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에서 톱 작가로, 열두 번 만에 등단 성공, 10여 년간 암 투병 고백
내 삶의 원동력은 ‘욕망’
내면의 깊은 곳을 찌르는 문법으로 문학계를 사로잡은 정유정 작가가 이번엔 인간의 본성인 욕망을 화두로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신작 장편소설 <영원한 천국>은 전작 <완전한 행복>에 이은 욕망 3부작의 두 번째 책으로, 인간이 살아가면서 고통과 마주했을 때 비로소 빛을 보게 되는 주체성, 성취적 욕망을 이야기한다. 예약 판매 일주일 만에 무려 4만 5,000부가 완판되면서 ‘정유정 파워’를 실감케 했다.
정유정 작가는 n번째 베스트셀러 등극에 대한 소감을 묻자 “아이돌 부럽지 않다”며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지었고, 이어지는 질문 하나하나에 호흡을 고르며 답변을 이어갔다.
<영원한 천국>이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올랐습니다.
처음 겪는 일은 아닌데, 처음과 같은 마음이에요. 특히 책 읽는 사람들이 줄어든 세상에서 이런 사랑을 받을 수 있다니 감회가 남달라요. 감사한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친필 사인을 5,000권씩 진행하고 있어요. 아이돌 그룹 부럽지 않다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죠.(웃음)
가상 세계를 배경으로 한 SF인데, 어떻게 시작된 이야기인지 궁금해요.
유발 하라리의 저서 <호모 데우스>를 통해 인간의 의식을 데이터화하는 이야기를 접했어요. 과학혁명이 인간을 어디로 데려가는 것이며, 인류가 어디를 향해 나아가는 것인지 생각하게 됐죠. 데이터를 통해 원하는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세상이 오면, 과연 인간은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행동할까 하는 물음이 생겼어요. 인간은 한평생 서사를 소비하면서 살아요. 태어나면서부터 그리고 학교에서 첫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족, 친구들과 서사가 생겨요. 다양한 방식으로 쌓이는 서사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게 되고, 자신의 존재를 느껴요. 그 점에 착안해 소설 속 가상 극장 ‘드림시어터’를 구상하게 됐어요. 인간들에게 가상 세계에서 서사 놀이를 할 수 있는 극장을 만들어주고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답을 찾아갔어요.
그동안 인간의 본성인 악과 욕망을 주제로한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제겐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인간의 본성처럼 끝없이 파고들 수 있고 흥미로운 소재는 없는 거 같아요. 제 삶을 움직이는 요인이기도 해요. “삶의 원동력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욕망”이라고 답해요.
이번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뭔가요?
인간은 무언가를 갈망함으로써 강해져요. 각기 다른 이유로 욕망을 잃은 채 살아가는 사회가 됐는데, 시련과 고통의 상황을 이겨내려고 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 있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사회가 비뚤어져도 우리는 내면의 힘을 믿고 나아가야죠. 이 책을 통해 우리 내면에 잠들어 있는 야성을 깨우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특히 젊은 친구들이 욕망을 무기 삼아 삶의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알기를 바라요.
“네가 이기거나 내가 이기거나”
2007년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로 제1회 세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문학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정유정 작가. 차기작 <내 심장을 쏴라>가 제5회 세계문학상까지 수상하면서 ‘스타 작가’의 탄생을 알렸다. 이례적인 사례였다. 문학 또는 문예 창작 비전공자가 문학상 수상으로 등단한다는 건 그만큼 드문 일이다. 정유정 작가는 간호사로 5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9년, 총 14년의 직장 생활 이후 습작 기간을 거쳐 작가의 꿈을 이뤘다. 열한 번의 좌절 끝에 열두 번 만에 등단에 성공한 그녀는 <7년의 밤>(2011), <28>(2013), <종의 기원>(2016) 등 발표했다 하면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40대에 작가로 데뷔했어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거 같아요.
35살에 습작을 시작했어요. 결혼할 때 남편과 약속했어요. 집을 마련하면 직장을 그만두고 오랜 꿈이었던 글을 써보기로. 결혼 6년 만에 집을 샀고, 저는 사직서를 제출했어요. 남편이 외조를 하느라 고생이 많았죠. 아들의 학교 픽업부터 학부모 상담, 마트에서 장을 보는 것까지, 제가 오롯이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등단까지 6년, 열한 번의 좌절을 겪으면서 포기하고 싶었던 적은 없나요?
멘털이 약한 편이라 번번이 절망감에 휩싸였어요. 제가 글을 썼다 하면 세상이 열광할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고요.(웃음) 작가라는 직업이 뜬구름처럼 느껴졌어요. 열한 번을 떨어지니까 오기가 생겼어요.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다시 도전하게 됐던 거 같아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힘은 뭔가요?
남편 덕이 커요. 6년 동안 저를 믿고 묵묵히 기다려줬어요. 그리고 제가 멘털은 약하지만, 툭툭 털고 일어나는 건 잘해요.(웃음) 희망이 있어서 다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습관처럼 다시 책상 앞에 앉았어요. ‘그래도 해야지, 별수 있나’라는 마음이 컸던 거 같아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책상 앞에 앉아 먼 목표를 바라보지 않아요. 오늘 쓰려고 했던 분량만 생각해요. 오늘 모퉁이를 하나 돌고, 내일은 또 내일의 모퉁이를 돌면 돼요. 목표하는 바가 무엇인지 깃발을 꽂아놨으니 저를 믿고 천천히 나아가요. 그러다 보면 어느새 목표 지점에 도달하더라고요.
글쓰기 루틴이 궁금해요.
한 권의 책을 만들기까지 평균 2~3년이 소요되는데, 그 기간에는 집에서 글만 써요. 집 밖을 나서는 순간 글을 한 줄도 못 쓰겠더라고요. 집필을 시작하면 보통 오전 5시에 기상해 커피 한 잔을 마셔요. 그리고 좋아하는 헤비메탈 음악을 들으면서 잠을 깨요. 정신을 차리고 책상에 앉아 오전 내내 글을 써요. 오후에는 오전에 쓴 글을 고쳐요. 오후 5시가 되면 일을 접고 운동을 해요. 운동은 제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루틴이에요. 모든 일은 체력전이니까요. 지난해부터 러닝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집에 돌아와 맥주 한 잔을 마시면서 하루를 마무리해요.
습작 시절부터 ‘묘사 연습’으로 글쓰기 훈련을 했다고 밝혔어요. 지금도 하고 있나요?
그럼요. 칼을 써야 하는 순간을 위해 칼날을 미리 갈아둬야죠.(웃음) 눈앞에 보이는 한 장면을 몇 장으로 풀어 쓰는 훈련을 오랜 기간 이어오고 있어요. 글쓰기도 습관을 놓치면 녹슬어요. 흔히 작가들은 연습하지 않아도 글을 술술 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니에요. 매번 마른빨래에서 물 짜내듯이 문장을 써요. 그러니 연습과 훈련을 게을리해선 안 돼요. 특히 나이가 들면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빈도가 늘었는데, ‘글발’이라고 다르겠어요?(웃음)
영감은 어디에서 얻는지 궁금해요.
<종의 기원> <완전한 행복>은 실제 사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큰 갈래는 실제 발생한 사건에서 시작되지만, 전체적인 서사나 이야기는 제 머릿속에서 새롭게 만들어내요. 대부분의 작품은 평소에 책을 읽다가 불현듯 스치는 첫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어요. 소설적인 질문을 던졌을 때 ‘그렇다’ 혹은 ‘아니다’라고 이분법적으로 답이 떨어지면 소설이 안 되고, 몇백 장 분량이 될 정도로 질문에 대한 답이 충분히 논증되면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골똘히 생각해보게 돼요.
“10년간 암과 싸우면서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해졌어요. 매일 동이 트기 전에 러닝을 했는데, 하늘이 빨갛게 물들었다가 해가 뜨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살아서 소설을 쓰고 싶단 마음이 강해졌어요.”
"나는 내 인생 최대의 적을 만났다. 바로 나다."
열한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 정신’으로 뚜벅뚜벅 작가의 길을 걸어온 정유정 작가가 뒤늦게 유방암 투병 소식을 고백했다. 2012년 유방암 진단을 받은 정유정 작가는 약 5년 동안 남몰래 암과의 전쟁을 치렀다. 가까운 친인척을 제외하고는 그녀의 투병 사실을 몰랐을 정도로 조용히 병마와 싸웠다. 죽음 앞에서 생에 대한 의지가 더욱 강해졌다는 그녀다.
최근 TV조선 시사·교양 프로그램 <거인의 어깨>에 출연해 암 투병기를 털어놨어요.
12년 만에 처음으로 꺼낸 이야기예요. 2012년 수술을 시작으로 방사선, 약물, 추적 관찰 등 긴 시간을 거쳤어요. 치료가 완전히 끝난 게 5년밖에 안 되네요.(웃음) 10년 만에 완치 판정을 받았어요. 두 번 산다는 의미로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면서 지냈어요. 히말라야에 다녀왔고, 산티아고 순례길도 걸었어요. 몸을 힘들게 해서 복잡한 머리와 마음을 비우려고 했어요. 투병하면서 가장 답답했던 게 두뇌 회전이었어요. 안개가 낀 것처럼 머릿속이 하얗게 됐어요. 암 발견 당시 <28>을 집필하고 있었어요. 소설을 빨리 끝내야 하는데 치료가 더디거나 재발하게 되면 시기가 늦어지니까 마음이 조급하고 왠지 모를 두려움이 생기더라고요.
암과 싸우는 중에도 작품 걱정이 먼저였군요.
방사선치료를 마치고 6개월간 지리산에 머물렀어요. 매일 오전 4~5시에 일어나 8km씩 러닝을 했어요. 러닝 코스를 따라 한 바퀴 돌면 해가 떴어요. 하늘이 빨갛게 물들었다가 해가 뜨는 과정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시 잘 살아서 소설을 쓰고 싶단 마음이 강해졌죠.
긴 암 투병 생활이 정유정 작가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가요?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끼게 됐어요. 운동을 하기 위해 집 밖에 나가서 마주하는 풍경들을 보면서 ‘앞으로도 이 풍경을 보고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오늘이 감사하고, 기뻤죠.
앞서 “불운도 내 삶의 요소”라고 했던 정유정 작가의 인터뷰가 떠오릅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삶에 임해야 할까요?
“나는 내 인생 최대의 적을 만났다. 바로 나다”(정유정 작가 <종의 기원> 중)라는 문장을 썼어요. 우리의 인생에서 최대의 적은 자신인 거 같아요. 타인과의 싸움보다 내 안에 있는 어떤 자아와의 싸움이 가장 크고 치열하고 고약해요. 그러니까 타인의 인생에 향해 있던 시선을 내 인생으로 돌릴 필요가 있어요. 특히 요즘 젊은 세대를 보면 SNS에 노출되는 타인의 삶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에 비해 자신의 인생이 비루하다며 한탄하죠. 그럴 필요가 없어요. 나는 내 삶에 집중하면 됩니다. 내 삶의 가치, 살아가면서 진정으로 얻고 싶은 게 뭔지 아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어요.
말처럼 쉽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저도 처음엔 어려웠어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깊게 생각해보고 냉정하게 들여다보지 못했어요. 그래서 회사를 그만둔 직후에는 제가 소설을 쓰면 세상이 열광할 거라고 착각했어요. 등단이 좌절될 때마다 심사 위원이 잘못 판단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실패를 겪으면서 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스스로의 위치를 파악하게 됐어요. 객관적으로 바라보니 제가 가진 강점도 보이기 시작했어요.
세상에 소설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인간은 타인의 이야기를 학습하면서 지혜를 길러요. 모든 걸 경험할 수 없지만, 경험했다고 느낄 만큼 시각을 넓혀주는 게 문학이라고 생각해요. 소설 속 인물들이 겪는 일을 안전한 거리에서 지켜보고 무사히 내 인생으로 돌아와, 책을 읽으며 얻은 교훈과 지혜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확장하는 것이죠. 무엇보다 문학 자체에 즐거움이 있어요. 문학이 안겨주는 즐거움은 능동적이에요. 작가가 썼지만, 독자의 머릿속에서 세상이 구현되니까요.
욕망을 주제로 집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정유정 작가의 욕망은 뭔가요?
재미있고, 의미 있고, 힘 있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한 편 쓰고 싶어요. 작가로서 최종 목표이기도 해요. 소설을 한 권씩 쓸 때마다 목표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고 믿어요. 그런 과정에 있다고 생각하면 원동력이 생기죠. 그만큼 글을 쓰고, 책으로 독자와 만나는 데 대한 의미가 커요. 남편이 제게 하는 말이 있어요. 커피와 노트북만 있으면 잘 논다고 해요. 외향적인 사람이라 밖에서 얻는 에너지가 큰데, 집에서 글 쓰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잘해요. 그만큼의 애정인 거 같아요.
자신이 어떤 작가라고 생각하나요?
작가가 가지는 예술성도 중요하지만, 저는 흥미로운 얘기를 하기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작가로서 지향점도 마찬가지예요. 언제까지나 대중 앞에 서서 만담꾼처럼 재미있고 의미 있는 얘기를 전해주고 싶어요.
언제까지 글을 쓰고 싶은지요?
건강이 허락되는 날까지요. 그리고 어느 순간 제 감각이 낡아서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다면, 과감하게 물러나야지요. 그래도 지금의 마음으론 끝까지 장편소설을 집필하고 싶어요. 문학적으로,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탄생시키고 싶어서요. 셰익스피어의 소설을 읽고 그 이야기에 착안해 무언가를 창조해내듯이 원형이 되는 이야기 한 편을 남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유정 작가의 최종 꿈이 궁금합니다.
이야기꾼이라는 타이틀을 얻고 싶어요. 정유정 하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하는 작가라고 말해주면 더할 나위 없을 거 같아요. 제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너무 재미있어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밤을 보내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