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민 스리피스 수트·타이·포켓치프 모두 아르코발레노 제품.
정재영 더블브레스트 수트는 알프레드 던힐, 흰색 셔츠는
Z 제냐, 타이는 엠 플로린 제품.
스튜디오가 꽉 찬다. 특히 셔터 소리만 들리는 촬영 순간에는 더욱. 정적과 셔터 소리만으로 커다란 정육면체 공간을 채울 순 없다. 널찍한 공간에 두 남자가 끼어든다. 단지 앉아 있을 뿐이다. 서로를 슬쩍, 바라본다. 또는 카메라를 응시한다. 화면 밖으로 시선을 빼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정적의 무게가 한층 무거워진다. 40여 년의 세월을 얼굴에 담은 두 남자의 무게다. 이럴 땐 괜히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진다. 즐거워서다. 카메라에 무엇이 담길지 눈에 훤한 까닭이다. 됐다, 싶을 때 너털웃음이 들린다. 둘의 무게를 견디는 건, 생각보다 짧았다. 금세 두 배우는 두 아저씨로 돌아가니까. 다행이다. 이 무게를 짊어지고 인터뷰하려면 근력부터 키우고 와야 한다. 가벼워진 마음으로 무거운 질문을 던져보기로 한다. 금세 가벼워지겠지만, 아무튼.
영화 제목이 <방황하는 칼날>이다. 처음 들었을 때 무협 영화인 줄 알았다.
정재영 굉장히 세련된, 아니 세련되기보다 허를 찌르는 제목이다. 나도 처음에 들었을 때 내용이 탁 떠오르지 않더라. 방황하는 칼날? 칼날이 방황해? 너무 예술적으로 들렸다. 시나리오를 읽고 나니까 딱 맞아떨어졌다. 개인적으로는 좋은데 상업적으로는 잘….
이성민 여러 의미가 있다. 제목 자체만 봤을 때는 내가 맡은 억관 역에 딱 맞는다. 법을 집행하는 형사 자체가 칼날이니까.
하지만 칼날이 심판이라면, 심판은 아버지도 하는 거고. 그래서 방황하는 거고.
작품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그때 그 순간만의 시기라는 게 있다.
정재영 작품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이 작품은 캐릭터보다 작품이 더 와 닿았다. 인물이 헤쳐가다 결말이, 소위 해피엔딩도 아니고 누굴 구하는 것도 아닌, 좀 뜨뜻미지근한 게 있었다. 끝이 찝찝한 면이, 이런 이야기를 해볼 만한 의미를 줬다.
◀ 이성민 스리피스 수트·줄무늬 셔츠·줄무늬 타이 모두 권오수 클래식 제품.
정재영 스리피스 수트는 보기 밀라노, 체크무늬 셔츠는 조르지오 아르마니, 타이는
엠 플로린 제품.
시나리오를 보니 영화가 관객에게 여러 가지를 묻는다. 도리어 그 질문을 배우들에게 하려 한다. 첫 번째, 우리 사회의 법은 정말 믿을 만한가?
정재영 해도 해도 끝이 안 나는 종교 이야기하고 비슷한 거 같다. 시대와 관점에 따라 달라지니까. 며칠 전에 SF 영화를 봤는데, 혹한기 지구 배경으로 지하 기지에 사는 사람 이야기다. 무슨무슨판 <설국열차>라고 해서 봤는데 속았다, 하하하. 아무튼 거기에선 감기만 걸려도 격리시킨다. 죽이든가 추방시키든가. 전염되면 시스템을 유지할 수 없으니까. 우리 사회에선 말도 안 되지만, 그 상황에 처하면 정말 말이 안 될까?
이성민 영화에서 피해자 상현이 가해자인 아이를 죽인다. 다른 장면에선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아이의 부모가 울고 있다. 정의라는 것은 편의상 정해놓은 것이니까. 조금만 달라지면 변하는 것이니까. 이 영화는 정의라는 것의 정의에 대한 이야기다.
피해자 상현이 복수한다. 말하자면 사적 복수인데, 이쯤에서 두 번째 질문 던진다. 사적 복수는 과연 잘못일까?
정재영 무슨 질문이… <아레나>가 뭐 이렇게 수준이 높나, 하하하. 이건 형사를 맡은 형에게 물어보는 걸로.
이성민 영화에 출연하면서 알게 된 건데, 아이들이 범죄를 저지르면 형량이 가볍다. 큰 범죄를 저지른 애를 잡아봤자 6개월이면 풀려나는데, 애라고 용서해야 할 것인지, 이런 건 좀 고민해봐야 하는 거 같다. 그래서 상현 입장에선 받아들이기 힘든 거지.
시나리오를 보니 사회의 어두운 모습을 직시한다. 이쯤에서 세 번째 질문, 우리 사회는 점점 나빠지고 있는가?
정재영 사회는 점점 편해지고 있다. 대신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더 많이 일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나빠지는 거다. 또 어떤 사람에겐 좋을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에겐 더 나빠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예전 시대로 돌아가자고 하면 안 돌아갈걸?
이성민 환경이 달라진 만큼 다른 식으로 변종된 어둠이 생기는 거 같다. 예전도 완벽한 세상은 아니었고, 2014년도에도 어떤 새로운 악과 차별이 있는 거 같다. 우리 애가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무사히 중학교를 다닐 수 있을까, 답답하고 걱정된다. 그렇다고 내가 중학교 다닐 때는 괜찮았을까? 교문 들어서기도 두렵고, 단추 잠겨 있나 점검하고, 교련복 없으면 엉덩이 빡빡 맞았으니까. 지금은 그러지 않겠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는 거지.
재킷과 셔츠는 모두 에르메네질도 제냐,
타이는 엠 플로린 제품.
시나리오에 ‘요즘 애들을 이해하려고 하지 마’라는 대사가 나온다. 네 번째 질문, 요즘 애들은 도통 알 수 없다? 둘 다 아버지니까!
정재영 요즘 애들은… 원래 어른은 애를 모른다. 우리 어릴 때도 그랬다. 어른이 되면서 세대가 바뀌니까 또 변한다. 일단 걔들이 껴주지 않으니까 알 수 없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니까 어쩔 수 없다. 그냥 이해하는 척하는 거지.
이성민 지금 우리 딸애가 사춘기다. 오늘 아침에도 집사람과 애가 싸웠다. 매일 싸워. 요즘 모든 게 부정적이고 짜증나는 거다. 그런데 나도 어릴 때는 그랬다. 애는 미숙하니까. 하지만 어떻게 대하느냐는 어른 책임이다. 부모가 좀 더 관심을 쏟아야 한다.
왠지 두 사람 다 살가운 아버지는 아닌 거 같다.
정재영 남자애들이라 앞으로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나 강하게 살아남아야 한다고 막연히 생각한다. 강하게 키워야겠다는 태도가 은연중에 깔린다. 딸이라면 다르겠지. 그렇게 안 살면 어때! 내가 영원히 품에 안고서 굶어죽게 하지 않을 거야, 하하하.
이성민 나는 딸 하나인데, 확실히 그런 마음이 있다. 집사람한테 우리가 집을 좀 큰 걸 지어서 애들 데리고 살면 되잖나, 이런다. 장인어른이 집 사주면 좋지 않아? 아들이었다면… 나가 살아야지! 하하.
아버지로서 배우란 직업이 어떤가? 일반적인 직업은 아니잖나.
이성민 난 애가 어릴 때부터 걱정했다. 일반적이지 않으니까. 아빠가 특이한 일을 하는 것을 인지하는 게 좋은 것 같아서 그에 관해 많이 얘기했다.
정재영 다른 부모는 학생과 같이 쉰다. 우린 그렇지 않으니까.
음, 중요한 시기에 정서적 교류가 단절될 순 있겠다.
이성민 초등학교, 중학교 때 운동회 같은 데 못 갔는데 한 번 가니까 애가 그렇게 좋아하더라. 집에 없을 때야 못 가지만, 이젠 학부모 회의도 웬만하면 간다.
정재영 집에 있으면서 안 가는 건 뭐야. 당연히 가야지. 지방 촬영 갔으면 모를까, 하하하.
이성민 지금도 집에 있으면 딸아이를 학원에 데리러 간다. 딸아이도 내가 데리러 오는 걸 좋아한다. 내가 뭐라도 사주니까.
정재영 난 아주 간혹 데리러 가면 애들이 놀라더라고. 엄마에게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가면 묻는다. 엄마는? 하하하.
재킷·셔츠·타이 모두 갤럭시 제품.
배우 정재영, 배우 이성민, 이러면 다 멋있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 정재영, 인간 이성민은….
정재영&이성민 하하하. 우린 아주 평범하다.
정재영 스티브 잡스 하면 우와, 이러지만 집에선 어떨까? 집에서 변태인지 뭐하는지 아무도 모를 거 아닌가. 누구나 마찬가지다. 뭐. 일부러 밖에서 배우라고 멋있는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는 강박이 있지도 않다.
이성민 어릴 때 애에게 TV에 나오는 아빠 모습은 연기고 판타지라는 걸 일찍 심어줬다. 지금은 내가 각인을 시키지. 아빠 배우야, 사인 받는 사람도 있어, 이렇게, 하하하.
배우로서 잘생기고 멋있는 외모는 아니다.
정재영 좀 전까지 멋있다고 그러더니! 하하하.
그거야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면에서 멋있다는 거고. 배우로서 외모적으로 아무래도 평범…. 그래서 더 좋은가?
정재영 이번 생에 평범한 얼굴로 살았으니 다음 생에는 깜짝 놀랄 얼굴로 태어나서! 하하하. 잘생긴 배우가 돼보지 못해서 어떤 심정인진 모르겠다. 뭐든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 <역린>을 현빈과 같이 찍었을 때, 평범하게 하고 같이 곱창집에 간 적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동네 아주머니들이 다 오시더라. 더 이상 술자리를 이어 나갈 수 없었다. 불편한 거다. 어떤 것이 좋은지는 모르겠다. 평범한 내가 더 만족스럽다.
이성민 난 워낙 개성이 없어서 딱 보면 캐릭터가 어울리는, 개성 있는 외모의 배우들이 부러운 적이 있었다.
어릴 때 한 선배가 어떤 일을 하든 10년 정도 해봐야 알 수 있다고 했다. 10년을 훌쩍 넘기며 연기해봤는데, 어떤가?
이성민 연기는 세월이 지난다고 나은 것도 아니다. 그냥 현재 시점으로, 내가 지금 뭐가 부족하고 무엇을 더 배워야 하는지,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런다. 이제 와서 직업을 안 바꿔도 되는 위치에는 감사한다.
정재영 선배가 10년을 하고 나면 그 의미를 알게 되어서 그런 이야기를 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10년이 되면 그런 것들이 궁금하지 않게 되는 시점이란 말 아닐까. 나도 그랬다. 어릴 때는 연기가 뭐냐? 어떻게 하면 잘할까? 이렇게 결론을 내리려고 했다. 정답을 내려야 시원하고 목표가 생긴다고. 10년을 하면 그런 생각 자체가 잘못됐다는 걸 안다. 어떤 일을 10년 이상 한다는 것은 복이다. 나든 주변 사람이든 감사해야 할 일이다.
photography: 김태선
editor: 김종훈
STYLIST: 신래영(정재영), 김은주(이성민)
HAIR: 김영주(정재영), 강연진(이성민)
MAKE-UP: 김영주(정재영), 이수(이성민)
ASSISTANT: 박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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