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근영의 <타심통>
장근영은 심리학자다. 하지만 딱딱한 심리학자가 아니다.
게임 <리니지>를 소재로 심리학 논문을 발표하고, 영화를 보고 심리학 칼럼을 쓴다. 대중문화와 사회현상을 심리학이라는 큰 바탕 속에서 유연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매달 바라볼 거다.
추운 겨울, 소위 명품 패딩이 다시 유행이다. 몇 년 전까지 이 나라의 ‘중·고딩 교복’이었던 노스페이스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캐몽(캐나다 구스와 몽클레르의 합성)’ 정도는 입어줘야 한다.
근데 이것들이 대부분 기본 1백만원을 넘어간다. 물건 자체가 멋지다면 또 이해할 수 있지만, ‘캐구’의 디자인은 그저 둔탁한 방한복이다. 그냥 봐서는 도무지 1백만원이 넘는 물건으로 보이지도 않는다(실제로 캐나다 현지에서는 비싸긴 해도 그 정도는 아니다). 뭐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어쨌거나, 예전에 ‘돕바’나 ‘누빔 옷’을 입고 다니던 사람들 겨울옷 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그런데 이런 급수가 상승하는 건 옷만이 아니다. 먹는 것, 보는 것, 타는 것에 사람들의 기대와 감각이 모두 높아지고 있다.
가장 최근에 들은 사례는 초등학교의 반장 명칭이었다. 이제는 회장이라고 부른단다. 그리고 예전 부반장이 이제 반장이고. 그럼 예전 회장은? 전교회장이란다.
예전이라면 허파에 바람 들었다며 핀잔이나 받을 일들이다. 이게 다 돈이 남아돌고 삶의 수준이 높아져 벌어지는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아 보인다는 게 문제다. 2012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가처분소득 대비 가구당 부채 비율은 150%를 넘었다. 버는 것보다 빚진 것이 더 많다는 얘기다. 부동산 때문이라고? 그 부동산 빚은 어쩌다 생겼는지 생각해보시라. 투기를 제외하더라도 결국 남들 사는 것만큼 좋은 동네에서, 그만큼 큰 집에서 살려다 보니 그리 된 것 아닌가? 내가 버는 것에 비해 더 많이 소비하는 일, 분수를 넘는 허영이 일부 젊은 것들의 헛바람이 아니라 나라 전체의 현상이 된 거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한국은 매우 좁은 사회다. 한 사회가 얼마나 좁은지 혹은 넓은지를 어떻게 알 수 있냐고? 1967년에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S. Milgram)이 구체적인 측정 방법을 제시했다. 그는 사회의 넓이란 결국 사회 구성원들 간의 관계 마디 수로 알 수 있다고 봤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는 네브래스카의 오마하, 캔자스의 위치타 같은 미국 중부 지역 사람들에게 편지를 하나씩 주고 매사추세츠 주의 섀론이라는 곳에서 의류상을 하는 ‘제이콥스 씨’에게 전달해달라고 요청했다.
단, 그 편지를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을 통해서만 전달해야 했다. 밀그램은 이 실험을 하기 전에 주변 전문가들에게 미국 중부에서 서부까지 수천 킬로미터 거리를, 그것도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알음알음으로 편지를 전달하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거쳐야 할까 물어봤다. 대부분은 비관적이었다. 편지를 전달할 가능성 자체가 낮고, 혹여 전달한다면 최소한 1백 명은 거쳐야 할 거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실제로 많은 편지들이 중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여러 번 실험해본 결과 대략 15~20% 정도의 편지가 실제로 목적지에 도착했고 그 편지들이 거친 사람들의 숫자는 평균 6명이었다.
그 이후 이 실험은 작은 세상 실험, 혹은 6단계의 (사회적) 분리로 널리 알려졌다. 결론적으로 밀그램이 측정한 미국 사회의 넓이는 6단계였다. 평균적으로 6명만 거치면 어떤 사람과도 아는 사람이라는 이야기였다. 40년이 지나고, 정보화 사회가 도래한 다음에도 미국인의 사회적 거리는 별로 좁혀지지 않았다. 2003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이메일을 사용해 같은 실험을 되풀이했을 때도 여전히 미국 사람들은 6단계로 분리되어 있었다. 심지어 편지가 전달된 비율은 3%대로 떨어졌다. 정보화가 사람들의 거리를 좁혀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많이 분리시킨 것 같았다. 물론 이 거리는 SNS 덕분에 조금 좁혀진 것 같기는 하다.
최근 페이스북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적어도 페이스북 유저 간의 사회적 거리는 4.5단계 내외란다. 페이스북이 원래부터 하버드 대학교 인맥을 자랑하기 위한 사이트였음을 잊지 마시라. 페이스북 유저 간의 사회적 거리는 당연히 좁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어떨까? 2005년에 연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에서 조사했더니 평균 3.5단계가 나왔다. SNS로 좁혀놓은 미국 사회의 거리보다 한국 사회의 넓이는 한 차원 더 좁단 얘기다. 그렇다면 이렇게 좁은 사회는 넓은 사회에 비해 뭐가 다른가?
넓은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외로움을 많이 느낀다. 하지만 좁은 사회에서는 간섭을 당하거나 혹은 소외감을 느낀다. 넓은 사회에서는 남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드문 일이다. 하지만 좁은 사회에서는 거의 언제나 나와 비교할 수 있는 누군가가 주변에 보인다. 당연히 서로 참조하게 되고, 모두가 서로 영향을 받는다. 애초에 밀그램 실험의 개념 틀을 제시한 학자들은 이를 ‘접촉과 영향’이라고 표현했다.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는 ‘근묵자흑’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말이다. 그래서 생기는 장점은 덕분에 전반적으로 세련되게 변해간다는 거다. 참조물이 많아질수록 스스로 평가하고 조금이라도 더 다듬어지기 마련이다.
아마 전 세계에서 한국 여성들이 평균적인 화장 기술은 가장 세련될 거다. 패션의 수준도 역시 내가 다녀본 나라들 중에서는 한국이 단연 최고였다. 단점은 획일성이다. 적어도 10년 전까지는 어딜 가든 한국에서 온 남녀는 너무 비슷해서 눈에 띄었다. 헤어스타일, 걸친 아이템들의 구색, 그걸 걸치는 방식까지 한국인 특유의 스타일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떤 유행이 전국을 휩쓰는 데 얼마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그 유행이 사그라지는 데도 역시 얼마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발달심리학자의 관점에서 좁은 사회의 가장 큰 단점(혹은 특징)을 말하자면, 개인으로서 늦게 발달한다는 거다. 아시아 문화권의 사람들은 ‘집단주의’인 반면, 유럽 문화권 사람들은 ‘개인주의’라는 이분법은 오래전부터 사회과학자들에게 익숙하다. 실제로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는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아시아 문화에는 오랫동안 ‘개인’ 이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하다. 일본인이 개항 이후 서양의 책을 번역하면서 제일 고심한 단어가 바로 이 개인(idividual)이었다. ‘남과 분리된 주체로서의 자아’를 뜻하는 이 단어에 상응하는 자기네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개인’은 그네들이 고심 끝에 발명해낸 신조어였다. 공동체와 무관한 인간이란 개념 자체를 생각할 수 없었던 거다.
이렇게 집단을 중시하는 문화에서는 나만의 감정, 나만의 생각, 나만의 취향이라는 걸 개발하기가 어렵다. 이런 게 모이고 쌓여야 개인으로서 ‘자아’라는 게 만들어지는데 말이다. 우리 사회는 개항 이후 1백여 년이 지났지만 집단주의의 전통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인터넷 댓글들을 봐도 그렇다. 악플을 남기는 이들은 대개 ‘국민 정서’를 사용한다. 내 감정이 아니라 막연한 타자의 모임인 국민의 감정을 자신이 대변하는 거다. 이렇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건 우리 사회의 기본 특성 중 하나다.
최근 인문사회 분야에서 라캉이 유행하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거다. 그 양반이 내놓은 멋진 말 중의 하나가 ‘인간의 모든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인데, 우리 사회야말로 이 말에 딱 어울리는 사회가 아닌가.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기보다는 보편적 취향에 맞추려 들고,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표현하기보다는 보편적인 감정에 편승하려 들고, 스스로 생각하기보다는 누군가의 생각을 차용하는 것에 길든 우리에게 라캉의 이 말은 “너만 그런 게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이 다 그래. 그러니까 안심해”라는 위안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다시 사치품 소비로 돌아가자. 나는 사치품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 자신부터 사고 싶은 물건들을 잔뜩 품고 있는 장래의 ‘된장남’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럭셔리 신드롬>의 저자 제임스 트위첼(J. Twitchell)은 사치품에 대한 열망은 그 형태만 다를 뿐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열망의 본질은 결국 삶의 질을 더 높이려는 소망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루이 비통이나 에르메스 가방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이, 하드커버의 희귀 서적 초판본을 볼 때 느끼는 자신의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거다. 왜냐하면 사치품은 모두 오랜 시간 동안 결점을 보완하고 한계를 극복하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낸 존재이고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삶도 그 수준에 도달했음을 의미하는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즉, 사치품은 말 그대로 나를 드러내는 방법이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을 자아의 표현이라고 말하기에는 한국의 사치품 소비는 지나치게 평균화되고 타자 지향적이라는 점이다. 원래 사치품을 통한 진정한 만족은 나 혼자만의 것이다. 누구에겐가 보여주고 인정받아야 만족하는 건 진정한 만족이 아니다.
오히려 개나 소나 내 물건을 알아보면 나만의 즐거움을 빼앗기는 셈이었다. 그래서 소위 명품 브랜드의 최고가 라인들은 예로부터 자기 브랜드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브랜드 로고를 찾으려면 숨은그림찾기를 해야 할 정도였다. 그 물건을 구입하는 이들은 비싼 물건도 남이 사지 않는 것을 찾고, 남이 알아채지 못하게 소지하고 다니고 싶어 했다. 자기만의 개성이 먼저 드러나길 바란 것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 내 사치품 소비는 정반대다. 모두가 ‘머스트 잇 아이템’을 찾는다. 그거 안 사면 왕따 되는 것처럼, 모두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브랜드를 구입하고 같은 차를 사고 같은 곳에서 밥을 먹으려 든다. 그리고 모두가 이렇게 같은 취향과 기준에 따라 움직일 때, 사치품 소비는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그저 경쟁으로 전락한다. 고만고만한 브랜드 범위 내에서 누가 더 비싼 것을 사나, 누가 한정판을 차지하는가 하는 끝없는 에스컬레이트만 있을 뿐이다.
‘머스트 잇 아이템’이라니. 이 세상에 파는 물건 중에 ‘머스트 잇’ 따위는 없다. 비싼 물건일수록 더욱 그렇다. 사도 그만 안 사도 그만일 때 그게 진정한 사치품이다. 고로 남의 표준에 맞추려 들기보다는 내 취향, 내 가치관을 찾는 게 우선이다. 그러고 나면 ‘돈지랄’을 해도 어디다 할지 정할 수 있다. 진정한 사치는 그게 무엇이든 내 취향을 만족시키는 사치다. 그러려면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고 그에 확신이 있어야 한다. 자아의 발견 없는 사치는 그저 ‘돈지랄’일 뿐이다.
Words: 장근영(심리학 박사)
Editor: 김종훈
ILLUSTRATION: 이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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