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 페라리의 미스터 아메리카, 루이지 키네
페라리의 미국 정착 이야기는 루이지 키네티가 써내려갔다. 엔초 페라리와 알파 로메오 레이싱팀에서 르망을 세 번이나 석권한 오랜 친구인 키네티는 전쟁에 휩싸인 유럽을 벗어나 인디 500에 출전하는 한 팀에 들어가기 위해 미국 비자를 얻어냈다. 성공한 자동차 딜러로 유럽에 돌아왔을 때 키네티는 페라리가 미국에서 시장성이 높다고 확신했다. 1954년 키네티의 맨해튼 대리점은 페라리 최초의 해외 수입점이 되었고, 키네티는 1978년 페라리 노스 아메리카가 출범하기까지 미국의 페라리맨으로 활동했다. 1994년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56 410 슈퍼아메리카
‘아메리카’ 시리즈의 네 번째 차이지만 최초로 ‘슈퍼’란 타이틀을 단 페라리다. 페라리는 이 GT카를 위해 차대와 V12 엔진을 제공했고, 스튜디오 기아는 410에 캐디 스타일 테일 핀 같은 당시 유행하던 아메리칸 스타일을 덧붙였다.
1958 캘리포니아
페라리의 LA 중개상 존 폰 뉴먼은 250 GT의 지붕을 연 버전을 제안했고, 키네티는 이 아이디어를 엔초 페라리에 팔았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250 캘리포니아다. 뉴먼의 지역 이름을 따라 지은 것이지만, 캘리포니아 해변에 완벽하게 어울릴뿐더러 캘리포니아 주의 잠재 고객들을 겨냥한 작명 센스였다.
1958 레츠 레이스!
루이지 키네티는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북미 레이싱팀(NART)을 꾸렸다. 이 팀은 선명한 파란색과 흰색을 상징 색으로 칠한 페라리를 몰고 세계 레이싱 대회에 출전했다.
1963 페라리가 미국 기업이 될 뻔했다
포드가 거금을 들여 페라리를 인수하려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계약 조건을 읽어보던 엔초가 레이싱 분야에 대한 전권을 위임한다는 조항을 보고 계약을 무산시켰기 때문이다. 도로용 자동차는 포드-페라리로, 레이싱에 집중하는 차는 페라리-포드로 양분하여 불릴 뻔했다. 모욕을 느낀 포드는 GT40로 페라리를 꺾고 르망을 석권할 계획을 짰고, 1969년 페라리의 주요 부문이 피아트에 매각되었다.
1965 NART, 르망을 석권하다
NART에 입성한 페라리 250LM이 르망을 석권했다. 요헨 린트와 매스텐 그레고리가 페라리를 몰았다. 이전까지 페라리가 르망을 석권한 적은 없었다.
1967 데이토나!
페라리가 데이토나 24시간 레이스에서 1, 2, 3위를 휩쓸었다. 365 GTB/4를 비공식적으로 데이토나라 부르는 이유다.
1967 257 GTB/4 NART 스파이더
키네티가 컨버터블 275 GTB 제작을 주문했다. 이 차는 영화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를 통해 스타가 되었다. 10대 한정판으로 생산되었고, 최근에 열린 한 경매에서 30억원에 팔렸다.
1970 세브링!
마리오 안드레티가 컴백 무대인 세브링 12시간 레이스에서 페라리 512S를 타고 우승했다. 그의 맞수인 스티브 맥퀸이 포르쉐를 타고 선두를 다투었는데, 마지막 랩타임을 마리오 안드레티가 리드했다.
1978 페라리 노스 아메리카(FNA)
피아트의 소유 아래 만들어진 FNA가 키네티와 키네티가 확장해놓은 사업 분야를 인수했다.
2005 슈퍼아메리카
‘아메리카’라는 이름이 컨버터블 575M 슈퍼아메리카 모델로 돌아왔다. 5백59대 모두 출시되기 전에 다 팔렸다.
2014 아메리카 F1 보스
FNA 보스 마르코 마티아치가 페라리의 F1팀으로 들어간 관계로, 에드윈 페넥이 마티아치의 미국 내 39개 영업장과 캐나다의 두 영업장을 주도한다.
2014 F60 아메리카
페라리의 미국 진출 60주년을 기념하여 F12 베를리네타에 기반을 둔 한정 모델로, 오로지 미국에서만 판매되는 F60 아메리카를 선보였다. 275 NART 스파이더의 현대판으로 당시 키네티의 레이싱카에 썼던 것과 같은 색상으로 마감하였다. F12 베를리네타의 성능과 유전적으로 동일하게 설계하였는데, V12 엔진이 장착되었고,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단 3.1초에 돌파한다. 페라리의 리미티드 에디션답게 10대 완판되었다.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