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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로 읽은 한국 영화산업

<투명사회>란 책이 있다. 현대 사회가 ‘투명성’의 함정에 빠졌다고 주장한다. 유의미한 의견이다. 배웠으면 활용해야 한다. 한국 영화산업에도 이 이론이 적용된다. ‘투명성’이라는 긍정적인 어조에 속은 우리를 꾸짖는다.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UpdatedOn May 28, 2014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투명사회>를 인상 깊게 읽었다. 투명성이라는 긍정적인 이데올로기가 절대적이고 신화가 되면서 자발적인 통제사회를 만들었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다. 예컨대 이런 거다. 자신의 사생활을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 만연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와 같은 사적 정보가 개인을 옭아매는 감시와 규제의 폭력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거다. 아니, 이미 작동하고 있다는 거다.

이념과 세대 간의 갈등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많은 기업들이 자신들에게 복종하는 사원을 선별하기 위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감시’하는 건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아니던가. 투명성을 요구하는 행위가 더 나은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고 차별 없이 정보를 공유해 평등사회를 만드는 것 같지만, 되레 그와 같은 강박이 통제하는 시스템으로 전환하기 수월해졌다는 한병철의 주장은 새겨들을 만하다.

이 시대 모두가 동참하고 있지만 그 어느 누구도 자각하지 못한 사회 작동 시스템을 예리하게 짚어내 ‘투명사회’라는 핵심어로 특별하게 사유하는 그의 시각은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다. 이 저작이 뛰어난 것은 한병철이 주장하는 바가 특정 분야, 즉 정치에만 한정하는 것이 아닌 경제, 문화와 같은 사회 전체를 관통한다는 데 있다. 영화도 예외는 아닐 터.
<투명사회>의 몇몇 대목은 한국 영화계에 대입해도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인다.

가령, 이런 부분. ‘긍정사회는 모든 종류의 부정성을 피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부정성은 커뮤니케이션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긍정사회를 흥행 영화산업으로, 부정성을 예술성 정도로 대입하면 이런 해석도 가능해진다. ‘흥행 영화산업은 예술성을 피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예술성은 영화 흥행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100% 옳은 말은 아니다. 모든 흥행 영화가 예술성이나 작품성이 떨어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이와 같이 무리하게 대입하며 주목하고 싶은 건 영화계가 산업화되고 가치 척도가 관객 수로 ‘투명화’되면서 개성 있는 작품이 현저하게 줄어든 한국 영화의 현실이다. 투자사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제작사의 입김이 세지면서 감독의 예술적인 영역이랄 수 있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흥행을 방해하는 요소로 전락했다. 안 그래도 지난 4월 한국 영화가 기록한 점유율 21.9%는 영화진흥위원회가 2004년부터 입장권을 통합 전산한 이래로 가장 낮은 수치였다.

이를 두고 세월호 참사에 따라 국민이 여흥을 자제하는 분위기와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이하 ‘<캡틴 아메리카2>’)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와 같은 막강한 할리우드 영화의 흥행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보도가 주를 이루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두 가지 점이 작용한 것은 분명하지만, <변호사> 이후로 관심을 끌 만한 한국 영화가 없었던 것도 한국 영화의 4월 점유율이 크게 떨어진 이유인 것이다.

다만 볼 만한 한국 영화가 없었다는 의미에 대해서는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관객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영화였다는 의미일 텐데 그렇다면 관객이 기대하는 영화의 종류는 무엇일까, 따져 물어야 할 것이다. <캡틴 아메리카2>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가 3, 4월의 박스오피스를 주도하는 동안에 개인적으로 판단하기에 볼 만한 한국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성폭행당한 딸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한 공권력을 믿지 못해 사적 복수에 나선 아버지를 다룬 <방황하는 칼날>과 사회적 강자로 구성된 가해의 커넥션에 홀로 맞서는 성폭행 피해 여고생이 등장하는 <한공주> 같은 영화는 이야기의 몰입도도 상당하면서 무엇보다 사회 안전망이 완전히 붕괴된 한국 사회에 유의미한 질문까지 던지는 영화들이었다. 그와 다르게 현란한 시각적 이미지에 많은 공을 들인 <캡틴 아메리카2>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에 압도적으로 관객이 몰렸다는 건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한병철은 투명사회의 병폐 중 하나로 사유하는 힘을 잃어버리게 된 현상에 주목한다. ‘오직 보이는 것에 한에서만 가치를 획득한다. 모든 것을 가시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전시의 강요는 멂의 현상으로서의 오라를 완전히 없애버린다.’ 요 몇 년 사이 흥행하는 영화는 상당수 관객이 해석하거나 생각하게 만드는 대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이야기로 감정을 폭발시키거나 압도적인 스펙터클로 시각을 마비시키는 데만 주력한다.

<방황하는 칼날> <한공주>(다양성 영화치고 이례적으로 관객 수가 20만 명을 넘었지만, 같은 다양성 영화로 분류된 ‘아트버스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69만 명에 비하면 4분의 1 수준이다!)가 평단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캡틴 아메리카2>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에 비해 관객 수가 현저히 떨어진 건 작품성의 유무를 떠나 눈에 확 띄는 (투명한) 스타나 눈을 현혹하는 (투명한) 볼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흥행은 이와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의 노골적인 투명화 전략을 고스란히 수치로 환산해 박스오피스 순위로 전시한다.

평단이 영화에 매기는 가치와 관객의 기대치가 갈수록 평행선을 긋는 건 각자가 투명성을 받아들이는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다. 평단은 볼거리의 일차원적인 전시와 감정의 배설 유도를 작품성의 판단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그에 반해, 제작사와 마케팅 회사는 평단이 상대적으로 크게 가치를 두지 않는 볼거리와 감정적인 부분을 투명하게 노출시켜 관객을 자극함으로써 극장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을 취한다.

그와 같은 반복된 광고 효과가 멀티플렉스와 결합하면서 관객의 사고를 흐리고 즉각적으로 판단하게 함으로써 취향을 단일하게 통제해온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말이 ‘멀티’이지 흥행이 잘될 만한 영화에 상영관을 몰아주는 작금의 멀티플렉스 운영 방식은
<투명사회>의 표현을 빌리자면, ‘평화의 상태가 아니다.’ 멀티플렉스 체인을 소유하고 있는 제작사의 작품이 아닐 경우, 정당한 상영 기회를 보장받지 못하는 게 다양성 영화 대부분이 겪는 불평등의 실태다.

신자본주의가 잠식한 이때, 한국 영화산업이 드러낸 투명성의 폐해 앞에서 관객의 선택은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부러 다양성 영화의 상영관을 찾아가 관객 수를 높여주고 예술적인 안목을 넓히는 것이 한국 영화의 생태계를 위해서나 관객 본인을 위해서도 이롭지만, 특정 영화의 스크린 공세 앞에서 별로 고민하지 않는 것이다. 관객이 영화산업의 불평등에 행동으로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 이런 종류의 관성은 비단 스크린 밖에서만 나타나는 문제가 아니다.

언젠가부터 한국 영화의 적지 않은 수가 감정 소비로 관객을 자극하고 있다. <7번방의 선물>(2012) 때부터 가속화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영화는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기 위해 억울한 누명을 쓴 재소자의 딸이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등 이야기를 서슴지 않고 비약한다. 6세 지능인 아버지와 어린 딸의 이별에 펑펑 눈물을 쏟은 관객은 이에 만족한 나머지 이 영화의 서사가 품은 단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거나 의문을 피력한 의견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에 대한 <투명사회>의 지적-‘전시된 쾌락, 구경거리가 된 쾌락은 쾌락이 아니다. (중략) 전시의 강제는 가시적인 것을 착취한다. 반짝반짝 빛나는 표면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투명하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더 이상 이면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은 직접적으로 한국 영화계를 겨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감정을 1차원적으로 자극하고 볼거리를 앞세워 크게 흥행에 성공한 한국 영화와 이를 대하는 관객의 반응을 대입하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핵심은, <투명사회>의 특정 대목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오늘의 사회를 지배하는 긍정성의 과잉은 이 사회에서 서사성이 사라졌음을 방증한다.’ <7번방의 선물>은 이미 설명한 그대로이고 가장 최근에 천만 관객을 돌파했던 <변호인>도 이상한 서사성으로 관객의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1980년대 변호사 시절을 그대로 차용하면서도 오프닝에는 ‘허구’임을 밝히는 이상한 전략을 취한 것이다.

정치적 이념을 달리하는 세력이 정권을 잡은 탓에 정치적인 시끄러움을 피해가겠다는 의도로 어렵지 않게 읽힌다. 다만 서사에 대한 사실과 허구의 혼란을 의도적으로 야기한 그 투명한 노림수에 비판을 제기한 글은 얼마 되지 않았다. 감정을 자극한 영화에 천만 관객 넘게 호응하다 보니 이 영화의 부정적 의견이 별다른 파급 효과를 갖지 못했다. 이 영화들뿐일까. 흥행이 수치로 전시되며 그 외의 가치가 부정당하다 보니 창작자나 관객이나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감정을 전시할 줄만 알았지 적합한 형식에 담는 법을 잊어버린 것이다.

흥행 수치로 모든 가치가 ‘투명해진’ 한국 영화산업의 폐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무엇이 잘못됐는지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투명사회>에 따르면, 독일어로 ‘존경 (Respekt)’은 ‘돌아보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그래서 존경은 떨어져 있는 시선을 전제한다고 말한다. 물론 감정과 볼거리의 스펙터클을 전시하는 영화도 필요하다. 중요한 건, 그와 더불어 다양성 영화도 공존해야 한다는 점이다.

블록버스터와 다양성 영화에서 둘 사이 거리의 파토스는 우선적으로 체급이 같지 않다는 인식에서 의미를 획득한다. 영화의 개념으로 함께 묶이지만 거대 제작비와 마케팅, 스타로 무장한 블록버스터와 적은 예산을 참신한 아이디어로 돌파하는 다양성 영화는 동일한 조건에서 같은 결과를 낼 수 없다. 이는 누구 하나만 움직인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제작사와 배급사, 감독과 관객 모두 참여할 때 건강한 영화산업을 이룰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지금의 상황이 지속된다면? <투명사회>의 특정 문장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존경할 줄 모르는 사회, 거리의 파토스가 없는 사회는 스캔들 사회로 전락한다.’

Words: 허남웅(대중문화 평론가)
Editor: 김종훈
photography: 조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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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s 허남웅(대중문화 평론가)
Editor 김종훈
Photography 조성재

2014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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