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데뷔 때가 기억나나?
생생하다. 운이 좋았다. 보조 출연으로 갔다가 두 시간 만에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다. 요즘 데뷔하는 친구들은 준비를 해서 나오는데, 나는 준비가 덜 되어 있었다.
그때는 연습생이라는 개념이 없었을 때니까.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건데, 급하게 데뷔하니 주변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스타일리스트, 매니저의 존재도 거의 없을 때였다. 언니 옷 빌려 입고, 그러다 옷이 모자라서 사다 보면 끝이 없었다. 고생스러워 울었던 기억이 많다. 방송국은 버스 타고 다니고, 인천의 촬영장까지는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
김소연이 교복 입고 나온 드라마 중 <신세대 보고서 어른들은 몰라요>라는 단막극의 인기가 대단했었다.
맞다. 나는 착안 애를 꼬드기는 가출 반항아 역할을 했다. 내가 좀 일진같이 생겼나 보다. 하하.
10대 때는 무서운 누나 이미지가 강했다.
데뷔할 때 ‘야누스 같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라는 치기 어린 멘트를 했었다. 중학교 3학년짜리가 말이다. 게다가 ‘선과 악을 오가는 연기를 하고 싶어요’라는 말도 했다. 하하. 배역에 대해 잘 모르면서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
조숙해 보이는 이미지와 청소년 드라마의 배역 때문에 진짜 일진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는 그런 소문 많이 돌았다. 나는 학교를 다녀본 기억도 없는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었지. 그 시기가 인생에서 가장 바빴다. 고등학교 3년간 30번 출석했을 정도니까.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너무 다른 세계에 있었고, 촬영장은 너무 어려운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성격이 내성적으로 변해갔다. 내 자리가 어딘지 혼란스럽고, 정신없이 바쁘고, 매일 혼나고,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스무 살까지 말이다.
그리고 스물한 살에 <이브의 모든 것>에서 더 강한 모습을 보여줬다.
<이브의 모든 것> 이후로 기 센 여배우로 각인됐다. 그전에도 어른 역할은 많이 맡았다. 고2 때는 스물여덟 살까지 연기했다. <예스터데이>라는 주말 드라마였는데, 그때 내 연기는 지금 봐줄 수가 없다. 너무 미흡하다. 다행히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잘 묻어갔다. 다시 생각하면 기회가 빨리 오는 게 마냥 좋은 건 아닌 것 같다. 내가 준비되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을 때 기회가 왔다면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 녹색 원피스와 퍼 재킷은 모두 조르지오 아르마니, 금색 귀고리는 수엘, 반지는 사만다 윌스 by 옵티칼W, 보라색 스웨이드 신발은 프라다 제품.
10대 때 누려야 할 것을 못 누리면, 고민 같은 게 생기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사춘기가 늦게 왔다. 20대 내내 사춘기였다. 20대가 되면서 고민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나를 다스리지도 못했고, 현혹도 잘 됐다. 귀가 얇았다. 30대가 되니까 나를 다스릴 수 있게 됐고, 듣는 귀가 생겼다.
중심을 잡게 된 건가?
오히려 20대에 철없는 주관, 그러니까 똥고집이 있었던 것 같다. 주관이 뚜렷하면 시야가 좁아진다. 치기 어릴 때는 그랬다. 이제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남의 말을 주의 깊게 들으려고 한다. 내가 생각한 것 말고 다른 게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메이크업이나 의상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으려고 한다. 20대 때 한없이 고집 부리면서 깨우친 게 많다.
20대 때 가장 고민했던 건 뭔가?
진로다. 내가 계속 이걸 해도 되나? 도태되는 것 같고, 연기 못하는 게 눈에 보였다. 자신을 채찍질하는 시기가 왔던 거지. 행복하지 않았다. 예민하고, 자학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이런 행운을 감당할 사람이 못 되는구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20대 초반부터 중반을 지날 때까지 그 생각이 점점 커졌다.
갈등이 누적된 거지?
맞다.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러다 20대 후반에 행운이 찾아왔다. <아이리스>에서 나를 한 번 던져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액션 배역이 나에게 오리라고 예상 못했다. 인생에서 한 번뿐일 테니,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리스>가 인생의 전환점이 된 건가?
20대 후반에 더 이상 자책하지 말아야겠다면서 정신 차린 시기가 있다. 그때부터 신중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잘못된 선택도 했지만, 한 가지 변화가 있다면 30대에는 행복이 화두가 된 거다. 즐겁고 싶다. 지금까지 남을 의식하며 살았다. 배우가 연애하면 퇴출당하던 시기를 지내면서 더 위축되고, 긴장하며 보냈다.
그럼 20대 때 연애를 못했다는 건가?
물론 남들만큼 했지만 연애하는 게 알려지면 여자 배우에게는 굉장한 치명타였다. 눈에 안 띄게 조용히 했다. 그 습관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제는 좀 편안하고 행복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시대가 많이 변했다. 이제는 연예인들이 자신의 연애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런 것 같다. 나는 예능도 무섭고, 남에게 웃음 주는 게 나와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1990년대에는 예능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하지 않았나?
엄청 많이 했다. 고등학교 때는 <슈퍼선데이>에서 춤추고, 별거 다 했다. 그런 기억들이 나를 조심하게 만들었다. 너무 미숙했거든.
드레스는 버버리 프로섬, 귀고리는 수엘, 더블핑거
반지는 스와로브스키 제품.
김소연의 20대 시절 필모그래피를 보면 도도하고, 고지식한 배우라는 이미지가 있다. 그러다 30대에 접어들면서 <아이리스> <검사 프린세스>를 통해 이미지 변신을 시작했다.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몇 년을 허송세월하고 나니까. 소중한 기회에 온몸 바쳐 매달리지 못했다는 자책을 하며 깨달았다. 이 배역을 연기하고 싶어 하는 몇만 명의 연기자들이 있을 텐데, 이걸 놓치면 더 쉬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뭘 모르던 시절에는 인생의 가치를 다른 곳에 뒀던 게 아닐까?
어떤 계기로 마음이 바뀌었는지 답을 내릴 수는 없다. 어느 순간 연기자가 행복한 직업이라는 걸 알게 됐다. 당시에 절실하지 않았던 게 후회가 남는다. 가장 예뻤을 시기인데.
다른 일을 해볼 생각은 없었나?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것 같다. 고민해도 결국은 연기밖에 없으니까. 난 종교가 없는데도 매일 기도했다. 그러다 액션 연기가 들어왔는데, 다리가 부러져도 죽기야 하겠느냐는 생각이 들더라.
사실 운동 잘하는 줄 알았다.
하하. 내가 다 속였다. 물론 대역도 있었지만, <아이리스>는 연습만 6개월 했다. 밤 10시에 촬영 끝나도 헬스클럽 가서 운동했다. 프로틴 먹으면서 식단 조절하고 드레스 입으면 남자 같았다.
그때 드레스 입은 사진 보면 강해 보인다.
<진짜 사나이> 보고 사람들이 난리가 났다. 어떻게 된 거냐고. 평소에 근육을 좀 길러뒀어야 했는데, 많이 반성하고 있다. 그래도 또 액션 배역이 들어오면 할 거다.
이제는 빠르게 변하는 시대다. 잠깐 쉬면 금세 잊혀진다.
공백기가 오면서 비슷한 역할만 들어왔다. 매력 없고, 밋밋한 악역들이었다. 나는 혈기왕성했고, 다양한 배역을 하고 싶었다. 거절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제의가 안 들어왔다. 나락에 떨어져봐야 정신을 차린다고, 제대로 겪고 나니까 소중함을 알게 됐다. 지금도 3개월 정도 쉬었는데, <진짜 사나이> 아니었으면 정말 잊혀질 뻔했다. <진짜 사나이> 출연하면서 느낀 건데 나를 드러내는 걸 두려워했던 것 같다.
옅은 회색 원피스는 도나 카란 제품.
대중을 너무 의식하며 지낸 게 아닐까?
시청자가 원하는 이미지에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검사 프린세스>가 제일 편했다. 그 3개월이 인생에서 ‘아, 이게 행복이구나’라고 느낀 시간이었다. 본래 성격과 잘 맞았다. 하지만 누군가는 안 어울리는 옷을 입은 것 같다고 했다. 사람들이 원하는 내 이미지와 본래 내 모습 사이에서 혼란스러웠다. 다행히 이번 예능 덕분에 사람들이 편하게 봐준다. 강한 역할이 안 어울린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솔직한 게 가장 편한 거 아닐까?
그래서 연기 욕심이 더 생긴다. 나를 솔직하게 보여주니 응원해주는 팬들이 생겼다. 이제 더 보여주고 싶다. 예전에 했던 배역을 나이를 먹고 다시 하면 어떨까? 선입견 없이 나를 보여줄 수 있을 텐데, 앞으로 해보고 싶은 배역을 고르라면 예전에 했던 배역들이다.
연기는 애증의 대상인가?
나를 들었다 놨다 한다. 그리고 호의적인 사람도 어떤 순간에는 남이 될 수도 있다.
다들 자기 입장에서 정의를 말하니까.
무작정 하늘을 나는 기분 같은 건 사라졌다. 이제는 일희일비하지 않고, 담담한 편이다.
앞으로 10년 뒤에는 어떤 모습일까? 그때도 인생의 가치가 행복일까?
그럴 것 같다. 애인이 있어도 결혼은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결혼을 생각하게 된다. 때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앞으로도 분명 연기를 하겠지? 나도 내 미래가 궁금하다. 30대 후반과 40대는 2라운드가 될 텐데.
김소연의 연기 인생 20년은 내가 산 주식처럼 반등 폭이 크다.
이제는 현상 유지만 돼도 좋을 것 같다.
Editor: 조진혁
photography: 김영준
STYLIST: 남혜미
HAIR: 수안(아쥬레)
MAKE-UP: 권인선(아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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