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드 스팽글 재킷은 마쥬, 실버 스팽글 쇼츠는 H&M, 실버 귀고리는 필그림, 스틸레토 힐은 크리스찬 루브탱 제품.
박지윤은 열여섯에 데뷔해 여섯 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했다. 그리고 6년을 숨어 지냈다. 2009년, 그녀는 자신만의 힘으로 발매한 7집
<꽃, 다시 첫 번째>를 통해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 공중파 TV가 아닌 인디 음악 신에서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강산이 변하는 데 10년은커녕 반의 반도 안 걸리는 세상이 되었다. 음악의 패러다임이 바뀐 세상에서 그녀의 가녀리지만 당찬 발걸음에도 호흡이 달렸을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계속 걸었다. 3년이 지나 발표한 8집 <나무가 되는 꿈>에서 그녀는 한순간 화려하게 피고 지는 꽃보다 오래도록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나무가 되고 싶어 했다. 사진을 찍고 연기를 하고 뮤지컬과 오페라를 했다.
누군가는 박지윤의 화려했던 전성기가 오래전 끝났다 말하겠지만 그녀는 그동안 충분히 치열한 삶을 살아왔다. 그녀만큼 성대하고 화려하고도 한편으로 혹독한 성인식을 치른 여자도 없을 것이다. 박지윤은 ‘성인식’의 박지윤에게서 벗어나길 누구보다 간절하게 바랐던 당사자이지만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강해졌다. 버릴 것 없는 경험들이 나무의 나이테처럼 쌓이고 쌓여 여자가 아닌, 뮤지션 박지윤이 되었다. 작년 가을부터 레이블 미스틱89에 새로운 터를 잡고 발표하는 싱글마다 좋은 반응을 얻은 이유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그녀는 이제 사람들의 환상 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와 현실에서 공감의 음악을 펼쳐 보일 것이다.
◀ 흰색 시스루 블라우스는 자라, 레이스 디테일의 롱 플레어스커트는 곽현주,
이너로 입은 레이스 쇼츠는
맥 앤 로건, 왼팔의 도트 모티브 뱅글은 바나나 리퍼블릭, 가는 골드 뱅글과 오른팔의 앤티크 골드 뱅글은 모두 사만타 윌스 by 옵티칼W, 체인 목걸이와 반지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새로운 싱글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다. 작업은 잘 진행되고 있나?
페퍼톤스의 신재평과 함께 작업하고 있는데 ‘미스터리’나 ‘Beep’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청량하고 활기찬 여름의 기운을 어쿠스틱 밴드 사운드로 표현하려 한다. 작년 가을부터 발표하기 시작한 싱글 중 이번이 세 번째인데 올가을이나 겨울 중에 정규 앨범으로 묶어낼 예정이다.
1년 이상 앞을 내다보고 하나의 긴 호흡으로 싱글을 발표하고 있는데 뮤지션 입장에선 참 좋을 것 같다.
그럼. 최종적으로 정규 앨범을 생각하고 작업을 이어 나가고 있는 거니까. 여러 가지 다양한 장르와 스타일을 담을 수 있을 것 같다.
7집 <꽃, 다시 첫 번째>에서 스스로 음악적 커리어 면에서 ‘시작’이라 명명했는데, 지금 활동도 그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을까?
큰 시각에선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7집과 8집은 나 혼자 했던 거라 형태적인 면에선 지금 좀 다른 행보를 걷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미스틱89에 합류한 이유는 뭔가?
혼자 음악을 하다 보니 현실적으로 홍보나 프로모션 부분에서 한계를 느낀 게 사실이다. 2장의 앨범을 혼자 해봤으니 이젠 프로듀서와 함께 박지윤의 색깔을 만져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 시점에서 윤종신이라는 프로듀서를 만나 작업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꽤 오래 활동을 쉬었다. 이후 어쿠스틱 사운드의 셀프 프로듀싱 앨범으로 인디 신에서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이런 변화는 어디서 온 건가?
어렸을 땐 멋모르고 정신없이 활동했다. 그래도 지난 시간들을 통해 많은 걸 배웠고, 지금 내가 이렇게 걸어가는 데 토대가 되었다.
아픈 만큼 배우는 거니까. 아티스트로서 자기 것과 대중적인 것 사이의 적절한 지점을 찾는 건 언제나 힘든 일이다. 내가 음악 하는 것 자체가 메인스트림을 지향하는 건 아니니까. 늘 내 음악만을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물론 그렇게도 해봤지만, 그럴 땐 또 대중과의 호흡이 정말 어렵다. 지금은 윤종신이라는 프로듀서와 함께 그 적절한 지점을 배워가고 있다. 미스틱89 자체가 그런 성격이다.
음악적인 것을 품고 가되 대중과의 소통에도 폐쇄적이지 않고 개방적인… 어떤 부분에선 내가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다. 그런데 그것도 내 선택이다. 여러 과정과 시도 중에 내 것과 대중적인 것이 잘 맞으면 히트를 하는 것 같고, 설령 아니더라도 꾸준히 해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글리터링 소재의 슬리브리스 원피스는 알렉산더 왕, 오른손의 실버 반지는 판도라, 그 외의 반지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현명한 해법을 찾아가는 시간이겠지. 여자로서도.
사실 그게 좀 힘든 부분이긴 하다. 여자 솔로 가수로서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해 고민이 많다. 종신 오빠가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다.
여자 가수로서 후배들에게 좋은 롤모델이 될 수 있는 길을 잘 닦아가야 하지 않겠냐, 하는. 물론 나도 그렇게 되길 바란다.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의식적으로 대중의 눈에 띄지 않으려 노력하며 보내다 7집으로 돌아올 때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다. 항상 당시 생각의 여정에 대해 묻고 싶었다. 좀 늦은 질문이지만.
나에겐 10대가 비어 있었다. 어떻게 보면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인기라는 것도 얻어봤고 화려하게 보낸 건 사실이지만 그만큼 자아가 제대로 형성되기엔 부족한 시간이었다. 스스로는 만족감을 얻지 못하고 공허했던 것 같다. 쉬는 시간 동안 자아를 조금씩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음악을 정말 많이 사랑하고 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다. 그동안은 음악을 하면서도 내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다. 음악 외의 것으로 상처 받고 가수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상처로 인해 내가 가지고 있는 본질을 잊어버렸던 거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찾아가게 되더라.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표현해봐야겠다, 한 게 7집이었다. 그 앨범을 만들면서 확실해졌다. 나는 정말 노래하는 사람이고, 앞으로 어떤 시련이 와도 음악을 해야겠다, 하는 생각. 열여섯에 데뷔했지만 내가 정말 무대 위에서 행복했던 건 2009년 7집 앨범 활동 때였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노래했다.
박지윤의 1집부터 6집까지를 돌아보면 음악성이 배제된 것만도 아니었다. 당시에도, 지금도 박지윤의 가창력이나 음악성이라는 본질은 바탕이 됐다.
내 안에 분명 그런 건 있었지. 1집부터 3집까지 어렸으니 프로듀서에 의지하는 부분이 많긴 했지만 진영 오빠를 만난 것도 오로지 음악 때문이었거든. 진영 오빠가 음악적 감각이 탁월했으니까. 특히 진영 오빠는 곡을 쓸 때 가수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스타일이었다.
지금 그때 앨범을 들어보면 정말 좋은 곡들이 많았구나, 생각한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정말 어린 나이에 파격적인 콘셉트를 소화해냈다. 여자로서 힘들고 버거웠을 수도 있겠다 싶다.
무언가를 생각하기 이전에 이미 모든 게 주어져 있는, 모든 스케줄이 짜여져 있는 삶이었지. 정신없던 당시엔 그런 걸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메인스트림 시스템 안에서 활동하던 사람이 혼자 앨범을 낼 용기는 어떻게 낸 건가?
내가 그렇게 대찬 성격은 아니어서 처음부터 혼자 하려고 한 건 아니었다. 많은 기획사들을 만났는데 대부분 ‘성인식’의 박지윤을 기억하고 ‘제2의 성인식’을 만들고 싶어 했다. 박지윤이 이런 음악을?
다들 기피하더라. 그래서 혼자 하기로 한 거다. 겁도 많이 났는데 사실 오기도 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했나 싶은데 그때 많은 사람들이 도와줘서 가능했던 일이다.
박지윤에게 ‘성인식’은 트라우마일 거라 생각했는데
분명 그런 이미지를 거부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럴수록 내가 거기에서 더 못 벗어나는 게 아닐까 했다. 나이가 들면서 ‘성인식’의 박지윤도 내 과거의 한 부분이고, 박지윤이란 사람을 많이 알려준 노래라고 정리하기 시작됐다. 사실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음악 때문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면서도, 음악을 못 놓는 이유가 뭘까?
나는 그냥… 무대에서 노래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Editor: 조하나
PHOTOGRAPHY: 유영규
STYLIST: 하상희
HAIR&MAKE-UP: 성지안(JI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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