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ds 이진백(스포츠 애호가) Illustration 장재훈 Editor 정석헌
이번 월드컵을 통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은 ‘대~한민국!’이 아닐 것이다. 바로 이 문장. “심판 판정도 경기의 일부분이다!”였다. 월드컵 이전이라면 누구나 수긍할 내용이지만, 사상 초유의 ‘오심 월드컵’을 경험한 지금으로선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이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심판들의 오심 행진을 지켜보는 일이 축구 경기 자체를 즐기는 것보다 훨씬 흥미로웠던 월드컵이다. 한 선수에게 3장의 옐로카드를 준다거나 한 경기에서 16장의 옐로카드를 꺼내 선수 4명을 퇴장시키는 심판을 만나고 말았으니 말이다. 심판의 완벽하지 못한 모습을 보는 것도 분명 축구 경기의 재미 중 하나다. 문제는 심판의 오심 때문에 선수들이 흘린 땀이 무의미해지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앞으로 월드컵의 기억이 ‘오심의 추억’으로 남지 않으려면 뭔가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이 요즘의 중론이다. 사실 국제축구연맹(FIFA)에서 이 같은 사태를 예상 못했던 것은 아니다. 피파는 공정한 판정을 위해 심판 수당을 대폭 인상했고,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같은 대륙 출신의 주심과 부심을 한 경기에 배정했으며, 무선 이어폰까지 착용하게 했다. 하지만 그걸로는 약했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이번 월드컵의 오심 논란이 ‘피파의 기술 공포증 탓’이라며 비난했고,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피파가 첨단 기술에 의지하기보다 심판의 판정에 힘을 실어주겠다고 공언하면서 기술에 기댈 수 없게 된 심판들은 불가능한 임무에 직면하게 되었다”라고 꼬집었다. 맞는 말이다. 솔직히 이번 월드컵에서 과학 기술이 한 일이란, 골 장면을 다양한 각도에서 볼 수 있게 해주고 경기 후 벌어진 난투극에서 아르헨티나 공격수의 안면을 강타한 독일팀의 미드필더 프링스를 TV 카메라로 포착한 것 말고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 기술이 도입된 판정의 필요성을 쌍수 들어 부르짖고 있다. 미식 축구, 테니스, 빙상 같은 다른 스포츠에서처럼 축구에서도 ‘비디오 판독’을 비롯해 공정한 판정을 가능케 하고 오심을 줄여줄 기술의 힘을 도입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피파의 입장은 여전히 강경하다. ‘심판의 판정 실수는 인간이 하는 경기인 축구의 일부’라는 태도를 고집하고, 같은 이유로 공 내부에 칩을 심어 골인 여부를 더 정확히 판정할 수 있도록 한 ‘스마트 볼’도 엄격히 금지했다. 또 비디오 판독을 위해 경기가 중단될 경우 경기의 스피드와 박진감이 떨어진다고 주장한다.
다소 보수적이지만, 피파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사람들이 축구에 열광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선수들이 몸을 부딪히며 땀을 흘리면서 일어나는 다이내믹한 상황과 묘기들 때문이다. 당연히 심판의 실수도 그 일부다. 박지성은 스위스전 패배 이후 오프사이드 논란에 대해 “그것도 게임의 일부”라고 말했고, 이운재가 비에이라의 슛이 골라인을 통과한 뒤에 막은 것이 골로 인정되지 않은 데 대해 프랑스의 도메네크 감독 역시 “그것도 축구의 일부 아니냐”면서 승복했다. 경미한 부상으로 선수가 넘어졌을 때 그 짧은 순간의 지루함조차 견디지 못하는 축구 경기에서 비디오 판독을 위해 5~10분간 경기를 멈춘다면 정말이지 폭동이라도 일어날지 모를 일이다. 경기의 룰 자체가 ‘교대시간의 연속’인 미국 프로풋볼과 축구는 태생부터 다른 스포츠 아닌가.
과학이 축구에 재미를 부여할지 되레 재미를 앗아갈지를 판단하기란 분명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기술의 힘’을 테스트하자는 요구가 나오는 것은 어딘가 손을 대야 한다는 뜻일는지도 모른다. 이미 축구에서 과학 기술의 도입은 ‘판정 분야를 제외한’ 많은 부분에서 실효를 거두고 있다. 유럽에서는 선수들의 운동 능력을 체크하거나 전술 훈련을 극대화하기 위해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도입한 지 오래고, 훈련을 위한 비디오 판독 기술은 나날이 업데이트되고 있다. 최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구단은 경기장에서의 선수들 움직임을 정밀 분석하기 위해 선수들의 피부에 마이크로 칩을 이식하는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인공위성을 통해 분석한 선수들의 동선 데이터가 더욱 효과적인 전술 훈련을 가능케 할 것이라는 예상에서다.
지금껏 축구는 ‘기술의 힘’이 맹활약을 펼치기에는 제도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과학 기술을 써먹을 수 있는 규정이 그라운드 위에 없는 탓이다. 말 많고 탈 많았던 오프사이드 룰만 해도 그렇다. 공격자가 오프사이드 위치에서 부당한 이득을 취했을 경우에 비로소 오프사이드가 선언되는 것이 오프사이드 룰의 핵심이다. 문제는 심판이 ‘부당함’의 여부를 정확히 판단할 만큼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축구에서 정확한 판결은 심판이 얼마나 가까운 곳에서 현장을 포착하느냐와 직결된다. 하지만 심판의 눈은 공의 빠른 움직임을 100% 다 따라잡지 못하고 앙리나 테베즈 같은 빠른 공격수들의 스피드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사이드 라인 주위에 레일을 만들고 카메라를 설치해 선심이 보다 정확한 오프사이드 판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건 어떨까. 주심이 선심과 헤드셋을 통해 뭔가를 소곤대는 것보다 훨씬 더 믿음직스럽지 않을까?
25대의 카메라를, 시청자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정확한 판정을 위해 쓰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날이 오면 이운재가 한숨 돌렸던 비에이라의 슛에 대한 논란은 애초에 일어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골대 주변에 미리 설치해둔 영상저장장치가 공의 일부분이라도 골라인에 걸쳐 있으면 노골로 판정하는 현행 축구경기 규칙에 힘을 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주심과 선심 외에도 카메라 판독관을 한 명 더 두거나 쇼트트랙처럼 심판으로 하여금 자신의 판정에 대해 설명(또는 해명)할 수 있도록 장내 마이크로 코멘트 시간을 마련하는 방안도 한 번쯤 고려해볼 만한 아이디어다.
첨단 기술을 도입하면서 축구 경기의 흐름을 깨뜨리지 않는 수준에서의 제안과 시도는 현대 축구의 올바른 진화를 보장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독일 월드컵은 그 과도기쯤에 있다. 최대한 구(球)에 가깝게 제작해 공의 마찰계수를 줄인 독일 월드컵 공인구 팀 가이스트나 스마트칩을 내장해 훌리건과 테러의 위협으로부터 월드컵을 지키기 위해 마련된 전자입장권, 그리고 6개 월드컵 구장을 연결하는 교통통제시스템 등 심판 판정을 제외하면 축구를 둘러싼 모든 것이 과학 기술의 혜택을 입고 있다. 제프 블라터 피파 회장도 ‘피파의 지나친 보수성’에 대한 반성에서인지 경기 출장을 금지하는 경고 누적 횟수를 현행 2차례에서 3차례로 늘리는 방안을 추진하는 ‘작은 변화’를 꾀하고 있다. 축구의 재미와 공정한 판정,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 위한 진지한 고민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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