운용되는 ‘멀티플렉스’란 거대한 극장산업이 역사적 분기점을 맞은 날이니까. 모두들 기억하는 대로 무려 11개의 스크린을 갖춘 ‘CGV 강변’이 오픈했다. 이때부터 CJ, 동양, 롯데 등 영화산업에 돈 좀 대던 많은 기업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멀티플렉스 건립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던, 과거의 향수를 간직한 개인 소유의 단관 극장들은 거대한 물량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사업을 접거나, 대기업에게 자신의 운명을 위탁하는 형태로 바뀌어 나갔다. 영화 보기의 상징적 공간으로 자리매김해온 종로의 단성사. 최근 이 극장은 복합상영관 형태로 리뉴얼 오픈한 것도 모자라 시너스 G 극장 체인으로 영입되는 운명을 밟았다. 이야말로 시대적 변화의 상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가속화된 멀티플렉스의 극장산업 점령은 영화 관람 문화까지 바꾸어 나갔다.
멀티플렉스 시대의 도래가 관객에게 미친 가장 뚜렷한 영향은 다름 아닌 ‘영화 보기 행위’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멀티플렉스 시대 이전에는 강북, 정확히는 종로에 가야만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야릇한 희열이 존재했다. 제아무리 청담동의 거대한 저택에 사는 사람이라 해도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차를 끌고, 지하철을 타고, 버스에 올라 ‘종로’라 명명된 지역의 극장가에 발을 디뎌야만 했다. 그러므로 영화 보기는 뚜렷한 목적을 가진 행위였음에 틀림없다. 예를 들어 맛있는 식사를 하고, 커피 한 잔 한 후 ‘영화나 볼까’가 아닌, ‘우리 몇 월 며칠에 영화 한 편 보자’라는 말로 약속을 잡아야만 했으니까. 영화 관람이 수많은 취향들을 압도하는 문화적 우위성을 담보했던 시기였다.
멀티플렉스가 극장 문화의 주류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언제부터인가 미디어들은 극장 수가 아닌 스크린 수로 산업 지표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극장 환경의 급진적 변화는 2005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포화 상태라는 용어를 쓸 수 있을 만큼 양적 성장을 거듭해왔기 때문이다. 1998년부터 2005년까지 약 7년 동안 전국 스크린 수는 약 2천 개를 상회하는 수준까지 급증했다. 이 말은 전국 방방곡곡 어디에나 멀티플렉스가 들어서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과거의 극장들이 앞서 언급했던 구시가지의 중심가에 자리했던 것과 달리, 멀티플렉스는 ‘내 집에 인접한’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마치 투기할 땅을 찾는 업자들과 같이 대형 마트, 전자상가 등이 들어서는 곳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멀티플렉스의 수적 증가는 영화 한 편 보러 ‘그곳’에 가야 하는 관람 행위 자체에 커다란 전환을 가져왔다.

내 이웃의 멀티플렉스
물론 단관 극장에서 멀티플렉스의 시대로 변화했다 해서 영화 관람의 가장 큰 목적이 희석된 건 아니다. 한국의 대중문화 시스템에서는 그 어디에도 극장 입장료 정도의 비용으로 두 시간가량을 소위 ‘때울 수’ 있는 아이템이 없다. 가격 대비 아웃풋을 가장 크게 얻을 수 있는 문화 아이템이 바로 영화라는 것이다. 여기에 청춘 남녀의 ‘데이트’를 위한 유효한 수단이라는 영화에 대한 인식에도 큰 변화는 없다. 단지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강북으로 가야 한다는 고정관념. 그것의 상실이 바로 멀티플렉스 시대의 도래가 생성해낸 결과다. 옛날 극장에서 느낄 수 있었던, 옛날 극장이 만들어냈던 공간 혹은 장소의 매력이 총체적인 소비 형태로 전환됐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단관 극장 문화와 멀티플렉스 문화의 가장 큰 차이다.
과거의 관객들에게는 ‘영화를 보러 간다’는 목적성이 있었다. 하지만 멀티플렉스는 쇼핑, 식사 등의 기타 행위와 영화 관람이 동일 범주에 놓여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영화를 ‘보러 갈’ 필요가 없어졌다. 그저 영화를 ‘보기’만 하면 될 뿐이다. 연인, 가족, 친구와 함께 쇼핑을 하고, 귀가하기 전 코스를 하나 더 추가하는 의미로 영화를 보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또한 자동차가 상용화됨에 따라 발생한 주차라는 고질적인 문제도 멀티플렉스의 복합 문화 향유를 부추기는 근본 원인이다. 서울의 그 어느 주차장도 이젠 ‘공짜’라는 개념이 거의 없다. 쇼핑하고, 영화 보고, 밥을 먹기 위해 세 곳을 다닌다면 그 주차 비용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차라리 한 곳에서 세 가지 행위를 모두 수행하는 것이 훨씬 저렴하다.
필자가 영화 주간지 기자 시절 인터뷰했던 시너스 G 극장 체인의 여환주 대표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그는 “이제 극장은 슬리퍼를 끌고 집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에 위치해야만 한다”고 말했었다. 대형 멀티플렉스 시대의 도래는 이제 그것을 현실화시키고 있다. 예전에는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극장에 들어서는 관객을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강남의 극장에 입장하는 관객들 가운데선 동네 마실 나온 차림새의 젊은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관객들의 옷 매무새의 차이, 즉 극장 관객들의 스타일 변화도 멀티플렉스가 가져온 크나큰 문화 변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제 관객이 극장을 찾아 이동하기보다는 극장 자체가 관객과 인접한 곳으로 옮겨왔다는 것. 2천 개 이상의 스크린 수로 대변되는 멀티플렉스 시대 극장 문화는 이렇게 발걸음의 이동을 단축시키는 형태로 바뀌어가고 있다.

강북은 여전히 영화의 메카다
멀티플렉스가 대세가 된 이후 극장들은 모두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현재 한국의 극장가는 CGV가 30%, 롯데시네마가 20%, 시너스 G, 프리머스시네마, MMC의 체인이 각각 10%를 점유하고 있다. 이외에 나머지는 서울극장, 대한극장 등 전국에 분포한 개인 소유 극장 20여 곳이 각각 1%씩 차지하고 있다. 영화 배급업에 종사하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그들은 적자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모든 멀티플렉스는 만성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한다. 멀티플렉스는 엄청난 건물 임대료를 떠안고 운영해야만 하는 단점이 있다(자신들이 소유한 건물에서 운영되는 롯데시네마는 제외한다). 관객 입장료 수익으로 이윤을 창출하는 건 턱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멀티플렉스들은 관객에게 외부 음식물 반입을 금지한다. 극장 내에서 판매하는 팝콘, 버터구이 오징어, 음료수만을 구입하도록 강제한다. 이 수익이 입장료보다 훨씬 더 거대하기 때문이다. 극장에서의 먹거리도 과거와 현재의 영화 관람 문화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아직도 종로의 서울극장 앞에는 먹거리를 판매하는 수많은 가판대들이 있지만 멀티플렉스가 일반화된 지금, 우리는 그들의 정겨운 분위기를 더 이상 찾기 어려워졌다. 모두 획일화된 팝콘 상자를 들고, 플라스틱 컵을 들고 극장에 들어선다. 물론 과거의 극장에서 풍겼던 오징어 냄새가 꼭 좋았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이 멀티플렉스 시대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이 멀티플렉스 시대는 관객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꽤나 편리한 점도 많다. 하지만 멀티플렉스가 동네 곳곳에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강북이 가졌던 고유한 문화 특권 하나가 소실되어버린 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북은 여전히 영화 마니아들을 위한 메카다. 상업영화가 멀티플렉스들을 통해 유통된다면, 예술영화라 불리는, 할리우드를 제외한 제3세계 영화들은 유일하게 강북의 조그마한 단관 극장들에서만 상영되기 때문이다. 낙원동에 위치한 서울아트시네마가 그렇고, 광화문에 위치한 미로스페이스와 시네큐브가 그렇고, 곧 이화여대 후문에 새롭게 오픈할 필름포럼이 그렇다. 종로에서 파고다공원을 거쳐 낙원동 악기상가 건물까지 걸어가는 길에서 필자는 꽤나 훈훈한 정취를 느낀다. 그곳에는 아직까지 획일화되지 않은 인간의 훈훈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멀티플렉스 세력권이 아무리 커지더라도 강북만의 이러한 작은 극장 문화는 앞으로도 그 가치를 더욱 빛낼 것이다. 아니 꼭 그랬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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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s 이주영(영화 칼럼니스트&클럽컬처 매거진 <블링> 편집장)
Editor 이지영
Photography 김지태
assistant 이승준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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