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Y 배정희 Editor 박만현
송지오, 파리를 입다
패션을 꿈꾸는 디자이너에겐 늘 그렇지만 송지오에게도 파리는 매우 특별한 의미다. 20대 청운의 꿈을 안고 디자이너의 기초를 닦던 도시가 바로 파리였기 때문이다. 그는 2007년 여름 이 도시에 디자이너로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의 감각은 파리에 사는 디자이너보다 더 파리지앵적이다. 그의 컬렉션이 열렸던 파리의 6구에 위치한 클럽에서 만난 송지오는 서울의 압구정동 그의 매장에서 만났던 모습과는 또 다른 포스를 보여줬다. 이제 파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가장 파리스러운 옷을 창조하는 디자이너는 요지 야마모토도 그렇다고 가와쿠보도 아니다. 바로 코리아에서 날아온 지오임을 말이다.
이번 2008 S/S 컬렉션의 콘셉트는?
1900년대 초는 한마디로 혼돈의 시대였다. 또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설레임도 이 시대를 지배한 분위기 가운데 하나였다. 사회는 발전하고 있었고, 그 발전의 원동력은 전쟁과 광기를 오가며 그 속에서 발전하는 로맨티시즘이었다. 한마디로 낭만과 열정의 시대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시대를 산 광인을 이번 컬렉션의 뮤즈로 삼았다. 컬렉션을 앞두고 영감을 얻으려 들췄던 책 속에 자리 잡았던 빛바랜 흑백 사진들. 그것들이 나에게 항상 영감을 주었다. 마치 그 혼돈의 시대에 내가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이 되었고, 그 놀라운 느낌을 이번 컬렉션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이번 2008 S/S 파리 컬렉션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설명한다면?
이번 2008 S/S 송지오 캣워크에 선 모델은 빛바랜 사진 속에나 존재하는, 전쟁에 끌려간 소년병의 현대 버전이다. 나만의 감성으로 재해석해 블랙과 화이트 컬러를 기본으로 심플한 믹스&매치를 보여주었다. 화이트 컬러 리넨 재킷과 다다이즘을 형상화한 프린트 티셔츠, 거기에 심플한 팬츠가 리드미컬하게 표현되었고, 자칫 지루해 보일 수 있는 룩에 골드 주얼리를 매치함으로써 색다른 재미를 주었다. 거기에 테일러링을 강조한 베스트에 슬림한 실루엣의 팬츠를 가미해 송지오만의 실용성까지 더했다.
10년 후쯤 파리에서 계속 쇼를 한다면 당신은 어떤 디자이너가 되어 있을까?
글쎄. 적어도 단거리 경주는 아니다. 난 나의 질주를 외로운 마라톤 경주라 생각한다. 힘들어 지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도 포기란 없다. 완주할 것이고, 이왕이면 결승 테이프를 끊을 땐 좋은 성적을 받고 싶다.
사실 실용적이고 미니멀한 송지오 컬렉션은 파리보다는 밀라노가 더 어울린다. 나중에 콘셉트에 맞게 다른 도시로 옮길 생각은 있는가?
파리, 밀란, 뉴욕 세 도시를 놓고 고민을 많이 했다. 다만 파리는 나에게 언어와 업무 진행에 익숙하고 유리한 곳이다.
이번 프레젠테이션은 비주얼 아티스트와 작업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비주얼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비주얼 아티스트 별, 박창용 두 젊은이가 쇼의 콘셉트를 잘 표현해주었다. 어떤 형식이나 틀에 구애받지 않는 나의 자유로움과 다다이즘을 기본으로 제작하였다.
당신이 프레스나 바이어라고 가정했을 때 파리에서 보고 싶은 패션쇼를 말해달라.
최근 남성복 컬렉션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디올 옴므 쇼, 하우스의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최대한 살려 매 시즌 성공적인 쇼를 선보이는 이브 생 로랑, 자신만의 독창적인 컬렉션을 추구하는 꼼 데 가르송, 마지막으로 30주년을 맞이한 발렌티노 쇼를 꼭 봤을 것이다.
좀처럼 시도되지 않았던 컨템포러리 아트(Contemporary Art)와 패션을 접목한 그의 컬렉션은 새롭고 신선했다. 불혹의 나이가 훌쩍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20대 못지않은 패기와 열정으로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패션 디자이너 송지오. 벌써부터 그의 다음 컬렉션이 기대된다.
난, 우영미다
2007년 7월 1일 17시 42분. 세계 패션의 중심 파리에서 대한민국 패션 파워를 만천하에 알린 우영미 컬렉션이 폴딩 아키텍처라는 콘셉트로 시작되었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이름에서 자연스럽게 ‘영’국과 ‘미’국을 통합하고, 야심차게 패션의 종주국인 프랑스 파리까지 접수한 위풍당당한 그녀. 파리가 인정하고 세계가 주목한 그녀의 11번째 컬렉션을 <아레나>가 찾아갔다.
이번 2008 S/S 컬렉션의 콘셉트는?
인비테이션이션을 통해 느끼고 보았겠지만, 폴딩 아키텍처(Folding Architecture:건축의 형태와 폴딩 시스템을 결합해 다각도로 표현한 형식, 소피아 비조비티(Sopia Vyzoviti) 책에서 영감을 받았다)다. 조금 자세하게 말하자면 건축가가 만든 종이 접이 책을 보면서 이번 쇼의 주된 콘셉트를 정하게 되었다. 나는 건축가들의 작품에서 영감을 많이 받는 편인데, 옷을 제작하는 과정과 건물을 설계하는 과정을 비교하면 패션과 건축은 하나의 큰 맥을 따른다. 언젠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와 생각이 비슷한 건축가와 컬렉션을 함께해보고 싶다.
이번 2008 S/S 파리 컬렉션의 전체적인 룩을 설명해달라.
난 기본적으로 올바르고 현명하게 보이는 남자를 좋아한다. 매번 나의 쇼를 유심히 본 사람이라면 한눈에 짐작할 것이다. 퇴폐적이고 암울한 분위기는 나와 맞지 않다. 이번 2008 S/S 쇼에 선 모델에게서 보여지듯, 똑똑하고 영민한 소년이 대부분이다. 컬러 또한 어둡지 않은 모노톤이 주류이고 거기에 카키와 라이트 블루를 조금씩 가미해 고급스러움을 한층 배가시켰다. 소재 또한 코튼과 리넨, 모직을 적절하게 사용해 보다 베이식하고 차분한 느낌을 주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이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아이템은 쇼의 콘셉트를 완벽하게 재현한 주름 잡힌 셔츠와 팬츠다. 신체의 선을 그대로 나타내는 얇은 소재의 셔츠는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느낌을 확실하게 전달했다. 동양 여성만이 연출할 수 있는 젠(Zen)한 느낌을 최대한 살려 편안하고 실용적인 룩으로 승화하려 했다.
파리의 다른 디자이너와 자신의 차이점을 말해달라.
파리에서 쇼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대 패션 하우스에 입성하기를 원한다. 그렇지 않고 이미 어느 정도 인지도를 얻은 디자이너라면, 자신의 브랜드를 상업적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에 치중하는 것 같다. 그에 비하면 난 너무 상업적이지 못하다. 그냥 옷으로 승부하고 싶다. 그것이 바로 진검 승부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가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주는 패션 디자이너로 이름이 높고, 지안 프랑코 페레는 패션계의 건축가로 명성이 자자하다. 당신은 파리를 넘어 세계의 패션 피플에게서 어떤 우영미로 불리고 싶은가?
파리에서 내 영문 이름을 보면 모두 어느 나라 사람인지, 어디서 왔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남자인지 여자인지 또한 알지 못한다. 매장 직원에게서 들은 이야긴데 디자이너 우영미가 동양 여자, 그것도 한국에서 온 여자라고 하면 남자 고객은 순간 놀란다고 한다. 그리곤 대부분 이런 얘기를 한단다. 남자를 완벽하게 이해한 여자 패션 디자이너라고. 거창한 수식어는 아니지만, 남자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여자 디자이너로 불리고 싶다.
파리 남자와 서울 남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장단점이 분명히 있지만 서울 남자의 아쉬운 점은 유행에 너무 치우친다는 것. 한 아이템이 유행하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똑같은 룩으로 무장한다는 것. 서울 남자는 모두 댄디하고 패셔너블하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긴 하지만, 매력이 크진 않다. 그에 비해 파리 남자는 자유분방한 편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아이템끼리 절묘하게 매치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화한다. 그게 가장 큰 차이점이 아닐까?
파리에서 열리는 수많은 컬렉션 중에서도 단연 우영미 쇼는 돋보인다. 매번 새롭고 참신한 컬렉션으로 ‘우영미다운 스타일’이라는 수식어를 만들며, 패셔너블한 파리 남성 사이에서 옷 잘 만드는 여자 디자이너라는 평을 듣는 그녀. 지금 그녀의 파리 패션계 주가는 상한가다. 앞으로 그녀의 이름을 건 ‘우영미’가 세계 속의 패션 빅 하우스로 우뚝 서는 그날이 오길 기원한다.
정욱준의 진검 승부
서울 컬렉션을 볼만한 컬렉션으로 만들어주던 론 커스텀의 정욱준, 그를 생각하면 늘 친절한 미소와 오만하지 않은 자신감이 떠오른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그의 눈이 퀭하다. 장마가 시작된 2007년 6월 21일, 오늘은 정욱준이 새로운 브랜드 ‘준 지(Juun. J)’를 들고 파리 컬렉션을 점령하기 위해 서울을 떠나는 날이다. 이민 가방 5개와 20여 개의 수트케이스, 스태프 3명이 동승한 빽빽한 콜 밴에 그와 함께 올라탔다.
많이 피곤해 보인다.
일주일째 거의 잠을 제대로 못 잤다. 하루에 2∼3시간 자는 것도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제대로 된 컬렉션을 보여줘야 한다는 중압감이 심했다. 준비는 끝났고 그 결과물이 저 이민 가방과 수트케이스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몇 해 전엔 파리 컬렉션에 참가하는 선배 디자이너의 짐을 대신 들어다주었는데, 이제는 내 옷을 가지고 파리에 간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순간 정욱준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지고 눈물이 스치는 것이 보였다. 감회의 눈물이었으리라.)
서울 컬렉션의 스타 디자이너로 상업적인 면에서도 성공을 거둔 것으로 알고 있다. 굳이 파리 컬렉션에 도전하는 이유는?
컬렉션 준비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보니 파리에서 컬렉션을 한 번 하는데 억원 단위의 비용이 든다는 것을 알았다. 나에게는 정말 올인이라는 표현이 맞다. 어쩔 수 없는 내 숙명이라고 느낀다. 패션 디자이너는 돈을 벌기 위한 비즈니스맨이 아니니까.
오래전부터 파리 컬렉션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파리와 밀라노에서 컬렉션을 하는 디자이너의 옷을 보면서 어느 순간 내 컬렉션도 가능성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바로 파리 진출을 결심했다.
파리의 한 호텔, 아침 식사를 위해 1층으로 내려가면서 컬렉션 관련 기사를 찾아보기 위해 로비에 놓인 <르 피가로(Le Figaro)>를 집어들었다. 시니컬한 파리지앵을 대변하는 신문인지라 프랑스산 빅 브랜드 컬렉션 리뷰가 고작일 것이 뻔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컬렉션 리뷰 기사 1면에 ‘준 지’가 보였다. 연결된 기사에선 또 한 번 준 지가 있었고, 존 갈리아노·요지 야마모토·장 폴 고티에·가스파드 유르키에비치·준야 와타나베·크리스 반 아쉐가 함께 보였다. 6월 30일, 오늘은 이틀 전 컬렉션을 성공적으로 마친 정욱준과의 인터뷰 일정이 잡혀 있다.
아침에 <르 피가로>에서 준 지를 봤다. 프랑스어를 몰라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었다.
이틀간 20여 명의 디자이너가 컬렉션을 했는데 그중에서 7명만을 선별해 리뷰한 기사였다. 놀랍게도 내 컬렉션이 그 7명 중에 포함됐다. 이번 파리 컬렉션의 시작이 한국에서 온 ‘준 지’에 의해 분위기가 고무되었다는 고마운 칭찬도 있었다.
일단은 성공 아닌가?
두 번째 컬렉션을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앞선다. 반응이 다양하고 좋은 편이라 자신감도 얻었다. 패션 프레스는 물론 세계 각국의 바이어들이 좋은 평을 해주어 힘이 난다.
트렌치코트의 도시라 할 수 있는 파리에서 트렌치코트의 디테일과 구조를 재해석했다는 것은 너무 큰 도박 아니었을까?
트렌치코트는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자신 있는 아이템이라 믿음이 있었다. 새로운 도전인 만큼 어중간한 것보다는 과감하게 시도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많은 아이디어와 요소를 활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을 수백 번도 더 했다. 하지만 파리에선 신인 디자이너인 나는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보여줘야만 했다.
정욱준의 컬렉션은 탁월한 스타일링으로 정평이 나 있다. 하지만 그는 2008 S/S 준 지 컬렉션에서 ‘론 커스텀스러운 스타일링’과는 또 다른 ‘준 지스러운 테일러링’을 새롭게 만들었다. 도박에 가까운 변신을 시도한 것이다. 모든 스타일이 슈즈를 포함해 총 4개 이하의 아이템만으로 표현되었다. 스타일을 구성하는 아이템 개수는 줄었지만 각각의 아이템은 완벽한 테일러링이라는 철칙을 고수했다. 트렌치코트의 어깨 덮개는 볼레로 형태로 변형되었고, 트렌치코트 자락은 킬트 스타일로 분리되었다. 재킷과 쇼트 팬츠는 점프 수트 형태로 결합했고, 하이 웨이스트 팬츠의 허리 부분은 베스트의 디테일과 교묘한 접합을 시도했다. 이 명명하기 어려운 준 지표 테일러링 아이템들은 정욱준이 파리에 갈 만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정욱준이 서울을 떠나던 날이 떠오른다. 이삿날 비가 오면 잘 산다는데, 정욱준이 준 지를 가지고 파리로 이사하던 날은 장맛비가 왔었다. 대박이 날만 했다는 생각이다. 그의 올인에 박수와 지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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