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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키 삼매경

로키는 겨울이 제 맛이다. 에메랄드빛 호수도, 빼곡히 솟은 파인트리도, 설산의 풍광만 못하다. 캐나디안 로키를 가장 잘 체험할 수 있다는 밴프를 다녀왔다. 모든 시끄러운 것들이 잠들고, 새하얀 눈만 남은 그곳은 마치 차가운 미인의 절개를 보는 듯했다.<br><Br>[2008년 1월호]

UpdatedOn December 23, 2007

Photography 서영진 cooperation 앨버타 관광청 Editor 이지영

너무 아름다운 여자는 때로 위태롭다는 느낌을 준다. 금방이라도 꺼져버릴 촛불처럼 왠지 모르게 불안하다. 그녀들은 이를 환히 드러낸 채 웃고 있어도 때로 슬퍼 보인다. 한 남자의 인생을 부수고 망쳐놓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는 팜므파탈의 이미지. 그게 어쩌면 캐나디안 로키의 첫인상이 아닐까. ‘Majestic Landscape(장엄한 풍경)!’ 흔히 캐나디안 로키를 설명할 때 이처럼 남성적이고 거친 수식어를 사용한다. 워낙 거대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으니, 그 역시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캐나디안 로키는 남성적이지만 부드럽다. 웅장하지만 섬세한 감정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You never return to me, No return No return.” 1954년 마릴린 먼로는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에서 ‘돌아오지 않는 강’을 노래하며 새 삶을 찾아 떠난다. 한창 때인 그녀가 한도 끝도 없이 부르는 이 노래는 꽤나 구슬프게 다가왔는데, 이는 아마도 보 폭포(Bow Falls) 덕분이 아닐까 싶다. 보 폭포는 이곳, 캐나디안 로키를 따라 흐르는 길고 긴 보 강의 남단에 위치한다. 로키 산맥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이곳에서 느껴지는 건, 다름 아닌 애달픈 감정이라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웅장한 자연을 마주하고 선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서러울 수밖에 없는 것일까. 에로틱한 욕망의 상징이었던 마릴린 먼로조차 이곳에서만큼은 흐느적거리는 여인네로 보이니, 자연의 힘이란 인간의 그것보다 한 수 위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가끔씩 네가 보고 싶어서 미쳐버릴 때가 있어.”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잭(제이크 질렌할 분) 역시 이곳 로키를 뒤로한 채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에니스(히스 레저 분)와 잭은 양치기로 만나 서로 사랑을 확인하지만, 이는 로키라는 대자연 안에서만 가능했을 뿐, 산을 내려온 이 둘은 헤어진다. 무려 4년 만의 해후. 그리고 1년에 한두 번씩 ‘다시’ 브로크백 마운틴(실제로 이곳은 캐나다 앨버타 주의 ‘카나나스키스’다)으로 향하는 이 둘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자연으로의 회귀? 본능으로의 질주? 아마 둘 다 맞을 것이다. 대자연은 언제나 그렇듯 인간의 솔직함을 이끌어내기에, 우리는 서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 둘은 매우 남성적이지만, 부드러운 로맨스를 속삭인다. 마치 이곳, 로키 산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몇몇 사람들은 캐나다를 떠올릴 때,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유럽처럼 문화의 향취가 그윽하게 배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아예 뉴욕처럼 가볍게 반짝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맞는 말일 것이다. 로키를 기준으로 펼쳐지는 대자연은 그저 아름답다는 감탄사를 유발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느낌을 심어줄 수 있다. 하지만 겨울이라는 계절은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내포한단 말인가. 한겨울의 로키는 ‘웅크리고 있다’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웅크리고 있다는 건 뭔가. 일으켜 세울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일으켜 세울 것들이란`(지금은 꽝꽝 얼어붙어 있는) 에메랄드빛 호수요`(지금은 엄청난 설경을 자랑하고 있는) 산맥의 웅장함일 것이다. 그러니 한겨울에 로키를 찾는 일은 팜므파탈의 이미지를 지닌 여인네를 보는 것처럼 엄청나게 스릴 있는 것이다.
“I never in all my explorations saw such a matchless scene(내 평생 이런 절경을 답사해보기는 또 처음이다).” 1882년 캐네디언 퍼시픽 레일웨이 일꾼이었던 톰 윌슨(Tom Wilson)은 레이크 루이스의 위대한 절경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이곳을 사람들에게 알렸고, 레이크 루이스는 세계 10대 절경 중 한 곳으로 꼽히게 되었다. 위대한 발견은 이렇게 가치 있다. “캐나다 로키 산의 스펙터클한 정경은 비로소 겨울에 그 끝을 보여줍니다. 당신이 지금, 이곳을 찾은 것은 그야말로 행운인 거죠.” 레이크 루이스의 언론 홍보 매니저인 제나 스터키는 ‘겨울이야말로 로키의 절정’이라 말한다. 왜 아니겠는가. 지독히도 아름다워 위태롭기까지 한 이곳 로키의 설경을 눈앞에 두고 있으면, 순간 암전이 되는 것을 느낀다. 아찔한 것이다. 마치 절세미인을 앞에 두고 있을 때처럼.

“친애하는 호텔 게스트님께. 이 카드를 침대 시트 위에 올려놓았을 경우에만 시트를 교체해드리겠습니다. 만약 카드가 올라와 있지 않은 경우에는 ‘하루 더 사용하겠습니다’라는 의미로 알겠습니다. 이것이 우리 호텔의 환경 규칙입니다.” 밴프에 도착해서 가장 크게 놀란 것은, 여기저기 ‘주의해야 할 규칙들(Attention)’이 많다는 점이었다. 마음 놓고 생활한다는 것이 왠지 양심에 찔릴 정도로 이곳은 환경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한 규칙들이 꽤나 많았다. 호텔에 머무르는 동안 시트를 ‘불필요하게’ 새로 갈아 끼우지 않는 것은 기본이요, 사용하지 않은 타월 역시 그대로 재활용된다. 물론 이 역시 사전에 ‘경고 문구’가 함께한다. “친애하는 호텔 게스트님께. 당신은 한번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하루에도 엄청난 양의 타월이 불필요하게 세탁되고 있습니다. 사용한 타월은 배스터브 안에 넣어주십시오. 그렇지 않은 타월은 ‘I’ll use again(다시 사용하겠습니다)’의 의미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렇게 까다로운(?) 규칙에서 얻는 건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자연일 것이다. 밴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밴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밴프국립공원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환경보호 지역 중 한 곳이다). 그러니 이곳 밴프에서는 단지 호텔 이용 수칙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들이 범람한다. 밴프 타운이 고즈넉한 느낌이 드는 것은 이곳에 고층 빌딩이 없기 때문이다. 4층 이상의 건물이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밴프는 고도 제한 구역에 속하는 것이다. 지저분한 전깃줄이 없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웃 도시 캔모어만 해도 여기저기 거미줄처럼 전깃줄들이 얽혀 있는데, 밴프는 예외다. 그 흔한 케이블 선 하나 눈에 띄지 않는다. 캔모어와 비교되는 게 또 하나 있다. 바로 비교적(?) 저렴한 집값이다. 밴프의 땅은 개인 소유가 불가능하다. 단지 지상권만 개인 소유가 가능하다. 때문에 이곳에서 ‘개인의 이익을 목적으로 한 부동산 투기’란 불가능하다. 집값 역시 1년에 2%씩만 오르게끔 규제되어 있기 때문에, 이 아름다운 밴프 타운엔 사욕(私慾)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조금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야생 동물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도 밴프만의 특색이다. 환경보호 지역으로 지정된 땅답게, 이곳에서는 사람보다 동물이 우선이라는 느낌까지 든다. 현재 밴프에는 2천6백 마리의 염소와 1천 마리의 엘크와, 80마리의 곰과, 50마리의 여우가 살고 있다. 그러니 길을 걷다가, 혹은 드라이브 도중에 엘크 떼와 곰 무리를 만나더라도 당황해할 필요는 없다. 거듭 말하지만 이곳에서는 사람보다 동물이 더 많을 지경이기 때문이다. “서로 각자의 영역에 침범만 하지 않으면 위험할 게 뭐 있나요? 안전하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 무리의 엘크 떼를 보고 화들짝 놀라는 동안, 버스 드라이버는 의연한 듯 ‘생태계의 조화’를 읊어댄다. 그는 지난 5개월 동안 1백9마리의 엘크를 보았노라고, 그중 한 번은 29마리의 떼와 조우했노라고 자랑하듯 이야기한다. 밴프의 자연이란 이 정도라는 자긍심 섞인 발언이다.
조금은 유난스럽게 들릴 정도로 밴프의 자연 사랑은 엄청나다. 동물이 따로 지나다닐 수 있도록 도로 밑에 9개의 터널을 지었으며, 동물 육교 역시 심심치 않게 보인다. 밴프 타운에는 동물 이름을 딴 도로가 즐비하며, 겨울에는 입산이 금지된 구역도 허다하다(추운 날씨 때문에 동물들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 그대로를 접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커다란 가치인지는, 이곳 밴프를 경험해보기 전엔 모를 일이다. 손상되지 않은 곳보다 엄청나게 손상된 곳들이 즐비한 게 지금의 지구 환경이기 때문에 밴프는 드물게 남겨진 숫처녀의 느낌이다. 하지만 순결을 지킨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때문에 밴프에서는 ‘도로가 상할 수 있으니 체인은 감지 말 것’ ‘운전할 때 동물 가까이 가지 말 것’ ‘야생화는 하나의 풍경이니, 바라볼 뿐 가져가지는 말 것’ 등의 수칙이 따른다. 조금 성가신 규칙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긍이 가는 건, 아침에 창문을 열었을 때 느껴지는 말짱하도록 깨끗한 공기 때문일 것이다. ‘밀리언 달러 뷰’는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꽤나 까다로운 밴프의 수칙 속에서 느낄 수 있다. 아찔하도록 차가운 공기만으로도 밴프에 대한 설명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이다.
정말, 다행인 일이다.

너무 유명해진 자연은 손상되기 마련이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괌에 다녀온 친구는 “총천연색 물고기가 다리 사이로 스쳐 지나다녀!”라며 감탄에 감탄을 연발했다. 불과 5년 전 몰디브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친구 역시 ‘몰디브야말로 지상낙원’임을 외쳐대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사람이 자연을 망쳤다. 이제는 어느 누가 괌에, 몰디브에 다녀온다 할지라도 이전만큼 감탄을 쏟아내지 않는다. 훼손되지 않은 자연의 느낌. 마치 피(血)처럼 위험하고도 생생한 감동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흔히 캐나다에서 스키를 탔다고 얘기하면 ‘휘슬러’를 다녀온 줄로 안다. 그만큼 휘슬러는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상업화된 스키장이다. 엄청난 슬로프와 이에 버금가는
더 엄청난 인파는, 휘슬러를 잘 만들어진 스키장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이바지했다.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가 늘 그러하듯, 이미 만인의 손을 탄 여자는 만지고 싶어하지 않는다. 비밀스러움도 없고, 신선하지도 않으며, 이미 때가 묻었다는 인식 때문이다. 휘슬러가 그러하다. 이미 안 다녀온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진 그곳은 왠지 설레는 느낌이 없다.
밴프에서 스키와 보드를 타는 일은 그래서 첫사랑의 속살을 만지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신비로우며 생경하다. 밴프의 스키장들이 의미가 있는 것은 밴프국립공원 안에 위치해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미 앞서 설명했듯, 밴프국립공원의 환경에 대한 집착과 규제는 엄청나다. 때문에 밴프에서 스키를 타는 일은, 아직 훼손되지 않은 로키를 경험하는 일이며, 그만큼 엄청난 장관을 즐기는 일이기도 하다. 스키를 타다가 산짐승을 만난 적이 있는가. 혹은 엄청난 절경을 감상하느라 하강을 멈췄으면 했던 적이 있었던가. 밴프에서는 둘 다 가능하다.
샴페인 파우더는 보드랍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웨트 파우더(Wet Powder)가 아니기 때문에 전혀 질척하지 않다, 아주 담백한 여자처럼. 밴프의 설질(雪質)이 그러하다. (상대적으로 휘슬러는 태평양에 근접해 있기 때문에 웨트 파우더에 가깝다.) 당연히 스키나 보드의 왁싱이 전혀 필요치 않으며, 넘어져 굴러도 크게 아프지 않다. 오히려 포근히 감기는 느낌이랄까.
흔히 로키 산을 일컬어 ‘정복의 산’이라 표현한다. 빙하기를 거쳐 탄생된 로키 산은 그만큼 뾰족하기 때문에 완만한 등산로를 지니고 있지 않다. 도도하기 이를 데 없는 여자처럼 로키 산맥의 봉우리 봉우리가 그러하다. 그러니 몇몇 슬로프는 삽이나 무전기 등 필수 장비를 지니지 않으면 입장이 불가능한 곳도 있다. 하지만 더블 블랙 다이아몬드 코스(초상급자용)는 그래서 관심이 간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수천 미터의 해발 위에 서보고 싶은 것이다.
“그곳엔 인간의 손길이 닿지않은 자연의 느낌이 있다.- Mountaineer A.P. Coleman, 1884”
때때로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너무나 치명적이어서 감히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있는 것이다. 밴프에서의 스키(보드) 체험이 그러하다. 훼손 되지 않은 자연이라는 게 무엇인지, 그 위에서 활강한다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경험해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곳에서는 높은 산자락과 내려갈 곳이 동시에 보이는 위치에 서 있을 때 훨씬 더 많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 한없이 위를 향해 오르더라도, 반드시 내려갈 곳이 있음을 인지하는 것. 그게 바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면서도, 자연 그대로를 지키고자 하는 밴프 스키장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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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Photography 서영진
cooperation 앨버타 관광청
Editor 이지영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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