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y 서영진, 이재안 Editor 이지영
영화 속에 나오는 뉴욕만을 떠올리면서, 센트럴파크와 타임 스퀘어가 뉴욕의 전부일거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혹은
일단 여행 책자부터 바로잡자. 물론 영어에 서툴고, 뉴욕 자체가 처음인 이들에게는 한국어 가이드북이야말로 친절함의 극치일 테지만, 때가 어느 때인가. 우리는 모두 지구 어느 곳에 떨어져도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을 정도는 된다. 타고난 길치라고 해도, 영어에 남다른 소질이 없다고 해도 이는 부인할 대목이 못 되니 변명 따위는 이쯤에서 접어두자. 특히 뉴욕은 스트리트(ST)와 에버뉴(AV) 개념만 익히면 어디든 찾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행정 구역 정리가 확실하게 되어 있는 도시다. 그러니 심각하게 감이 떨어지는 무센스일지라도, 뉴욕 정도는 쉽사리 찾아다닐 수 있다.
일단 뉴욕에 도착하거든,
Brooklyn
‘브루클린이 뜬다’는 말이 패션 피플 사이에서 오가게 된 건, 사실 꽤 오래전의 일이다. 엄밀히 말해 약 3년 전쯤부터 맨해튼의 예술가들은 브루클린(이하 베드포드, 윌리엄스버그, 그린포인트를 지칭한다.)으로 ‘처박히길’ 원했다. 이제 더 이상 시끌벅적한 맨해튼에서, 그것도 엄청난 임대료를 매달 지불해가면서 살고 싶지 않다는 얘기였다. 한없이 자신을 드러내길 원하지만, 마음속 또 다른 한편엔 제발 좀 조용히 살고 싶다는 것이 이들 예술가들의 이중 심리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브루클린은 ‘뜬 동네’가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베드포드는 무엇보다 맨해튼과 무척이나 가깝다. 맨해튼에서 L트레인을 타고 한 정거장이면 닿을 수 있으니, 맨해튼이 아니면서도 맨해튼을 제 집 드나들 수 있는 ‘약은 동네’인 셈이다. 그러니 이곳에 자리 잡은 아티스트들은, 적당히 숨어 살면서도 마음 내키면 언제든지 맨해튼으로 뛰어나가 한 번쯤 도시의 번잡함을 맛볼 수 있다. 어찌됐든 100% 백인 동네로 알려졌던 이곳은, 여기저기서 뜨내기들이 들어오면서 이제는 어느 정도 모습이 바뀌게 되었다. 에단 호크가 홀로 틀어박혀 <웬즈데이>라는 소설을 썼다는 카페는 어느새 관광객들의 명소가 되었고, <섹스 앤 더 시티>에 등장했던 ‘SEA’라는 타이 푸드 레스토랑 역시 패션 피플의 가장 시크한 명소로 손꼽히게 되었다. 하지만 이토록 알려질 대로 알려진, 변할 대로 변모한 브루클린일지언정 예전 브루클린의 향취가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제아무리 맨해튼의 여피족들이 우르르 몰려와 기껏 ‘기분 전환’ 용으로 이곳을 어지럽힌다 할지라도, 브루클린은 여전히 조용하기만 하다. 도저히 참기 힘든 맨해튼의 경적과는 달리, 브루클린의 아침과 점심, 그리고 평일의 저녁은 상대적으로 고요하다. 해가 뜨고, 해가 지도록 좋게 말해 ‘한량’인 아티스트들이 거리에 나앉아 기타 치며 노래를 부르는 게 전형적인 브루클린의 표정이다. 비록 새로 생긴 온갖 클럽들 탓에 더욱더 시끄러운 주말 밤이 되었다 할지라도, 사실상 브루클린은 예전에도 그렇게 동이 트도록 술을 마셔대는 젊은이들로 북적거리곤 했다(아마도 이른 아침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보다는, 밤낮이 자유로운 아티스트들의 동네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느 순간 상업화된 이곳이지만 여전히 주말이면 자신의 온갖 물건들을 가지고 나와 아무렇지도 않게 길에 나앉아 팔 수 있을 정도의 여유는 여전하다. 대개 베드포드, 윌리엄스버그, 그린포인트를 따로 관광하겠다는 다소 어리석은(?) 여행 계획을 세울 수 있겠으나, 이 세 동네는 그저 강가에 물 흐르듯 설렁설렁 이어서 걸어주면 그만이다. 베드포드 애버뉴를 기점으로, 왼쪽으로 계속 걷다보면 브루클린 브리지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계속 걷다보면 만나는 동네가 윌리엄스버그다. 물론 몇 블록 더 걸어가면 나오는 동네가 그린포인트다. 베드포드, 윌리엄스버그, 그린포인트로 갈수록 동네는 점점 조용해지니, 혼자 걷기 다소 고독할 수 있겠으나 ‘브루클린의 침잠’을 맛볼 수 있는 기회는 오직 이때뿐이다. 맨해튼의 시끄러운 소음에서 벗어나, 여행 중 온전히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계기 역시 브루클린이 줄 것임은 두말할 필요 없다. 뭐든지 빠른 것에 지친 분들에게, 이 느릿한 곳을 권한다.
Nearby Subway Stops
Long Island City
롱아일랜드 시티를 찾는 목적은 꽤나 선명히 갈린다. P.S.1 MoMA를 방문하는 것. 그리고 정말 멋들어진 그라피티가 수놓인 로프트 5Pointz를 찾는 것이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이 두 곳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다는 것과,
두 건물의 기능과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먼저 P.S.1 MoMA부터 소개한다. P.S.1 MoMA는 MoMA가 수리 중 일 때 그곳을 대신해서 생긴 컨템포러리 아트 센터다. MoMA가 재개관에 들어갔지만 여전히 이곳은 본래의 MoMA 성격을 그대로 이어받은 채 유지되고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MoMA에 비해 조금 더 시험적인 작품들이 전시된다는 것. 결국 MoMA에 가는 것이 작가들의 최종 목표라고 봤을 때, P.S.1 MoMA는 그 이전에 발랄한 재능을 한껏 펼칠 수 있는 공간으로 십분 활용되고 있는 셈이다. 학교를 개조해서 만들어진 이곳은, 그래서인지 학교라는 공간에서 느껴지는 고루함과 가능성을 동시에 선사한다. 갈색 마룻바닥과 나무 미닫이문이 이곳의 성격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5Pointz는 감히 단언컨대 뉴욕에서 최고로 멋진 그라피티를 감상할 수 있는 건물의 이름이다. 모든 집단 예술 행위가 그러하듯, 이곳 역시 그라피티를 하는 작가들이 하나 둘씩 모여 이곳에서 자신의 재능을 뽐내기 시작했다. 다행인 것은, 건물의 주인 역시 이들의 그러한 행위를 반겼다는 것. 수도 없는 그라피티 작가들이 모조리 이 건물에 하나 이상의 그림을 남겼다. 역사는 15년. 건물의 용도는 여전히 아티스트들의 작업실로 이용되고 있다. 혹자는 이 건물을 두고 ‘살아 있는 그라피티의 콜라주’라고 표현한다. 뉴욕을 방문한 김에, 멋들어진 사진 한 컷 건지고 싶은 이에게 권한다. 이곳에서는 모든 사진이 근사한 화보가 된다.
첨언 하나! 성격부터 외양까지 전혀 다른 두 곳이 길 하나를 마주하면서, 두 건물의 신경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P.S.1 MoMA는 5Pointz 때문에 자신들의 건물이 가려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다고 불만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5Pointz는 오늘도 P.S.1 MoMA을 찾는 관람객의 대부분을 그 근사한 위용으로 유혹하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5Pointz의 전경은 P.S.1 MoMA의 옥상에서 건너다 봤을 때 가장 멋지다는 것이다. 게다가 옥상은 무료 개방되니 사실 이는 5Pointz에게 반가운 뉴스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롱아일랜드 시티를 찾는 이들에게 이 두 건물은, 우연히 마주친 뜻밖의 행운처럼, 1석2조의 만족을 준다.
Nearby Subway Stops
7, G at 5th Rd./Courthouse Square
E, V at 23rd St./Ely Ave
Meatpacking
때로 패션 피플의 취미는 무척 요상해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요소를 가능한 조합으로 꾸며내곤 한다. 뉴욕에서 가장 핫한 동네라 불리는 ‘미트패킹(meatpacking)’이 바로 그곳. 말 그대로 ‘미트패킹’은 도살장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런 곳이 지금 뉴욕에서 가장 핫한 레스토랑과 클럽이 밀집된 지역이 되었다. 그러니 이 얼마나 해괴망측한 일이냔 말이다. 무엇이든지 ‘멋있게’ 꾸밀 줄 아는 이들은, 맨해튼의 허름한 도살장을 엄청난 오라가 풍겨나는 클럽으로 만들어냈다. 간판도, 그 어떤 두드러진 문구도 눈에 띄지 않지만, 아니, 아직도 외관만 보면 도살장 그 자체이지만 들어가보면 음악 소리 꽝꽝 울리는 클럽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그것이야 말로 진짜 멋’임을 내세운 이들 덕분에 ‘미트패킹’은 지금 맨해튼에서 가장 핫한 동네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런 ‘미트패킹’을 둘러싼 일화는 많다. 어느 때 부턴가 알게 모르게 맨해튼의 물 좋은 장소로 꼽히게 된 이곳에 마치 서울의 청담동만큼 셀레브러티의 발길이 이어졌다는 것.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이 곳에 위치한 레스토랑에서, 클럽에서 어렵지 않게 할리우드 스타를 만나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인가. 그 이름도 유명한 ‘미트패킹’이다. 서부에서나 환대받는 패리스 힐튼이 이곳에 와서까지 자신을 먼저 들여보내주지 않는다고 난동을 부렸다는 얘기는 이미 너무나 유명해진 일화다. 니콜 키드먼과 스칼렛 요한슨 역시 모 카페에서 VIP룸에 들여보내주지 않는다고 꽤나 불평을 했다는 얘기가 있다. 그만큼 ‘미트패킹’의 자부심은 오늘도 여전하다. 어찌됐든 이곳엔 투박해서 오히려 세련된(?) 레스토랑과 클럽과 부티크가 한데 모여 있다. 하지만 마치 유럽을 연상시키는 돌계단만이 이곳이 맨해튼 최고의 동네임을 알려줄 뿐, 여전히 도살장의 느낌은 그대로인 것을. 혹자는 이곳을 향해 “패션 피플들이 피가 묻은 앞치마를 두른 동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비록! 수많은 동물들의 죽어가는 소리가 들릴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미트패킹’을 향한 패션 피플들의 사랑은 계속될 예정이다.
Nearby Subway Stops
A, C, E at 14th St.; L at Eighth Ave
Dumbo
역시나 공장 지대인 이곳에서 우리가 느껴야 할 것은 예술가들의 고된 삶이다. 일찍이 소호의 예술가들이 하나 둘 그곳의 상업적인 변화(와 동반된 임대료 상승)에 못 이겨 이주한 곳이 바로 이곳 덤보이기 때문이다. 공장을 대충 개조해 자신들의 작업실로, 거주지로 쓰면서 그들은 삶의 고단함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혹은 그도 아니면, 강 건너 이 곳 덤보로 이주해오면서 꽤나 편안한 영혼의 안식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일단 덤보는 맨해튼에서 이주해온 예술가들의 동네인 만큼, 공장 건물 전체가 그들의 작업실로, 갤러리로 개방된 곳이 많다. 첼시의 갤러리들이 그림을 사고 파는 백화점이라고 한다면, 덤보의 갤러리는 오히려 그들이 거주하는 삶의 공간에 가깝다. 자신의 작품을 내걸 공간이 맨해튼에는 절대적으로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예술가들이 ‘내 작업실로 오라’는 초대의 개념을 도입한 곳이 이곳 덤보의 로프트들이다. 문득 발길이 가는 로프트라면 그냥 무작정 들어가 그들의 작품을 감상해보는 것도 꽤나 자유로운 그림 읽기의 한 방법. 그도 아니면 덤보 자체의 분위기(돌이 깔린 바닥과 아직 남아 있는 커다란 공장들)를 느끼거나, 강 건너 보이는 맨해튼을 감상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유독 덤보에서는 브루클린 브리지가 가깝다. 또 맨해튼 브리지, 윌리엄스버그 브리지 또한 동시에 볼 수 있다. 덤보에서 바라보는 맨해튼은, 그 느낌이 꽤나 색다르다. 조금 덤덤한 느낌이다.
Nearby Subway Stops
A, C at High St, F at York St
Harlem
흑인의 위상이 변한 것처럼, 지금의 할렘 역시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의 외양이 얼마나 확연한지, 때로 오늘의 할렘은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는 남대문 시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미 할렘의 번화가인 125St 에서 136St 즈음에는 커다란 에이치엔엠(H&M)과 올드네이비(OLDNAVY)가 들어섰으며 이는 할렘 특유의 에고와 어울릴 듯 겉도는 듯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할렘의 분위기를 아우르는 건, 흑인 언니 오빠들의 강력한 포스와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찐득한 솔(soul)이다. 섬뜩한(?) 경험일는지 몰라도 유모차에 담아온 약을 팔고 사는 모습을 발견한다거나, 사방이 방탄유리로 막혀 있는 파파이스에서 치킨을 주문해보는 일 역시 오로지 할렘이기에 가능한 경험이다. 때로 ‘코로우’라 불리는 ‘블레이딩’을 연출해보고 싶다면, 주저 말고 이들의 헤어 살롱에 들어가길 권한다. 두툼한 손이 쉴 새 없이 돌아가면서 이뤄지는 이들의 행위(?)는 하나의 문화요, 예술이다. 꽤나 퉁명스러운 레코드점에서 가스펠 음반을 구입한다든지,
‘솔 푸드’를 맛본다든지 하는 행위 역시 할렘에서 한 번 쯤 경험해보면 좋을 행위들이다. 길을 걷다보면 보란 듯 소화전을 터뜨려 물장난을 하는 그들 덕분에(?) 온몸이 물에 젖을 수도 있겠으나, 오늘의 할렘을 관찰하는 일은 분명 의미 있다. 진보와 보수를 동시에 경험해보는 일은, 언제나 흥미로운 법이니까.
Nearby Subway Stops
1,2,3 at 125 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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