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OPERATION 메르세데스 벤츠 코리아 Editor 김영진
세팡에 갔다. 마이클 슈마허와 알론소를 알고, ‘이니셜 D’와 ‘사이버 포뮬러’ 광팬이라면 말레이시아 세팡에 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이다. 단지 서킷을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차를 몰고 슈마허가 달린 코스를 내달렸다면, 이쯤 되면 피가 들끓지 않을까? 물론 내가 F1 레이서처럼 포뮬러 카에 올라 시속 300km로 질주한 것은 아니다. 이제 겨우 운전하는 맛을 알게 된 내가 세팡을 우습게 여겼다면 난 가드레일 귀신이 됐을 것이다. 오버스티어가 일어났을 때 등줄기에서 한순간 소낙비처럼 내리던 식은땀의 공포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말하자면, 이제 자동차 담당 1년차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세팡을 달린 것이다(운전 경력이 1년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당연히 피는 거꾸로 치솟았고, 과분비된 아드레날린은 체력을 급속히 소진시켰다. 살금살금 기어다니며 목숨 귀한 줄 새삼 느꼈다. 알고 보면 F1 서킷이라지만 거기도 엄연히 자동차가 달리는 도로일 뿐인데 말이다. 가속 페달을 밟아서 속도를 올리고 브레이크를 밟아 속도를 줄이는 이치는 같은데 말이다. 천천히 달리면 될 것을, 식은땀까지 흘리면서 액셀러레이터를 괴롭힐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말이다, 세팡은 세계에 몇 곳 없다는 F1 공식 서킷인데다, 서킷을 달린 차는 클럽 스포츠용으로 튜닝된 메르세데스 벤츠 SLK 55 AMG다. 그 녀석에는 나만을 위한 차 넘버와 이름까지 프린트되어 있었다. 그뿐인가, 난 ‘이니셜 D’와 ‘사이버 포뮬러’ 광팬이란 말이다.
생각해보면 SLK 55 AMG로 서킷을 하루 종일 달린 날, 호텔에 와서 내내 귀신 이야기만 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세팡 서킷에서 내 주변에 사신이 어슬렁거렸던 것일까? 현기증 나게 더운 무더위로 잠시 몽롱해진 틈에 내 볼에 키스를 하고 갔는지도 모르겠다. 처음 여자의 알몸을 본 아이처럼 볼이 내내 부끄러운 상태였으니 말이다. 물론 기온이 35℃ 안팎을 오르내리고 서킷의 열기가 54℃를 넘었던 탓에 잠시 헛것을 봤을 징후가 농후하긴 하다. 어쨌거나 SLK 55 AMG에 올라 세팡을 내달린다는 황홀한 감정과 이런 운전 실력으로 온전히 집에 갈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혼재하면서 호러 영화의 옷장을 열어보는 듯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이런 기분 나도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내 차 번호는 양쪽 도어 가득 숫자 ‘4’가 때깔 좋게 박혀 있었다.
물론 그 탓으로 돌리고 싶진 않다. 이제 자동차 담당 1년차가 언제 이런 서킷을 달려보기나 했겠는가. 내 운전 실력을 탓하는 독일 강사에게 ‘땡깡’을 부리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너 집에 가’라고 할까봐 아무 말도 못하긴 했다. 무엇보다 아무나 참가할 수 없다는 ‘메르세데스 벤츠 액티브 세이프티 익스피어리언스’ 아닌가. 긴 제목만큼이나 정말 쉽지 않은 행사다. 특히 이번 행사는 17대만 특별 제작된 클럽 스포츠 버전의 SLK 55 AMG를 시승할 수 있었다. 차 무게를 150kg 정도 줄였고, 안전을 위해 하드톱을 고정시켰다고 했다. 연료 탱크의 위치도 충돌에 대비해 하드톱이 수납되는 트렁크 공간에 배치되어 있었다. 휠에도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접지력이 좋은, 일명 지우개 타이어라고 부르는 서킷용 미쉐린 광폭 타이어가 끼워져 있었다. 엔진 커버에는 엔진을 조립한 숙련공의 사인이 적혀 있었는데 장인의 손길이 느껴졌다. 특별 제작되었고, 서킷에 맞게 세팅된 터라 엔진 제원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2004, 2005년 F1 시즌 세이프티 카였던 동일 모델, SLK 55 AMG가 베이스라고 했다.
한눈에도 뭔가 특별해 보이는 녀석의 시동키를 돌렸다. 온몸으로 전달되던 녀석의 박력이 오금을 저리게 했다. 배기음에 따라 내 몸이 춤을 추는 듯했다. 독일의 전설적인 힙합그룹 마시브퇴네의 노래를 들으며 녀석과 몸짓을 맞추면 제격이지 싶었다. 물론 미친 짓이다. 슈마허도, 알론소도 서킷에 들어서면 귀가 경청하는 것은 코치의 지시사항 말고는 없다지 않던가.
드디어 세이프티 카를 따라 ‘Young Jin Kim 4호’가 발진했다. 세팡 인터내셔널 서킷은 1억 달러를 들여 1999년 첫선을 보인 F1 서킷이다. 총 길이는 5.557km로 F1 대회에서는 총 55랩, 305.653km를 달린다고 했다.
무리하지 않은 속도로 처음 2랩을 돌 때만큼은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어렵다는 S자 커브 2곳도 완만하게만 보였다. 아웃, 인, 아웃에 맞춰 SLK 55 AMG의 다이내믹한 퍼포먼스를 여유롭게 즐겼다. 800m 구간의 직선로 2곳에서는 풀 가속으로 시속 200km 안팎으로 마음껏 속도를 만끽하기도 했다. 그렇게 첫 2랩을 돌 때까지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다음 랩부터는 손바닥, 발바닥, 옆구리, 가랑이 할 것 없이 땀샘이 몰린 곳에서는 어김없이 물보라가 일기 시작했다. 세이프티 카는 아마추어들의 실력에 맞게 속도를 조절했다지만 몸이 요동쳤다. 완만하다고 생각한 커브에서도 속도가 빨라지면서 중력치가 늘어나자 한순간에 어딘가로 튕겨져나갈 것만 같았다. S자 커브 2곳도 아웃, 인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가드레일이나 자갈밭으로 곧장 달려나갈 태세였다. 특히 직선도로로 진입하기 직전의 커브들은 각도가 거의 180도나 됐다. 실제 그랑프리에서도 이 코스는 가장 경쟁이 치열한 구간이라고 했다. 앞선 이야기이지만 정차 후 살펴본 녀석의 휠은 철가루를 뒤집어쓴 모습이었다. 말하자면 ‘Young Jin Kim 4호’는 죽어났다. 녀석이 불쌍해 보일 정도로 말이다. 그나마 이 못난 운전 실력에도 녀석이 엄한 길로 내달리지 않았던 것은 19인치 휠을 박력 있게 잡아주는 SLK 55 AMG의 ABS 브레이크와 EPS에 의해 언더와 오버 스티어가 잡혔기 때문이다. EPS가 켜진 상태에서도 지우개 닳는 소리가 요란했는데 없었더라면 일을 치르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공포로 서늘해져야 할 마음이 훈훈했다.
세팡 서킷은 세계 최고의 실력을 자랑한다는 그랑프리 레이서들조차 반 가까이 완주하지 못한다는 쉽지 않은 경기장이다. 정신없이 앞 차만 뒤따라 가서 몇 번을 돌았고 최고 속도가 얼마까지 나왔는지 전혀 몰랐지만 알론소를 어딘가에서 본다면 당당히 “세팡, 참 재미있는 코스야”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 셈이다. 그런 기분으로 녀석을 봤다. 8기통 엔진에 슈퍼 차체의 위력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차의 월등한 성능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운전자의 의지와 감성까지 만족시켜주는 차는 흔치 않다. 세팡쯤 되어야 녀석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아쉽긴 했지만 녀석의 한계가 어디인지 아는 것과 모르고 운전하는 차이는 클 것이다. 안전에 대한 신뢰감은 물론, 명차에 대한 자부심은 보이지 않는 저력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 아닐까.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