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리 사인펠드의 <사인펠드>나 <프렌즈> <비버리힐즈의 아이들>의 공통점은 1990년대가 박제된 TV 시리즈라는 건데, 20여 년이 지난 지금 새삼 흥미로운 건 등장하는 배우들의 패션이다. 밑위가 긴 물 빠진 청바지와 안으로 쑤셔 넣은 티셔츠, 벙벙한 플란넬 셔츠, 두툼한 스니커즈 등 지극히 중산층적인 패션이 요즘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의 어떤 거리 혹은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의 어떤 카페에서도 그런 차림의 사람들을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빠른 변화의 흐름에 동참하지 않고 안정을 중요시하는 개념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군중 속에서 개성을 강조하며 도드라지기보단 그 군중의 무난한 구성원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다.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오는 안도감을 누리는 것이다. 다소 괴팍한 사조로서 부유하듯 존재하던 이 경향은 뉴욕의 트렌드 예측 회사 ‘K-홀(K-Hole)’에 의해 정의 내려져, 놈코어(Normcore)라는 용어로 언급되고 있다. 이 신조어는 표준을 뜻하는 ‘Norm’과 핵심을 뜻하는 ‘Core’의 합성어로 ‘트렌디한 것들을 따르지 않는 트렌드’쯤으로 이해하면 된다. 중요한 건 생활 방식 전반에 걸친 것이지 패션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
하지만 놈코어의 의미를 가장 빨리 흡수한 건 당연하게도 패션이다.
버락 오바마, 스티브 잡스, 마크 저커버그 같은 이들이 입었던 순진한 옷들이 도리어 패셔너블하게 주목받는 상황 속에서, 소비자는 패션 업계보다 서둘러 움직이며 예전의 것들이 지닌 가치들을 복기하고 평범해지기 위해 애쓴다. 버켄스탁과 테바의 샌들, 팀버랜드의 부츠, 리바이스의 가장 본질적인 데님 팬츠, 파타고니아의 프리스 재킷, 나이키 스포츠 양말 같은 것들이 더 이상 촌스럽게 보이지만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디자이너들은 더욱 영특하게 놈코어를 활용한다. 소박한 티셔츠와 스웨트 셔츠, 낡은 데님 팬츠가 나태하게 존재하는 아페쎄, 샴브레이 셔츠에 복고적인 가죽 재킷으로 지극히 1990년대다운 스타일을 보여준 빌리 레이드, 철저히 촌스러운 것들로 컬렉션을 꽉 채운 시플리&할모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정적이었던 마가렛 하웰 등은 놈코어의 이미지를 오차 없이 보여주고 있다. 아디다스 트랙 수트를 입는 애덤 샌들러나, 더 이상 늘어질 수 없어 보이는 티셔츠를 줄곧 입는 제임스 블레이크, 뉴욕의 관광객처럼 보이는 블러드 오렌지의 데브 하인즈 같은 인물들이 주목받는 것도 현재의 맥락에서 충분히 이해될 만하다.
위키피디아의 정의에 의하면 힙스터의 반대 개념이라고 하지만, 정작 패션 분야에서 소비되는 방식은 힙스터다움을 결정짓는 기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르지 않음을 주장하지만 결국 다름을 은근슬쩍 내비치는 행태랄까. 안티 패션이 결국 패션으로 종결되는 양상이다. 누군가는 놈코어의 본질이 과대 해석되고 있다고 말한다. 1970~1980년대의 가치가 패션을 거쳐 갔듯, 지금은 단지 1990년대의 차례가 온 것뿐이라는 거다. 하지만 놈코어를 단순히 거쳐 가는 패션의 유행으로만 취급하기엔 흥미로운 구석이 꽤 많다. 힙스터처럼 조롱거리로 변모될지, 생활 방식 전반을 이야기하는 문화 현상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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