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y 조선희 Editor 이지영 stylist 조정은
참 이상한 일이다. 제아무리 그가 허허 하고 웃어 보인다 할지라도 결코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고, 먹고, 행동하여도 이상하게 그 모습이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그를 만나러 가기 전 ‘가시처럼 까다로울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배우의 아들, 산전수전으로 얼룩진 성장사, 그리고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 지금. 어디 하나 허준호에게는 쉽고 편안한 구석이 없어 보인다.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악인의 이미지도, 꺽꺽 울면 바로 안아줘야 할 것 같은 고아 같은 모습도 모두 허준호인 것을. 우리는 유독 허준호에게서 기억하고 싶은 부분만 기억하려 드는 것이다.
스튜디오에 도착한 그가 끼니를 건너뛰었다며 초밥을 허겁지겁 먹는데, 그 모습이 왠지 슬퍼 보였다. 밥을 다 먹은 그가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고 있을 때도 그 모습은 여전히 안쓰러워 보였다. “저는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인터뷰 먼저 하라면 하는 거고, 사진 촬영 먼저 하라면 그것부터 하는 거고.” 이렇게 느긋하게 자신을 보이는데도, 왜 그는 어렵게만 느껴지는 걸까. “해가 지느냐. 정신을 집중하여 서산으로 지는 해를 베거라. 해가 지고 달이 뜨면 달을 베거라. 너의 검에 해와 달이 갈라지는 순간 심안이 열릴 것이다.” <주몽>에서 그가 뱉은 말이 스튜디오 안에 연기처럼 맴도는 느낌이었다. 그는 한없이 편안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촬영 현장엔 내내 이유 없는 긴장이 맴돌았다. 정말 의아하게도 말이다.
인터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걱정이 많았다. 감히 ‘해모수님’에게 억지로 말을 붙이기가….
말을 별로 못해서.(웃음) 아, (신)현준이가 왔어야 하는 건데 아쉽다. 걔는 말을 무진장 잘하거든.
옷 갈아입고 헤어와 메이크업 하는 행위, 그러니까 일련의 ‘꾸미는 과정’ 역시 번거로워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우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옷 갈아입고 카메라 앞에 서는 거야. 왜냐, 못하니까.(웃음)
연기는 하면서 포즈는 못 취한다는 게 말이 되나.(웃음)
연기하는 거랑 포즈 취하는 거는 전혀 다르다. 왜냐, 카메라 앞에 설 때 상황이 없잖아.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러니까 모델이 따로 있는 것 같다. 배우들은 거짓말 못하거든. 그래도 뭐 사람들이 (설)경구보다는 내가 낫다고 했으니까 오늘 촬영은 걱정 안 한다.(웃음) 옷이야 뭐 평소에도 그냥 이러고 다니고. 티셔츠에 청바지. 눈에 보이는 게 이것밖에 없으니까. 머리는 촬영 끝나면 무조건 기른다. 어떤 역할이 들어올지 모르니까.
인터뷰도 인터뷰지만 사진이 또 중요하다. 이따 잘 해주리라 믿는다.
뭐 나야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 사진작가들도 다들 자기 이름 걸고 하는 일이라 계속 다시 찍고 하지 않나. 우리도 그런다. 감독님은 괜찮다는데도 계속 한 번 더 찍자고 한다. 안 찍어주면 삐치고 우리도 그런다.(웃음)
현장에서는 어떤 스타일인가. 감독보다 무서운 중견일 수 있고, 고분고분한 새색시 타입일 수 있는데.
둘 다 맞다. 감독보다 위에 서서 내 맘대로 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이해가 되지 않으면 물어본다. 모르고 촬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마지막 선물> 찍을 때는 기른 정이 뭔지를 몰라서 고생했다. 내가 애를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인데, 남의 자식은 정말 못 기르겠더라. 그런 거 보면 차인표, 신애라 씨는 정말 굉장한 일을 하는 거지. 그게 정말 쉬운 게 아니거든.
이 영화를 택한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무엇이었나.
감독이 나를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는데, 그게 날 꼬이려고 한 말인지 어떤 건지는 모르겠다.(웃음) 아무튼 시나리오 보자마자 한다고 한 건 사실이다. <부모님 전상서> 하고 나서 운명적으로 이런 영화를 하게 될 줄 알았는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못했다. 당시에 <말아톤>이 들어왔었는데 그때는 이혼한 뒤라 심적으로 안 좋아서 못 하겠더라고. 그런데 또 이번에 자폐아 얘기가 들어온 거야. ‘아, 이건 하라는 얘긴가 보다’ 했다.
작품 선택의 기준이 있을 것 같다.
나이 들면서 ‘사랑’으로 바뀌었다. 단순히 멜로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사랑 얘기. 그런 이야기가 담겨 있으면 무조건 하려고 하는 편이다. 말이 안 되는 작품을 그동안 참 많이도 했는데 이제 그만하려고 한다. 거절을 못하는 성격 탓에 부르기만 하면 무조건 했었는데 그게 안 맞았을 때는 서로 피해만 주더라고.
어떤 역할을 더 해보고 싶나. 당신의 눈빛은 강하기도 하고, 한없이 따스하기도 하다.
아예 진짜 악역을 한번 해보고 싶다. 나는 항상 악하다가도 마지막에 선하게 되돌아오는 역만 맡지 않았나. 그런 건 진짜 악역이 아니지.(웃음) <지옥의 묵시록> 같은 영화. 누군가를 완전히 파멸시키는 역할을 맡아보고 싶다.
갑자기 당신의 눈빛이 무섭게 느껴진다.(웃음) 연기는 어떤가. 이제 허준호는 뭐, 연기력 때문에 걱정하진 않을 것 같다.
아우 무슨 말씀을. 하면 할수록 어렵고, 울렁증이 더 생기고, 한계를 느끼는 게 연기다. 스스로 내 한계를 알고 있는데, 자꾸 기대하는 바는 커지는 것 같아 어렵다.
그래도 명색이 허장강의 아들인데, 타고난 피가 있지 않겠나. 우리가 허준호에게 기대하는 건 천생 배우의 아우라일 것이다.
그건 정말 오해다. 난 진짜 연기 못했던 놈이다. 옛날 작품 보면 내가 봐도 정말 심각하다. 연기뿐인가. 노래도 못했다.(웃음) 그런데 오기로 했다. 오기로. 자꾸 뒤처지는 게 싫어서. 내 지론은 연습이다. 나라고 연습하고 싶겠냐고. 그런데 연습 안 하면 안 되는 놈이니까 하는 거다. 평소에 굉장히 게으른 사람인데 부지런해지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편이다.
술은 소주를 좋아할 것 같고, 담배는 하루에 두 갑 이상 피울 것 같다.
술은 끊었다, 완전히. 음주 사고 나면서 끊기 시작해서 지금은 전혀 안 마신다.
그게 가능한가.
하나님 만나면 된다.
담배는?
담배도 많이 줄였다. 하루에 세 갑, 네 갑 피우던 걸 이제는 하루에 한 갑도 안 피운다. 나, 염주 차고 다녔던 것 모르나? 15년 동안 절을 열심히 다녔던 내가 개종을 하고, 술을 끊고 담배를 줄였다. 그게 가능하더라.
변화의 계기가 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던 건가. 어찌됐든 대단하다.
음주 사고 당한 날. 그날 나 완전히 죽었었다. 타고 있던 차가 폐차 됐는 걸 뭐. 그날 빛 받고, 처음으로 부른 사람이 ‘목사’였다. 내가 워낙 뭐 하나 파면 끝을 보는 성격이거든. 절에 다닐 때도 접신하는 데까지 가봤을 정도니까. 사고 이후 개종했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 편한 적이 없다. 누가 날 건드리는 것 못 견디고 자존심 상하게 하는 걸 못 견디는 성격인데, 개종하고 났더니 어느 순간 편안해지더라고. 알고 봤더니 우리 어머님이 나 모르게 5년 동안 기도하셨더라.
어머니는 어떤 분이신가.
아버지가 열두 살 때 돌아가시고, 열세 살 때부터는 혼자 생활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모성애를 느낄 틈조차 없었다. 학교 다닐 때야 야구를 했었기 때문에 기숙사 들어가 있었고, 가끔 어머니 만나면 투정 부리는 정도였지 뭐. 모성애를 느낄 수 있는 가족이 아니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힘들었으니까. 그러다 내가 좀 벌면서 살 만해졌는데, <헤어화>로 사고쳐서 다시 어려워졌지.(웃음)
돈을 좇아가는 성격은 아닌가 보다. 그 어렵다는 뮤지컬 제작에 손을 댄 것만 봐도 그렇고.
돈? 싫어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굉장히 좋아하지. 뮤지컬을 하게 된 계기는 요즘 예술 정서가 마음에 안 들어서다. ‘어? 내가 여기서 뭘 해야 하는 거지?’ 했던 거다.
20대, 30대, 40대에 연기하는 느낌은 어떤가. 모두 다 다르지 않을까.
20대, 30대 때는 무조건 내 이름 내려고 했던 거고. 30대 후반부터는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20년 연기했고, 앞으로 20년 더 남았는데, ‘내가 뭘 하고 가야 하지?’ 그게 궁금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정립한 게 내 직업이 뭔가를 생각하는 일이었다. 웃음 주고, 감동 주고, 기쁨 주는 작업하는 게 내 직업 아닌가. 그럼 작품에 돈을 다 쏟아 넣어야겠구나 하게 된 거다. 그러니 식구들은 고생이지. 정말 다 쏟아 부었거든.(웃음)
있게도 살아봤을 것이고, 없이도 살아봤을 것이다.
차라리 아예 없는 게 편하더라.(웃음) 작품에 쏟아 부을 돈 따로 챙기고, 다른 데 쓸 돈 따로 챙기느니 아예 다 쏟아 붓고 없는 게 편하더라. 나는 정말 최고로도 살아봤고 가난하게도 살아봤다. 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우리 집 앞에 중앙정부가 있었고, 온갖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가득했는걸. 그러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지하 방 전전해가며 누울 자리도 없는 방에서도 살아봤다. 결국은 없이도 살아지더라. 그때 들었던 감정, 생각들이 지금 도움이 된다. 그때는 용서라는 게 없었거든. 매일 매일이 전투였으니까.
보통 사람들의 삶을 상상할 수 있을까. 어찌 보면 당신은 태생부터가 남다르다.
나는 배우들하고 술 먹는 것보다는, 평범한 친구들하고 지내는 시간이 더 많은 사람이다. (설)경구랑 (박)준규랑 그렇게 친해도 만날 전화나 하지, 일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인데 뭘. 대신 평범한 친구들하고 지내는 시간이 훨씬 많다.
연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무얼 하며 살았을까.
건달이나 했겠지 뭐. 운동했던 놈이 뭘 알아. 지식이 있어 뭐가 있어. 대학교 가서 처음 영어를 접했는데.
아쉽거나 후회되는 것 없나.
없다. 앞으로나 잘살아야지 옛날 생각하면 뭘 하겠나.
그래도 ‘아 이게 직업이구나’ 싶었던 순간이 있었을 텐데.
난 처음부터 이게 내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뛰어들었다. 할 게 없었고, 먹고 살 게 필요해서 시작한 일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연기는 내 직업이었다. 배우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다. 아버지 때문인지 배우에 대한 동경은 조금도 없었으니까. 기사 아저씨가 현장에 데려다준 날에나 만날 수 있는 아버지. 그런 기억이 대부분인데 배우가 되고 싶었겠나.
그럼 질문을 조금 바꿔보자. ‘평생 연기해야겠다’ 싶었던 순간은 없었나.
시작할 때부터 이 일을 평생 할 거라고 생각했다. 운동도 실패했지, 그렇다고 공부를 했던 놈도 아니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무용과를 나왔는데, 무용으로는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 없더라. 집안은 먹여 살려야 하는데 도저히 먹고 살 길은 안 보였던 그때, 이규형 감독이 나를 영화판으로 끌어들였다. 물론 그 이전부터 어머니는 내가 은근히 연기하기를 바라셨고.
그렇게 시작한 연기가 직업이 됐고, 연극, 영화, 뮤지컬 모두에서 이름을 알렸다. 운이 좋은 건가.
나는 정말 운 좋은 놈이지. 세 군데 다 다니면서 좋은 작품 했으니까. 물론 텃새도 보통은 아니었다. 방송국에서는 영화 하고 연극 하니까 배우가 아니라고 했고, 연극 하면 TV 하니까 배우가 아니라고 했다. 서른 다 돼서 방송을 시작했는데 사실 난 그 전엔 TV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어느 날 방송하는 친구들한테 물어보니 돈이 꼬박꼬박 나온다고 해서, 그래서 시작한 게 TV였다.
혹시 한계를 느껴본 적은 없었나. 열등감 같은 것 말이다.
어렸을 때는 있었지.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우습다. 그래서 뭐가 남지? 이런 생각을 하니까 나를 내세우려고 하면 피곤해진다는 것, 부질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지금은 그걸 안 놓치려고 아등바등대는 모습들을 보면 우스울 뿐이다. 나라고 욕심 없겠나. 톱 되고 싶지. 그런데 이제는 내가 나를 누른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어떻게 다가오나. 40대의 허준호. 당신 눈가의 주름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많은 걸 품고 있을 것이다.
원숙미가 늘어난다는 게 좋다. 내가 아버지라 부르는 분이 몇 계신데, 변희봉 선배님이 그중 한 분이시다. 실제로 선배님은 만나보면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 모른다. 진짜 무서운 할아버지지. 그런데 항시 작품 하면서 울컥 하는 걸 참으시더라고. 그동안 최불암 선생님에게 눌려 있었다가 이제야 빛을 보시지 않나. 한 배우가 참고 또 참다가 피는 모습. 그게 보기 좋은 거다. 그런 배우가 되고 싶은 거지.
행여 허준호를 잃진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당신은 평생 연기할 것이니.
평생 할 거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렇게. 나를 찾아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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