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까지 사유하는 힘으로 쓰는, 나의 시”
한국의 사포, 사랑의 시인 김남조
“읽다 접어둔 책과 막 고백하려는 사랑의 말까지 좋은 건 사라지지 않는다.” 몇 년 전 무더운 여름날, 광화문 교보생명 사옥에 걸려 있던 한 문장. 바로 김남조 시인의 시 ‘좋은 것’에 나오는 시구였다. 친근하면서도 아름다운 표현이라 생각하며 눈길을 돌렸을 때 여전히 광화문 광장을 굳건하게 지키는 이순신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이순신 동상을 만든 분이 김남조 시인 부군(고 김세중 조각가)이지. 예술가 부부가 이 여름에 서울 한복판 광화문을 접수했구나’라고 혼자 생각하며 부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김남조 시인의 시는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다. 기성세대는 물론 MZ들도 국어 시간에 꼼꼼하게 분석하며 배웠던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미지의 새/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로 시작하는 ‘겨울 바다’, 가수 송창식의 노래 ‘그대 있음에’(같은 노랫말의 가곡도 있다) 역시 김남조 시인의 작품이다.
1927년생이니 아흔이 훌쩍 넘어 상수(上壽)를 바라보는 김남조 시인. 1950년 <연합신문>에 시 ‘성수’, ‘잔상’ 등을 발표하며 등단한 뒤 1953년 첫 시집 <목숨>을 출판하면서 우리나라 문단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70년 넘게 활동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마산에서 국어 교사를 하던 시절, 당시 같은 학교 미술 교사인 김세중(국립현대미술관 초대 관장)을 만나 결혼해 4남매를 두었다. ‘한국의 사포(고대 그리스 시인으로 인류 최초의 여성 시인)’, ‘교과서 시인’(국어 교과서에 ‘겨울 바다’, ‘설일’, ‘정념의 기’ 등이 실렸다) 등 다양한 수식어가 많지만 무엇보다 ‘사랑의 시인’이라는 말이 가장 와닿는다. 김남조 시인은 여전히 끊임없는 창작의 힘으로 사랑의 축복과 기쁨을 노래한다. 그리고 여전히 사랑의 뜨거운 힘에 대해 강조한다. “심지어 사랑이 아직 오지 않았거나 왔으되 자취 없이 지워졌다고 여겨지더라도 그 부정 속에 사랑의 열망과 신뢰는 살아 있는 순열한 불씨이곤 하다. 삶, 아니 우리의 출생부터가 신의 축복이며 한없이 귀중하고 고마운 것이고, 우리 모두 살아가면서 이 말에 공감하고 찬동하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요즘도 시상을 떠올리는 현역 시인
요즘도 종종 언론을 통해 선생님의 근황과 활약을 확인할 수 있어 반갑습니다.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기억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생각은 끝없이 이어져 그런 대로 괜찮습니다. 아침 6시쯤 잠을 깨어 그날의 할 일을 간추리고 가급적 루틴대로 움직이려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산만하고 어리숙해 패잔병의 모습일 뿐입니다. 그래도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시상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낮에는 외부 문화 예술 행사에 참여하기도 하고, 병원도 다니고(웃음). 저녁에는 유튜브로 가곡과 팝송을 시청합니다.
얼마 전에는 선생님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 ‘목숨’을 세계 초연했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 점거됐던 시절에 태어나 고등학교 졸업 무렵 광복을 맞았습니다. 금지됐던 한국어를 다시 찾게 된 감동의 시절이었지만, 얼마 후 남과 북이 갈라져 대결하는 6·25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23살 때 펴낸 첫 번째 시집 <목숨>에 담긴 시는 전부 시대적 산물입니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밤에 불붙은 도시 서울이 아침에는 불의 잔해인 거대한 잿더미로 남은 것을 참담히 바라보는 일, 그뿐이었습니다. 나는 문학 공부를 한 적이 없는데도 시대가 스승이었고, 역사적 사건들이 시를 쓰도록 내 마음을 움직였어요. 내가 쓴 것이라기보다 시대가 전해준 나의 축적물을 쓴 것입니다.
그 시대의 아픔을 그대로 전하신 거군요.
그렇죠. 처참했던 시대 상황이 나를 눈뜨게 하고 일깨워주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었습니다.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또 사는 게 무엇인가,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그런 마음속 물음에 대한 기도였어요. 지금까지 1,000여 편의 시를 발표했지만 가장 절박한 심정으로 쓴 첫 시 ‘목숨’에 가장 애착이 갑니다.
“현대사회에서도 밤을 지새워 글을 쓰는 젊은 시인들이 사랑스럽습니다.
이런 시대에 그들이 없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삭막할까요?”
창작의 원동력은 절실함
김세중미술관은 선생님에게는 남다른 의미가 있는 장소죠?
우리 부부가 1955년부터 거주하던 곳을 열린 예술·문화 공간으로 사용하도록 (재)김세중기념 사업회에 기증해 탄생한 공간입니다. 민현식 선생이 건축설계를 맡아, 3년간의 공사 끝에 건물을 준공하고 2015년 문화예술 공간 ‘예술의기쁨’으로 개관했고, 2017년 ‘김세중미술관’으로 거듭났습니다. 미술관 중앙에 있는 수백 년 된 상수리나무는 우리가 살던 집에 있던 그 나무를 그대로 살려 미술관과 조화를 이루게 한 것입니다.
매년 ‘김세중조각상’을 시상하시지요?
1986년 김세중 선생이 58세 나이로 급작스럽게 별세했습니다. 고인의 서울대학교 교수 퇴직금을 의미 있게 사용하고 싶던 차에 이어령 선생이 ‘김세중조각상’을 제정해 조각가들을 지원하고 격려하자는 제언을 했습니다. 이 제언이 다수의 뜻으로 이뤄져 1987년 시작된 ‘김세중조각상’은 올해로 37회를 맞았습니다. 1990년 30~40대 청년 조각가들을 격려하는 ‘청년조각상’을 만들었고, 1998년 한국 미술연구가들에게 시상하는 ‘한국미술저작·출판상’도 시작했습니다. 올해까지 수상자의 수가 126명이 됩니다. 해마다 축사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다르지만, 저는 조각이라는 예술의 존엄성과 새로운 예술 세계를 살리고자 합니다.
그러고 보면 후배 예술인들을 각별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현대사회에서도 밤을 지새워 글을 쓰는 젊은 시인들이 사랑스럽습니다. 이런 시대에 그들이 없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삭막할까요? 절박함으로 좋은 시를 쓰는 젊은이들이 우리 시대의 등불입니다.
언제부터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꾸셨나요?
저는 일본에서 중학교를 다녔는데, 그 시절 인도의 시성 타고르 시집을 읽었습니다. 일본어로 된 시집이었는데, 큰 충격을 받았어요. 놀랍고 아름답고 매혹적이고, 그리고 아프다는 느낌이 왔습니다. 그때부터 사랑을 제 삶과 문학의 큰 기둥으로 삼았습니다. 일본인 선생님이 너는 커서 시인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문학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습작기를 거쳐 1953년에 첫 시집 <목숨>을 냈습니다. 그렇게 시인의 반열 그 끝 좌석에 이르게 됐습니다.
시인 외에 다른 꿈을 꾸신 적은 없나요?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서커스 구경을 갔는데, 말 타는 소녀를 보고 ‘나도 커서 말 타는 소녀가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웃음)
글 쓰는 것 외에 좋아하거나 즐기는 관심 분야는 무엇인가요?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장르는 로맨스 영화이고, 게리 쿠퍼와 로렌스 올리비에가 주연한 영화를 즐겨 보았습니다.
국어 교과서에 실린 ‘겨울 바다’를 배우고 자란 세대에게 선생님은 범접할 수 없는 예술가 그 자체입니다. 작가로서의 선생님과 생활인으로서의 선생님은 다른 부분이 있을까요?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치른 시절을 살아온 것과 남존여비, 가부장적 한국 사회에서 여성 문학인으로 사는 삶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일상의 삶이 힘들었을 뿐 아니라 문단의 인정을 받기도 어려웠어요. 당시 남성 문학인들은 많았는데 여성으로는 나설 사람이 없어 제가 유일한 여성 시인이었던 셈입니다.(웃음) 그리고 생활인으로서의 삶은 치열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시대 남성의 위상이 회복될 필요가 있습니다. 집안에서의 주도권이 여성(주부)에게 있다 보니 오히려 남성은 위축되고 고독해 보입니다. 지난 시절 남편 김세중 선생의 삶을 돌아보고, 아들 셋을 키우다 보니 남자의 외로움을 알겠습니다. 가정에서는 엄마보다는 아빠가 소외돼 있습니다. 남성에게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묻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소중하게 느껴지는 시대가 됐습니다.
70년 넘게 문학인으로 활동하시면서 정말 많은 작품을 발표하셨죠?
지금까지 19권의 시집을 냈고, 수필집 11권, 윤동주 연구 논문 등을 발표했습니다. 24년 동안 <소설문학>에 연재한 콩트집 <아름다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당시 여류 시인들에 대해 쓴 책을 포함하면 총 40여 권이 넘습니다. 저는 5년 동안 대략 60편의 시를 쓰게 되면 한 권씩 시집을 냈어요.
그러고 보면 1,000편이 넘는 시를 쓰신 거네요. 창작의 원동력은 어디서 오나요?
시는 어휘로 쓰는 게 아니라 뿌리까지 사유하는 힘으로 쓰는 일이며, 문학적인 책임이 뒤따르지요. 시를 쓴다는 것은 타고난 재능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위대한 작가는 돌을 쪼듯이 작품들을 끊임없이 고칩니다. 나도 지금도 고치고 있습니다. 과거에 출간했던 시집 19권을 다시 보면 고칠 게 많아 몇 줄씩 빼고 새로 넣고 싶기도 합니다. 시간이 펼쳐주는 하루하루는 늘 다르게 다가오며, 새로운 동기를 제공하고 새로운 감성을 유발합니다. 시인은 천부적인 감수성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포착합니다. 창작의 원동력은 절실함에서 오고, 그 절실함으로 인해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 없는 행복은 있을 수 없어
선생님은 시를 쓰셨고, 부군 김세중 선생님은 조각을 하셨습니다. 우리 삶에서 예술의 기능은 무엇일까요?
김세중미술관이라 불리는 작고 소박한 집은 60년간 우리 가족이 살았던 집을 개조한 곳입니다. 나에게는 시를 썼던 공간이자 남편 김세중 선생에게는 작업실이기도 했습니다. 2전시실 자리의 아틀리에에서 이순신 동상을 만들었습니다. 예술이 지닌 참된 가치는 인간의 가슴속 가장 깊은 오지에서 소리치는 인간의 고백인 참회와 누구에게도 감추고 있었던 아픔이며, 이것이 황망하게 무너질 때 혹은 희망의 끈이 끊어졌을 때 희망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아흔이 넘으면 삶에 대해 어떤 감정이 드나요?
90년을 넘게 산다는 건 엄청난 삶이지요. 나이가 많다고 다 성숙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저의 지난 삶에선 미숙한 점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다른 이들의 다양한 삶을 보면서 성숙해진 것 같아요. 사람은 뭘 좀 알고 할 줄 안다고 해서 성숙하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지금은 넘치거나 부족해도 순간순간이 다 소중하고 아름답습니다. 지금도 시간이 날 때마다 바깥세상을 보러 나갑니다.
선생님도 젊은 시절이 그립고,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시나요?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40~50대 자유로웠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시인으로 살면서 여자로서 가정을 돌보고 생활을 지켜야 하는 힘든 시기가 있었는데, 40~50대가 되니 자유로워졌습니다. 시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나이가 들고 보니 세상은 훨씬 크고 넓고 깊었습니다.
살면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사랑입니다. 시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평생 사랑을 갈구합니다. 남녀 간의 간절함뿐만 아니라 절대 존재에 대한 종교적인 그리움도 사랑입니다. 삶 안의 으뜸인 사랑을 갈구하고 탐색합니다. 음식에 소금이 필요하듯이 사랑 없는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 가지 아픔이 있고, 이룰 수 없는 것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의 작품세계는 언제나 사랑으로 시작해 사랑으로 끝을 맺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 어떤 사랑의 시도 사실은 사랑에 육박하지 못한 미완의 습작 시일 뿐입니다. 그러하기에 진실로 사랑은 인류의 영원한 화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강자나 부유자일지라도 사랑의 심정으로 바라볼 땐 위태하고 애처롭고 측은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대할 때조차 감히 가슴 저리게 애처로움을 느끼는 것이 사랑의 민감성과 순정성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힘들고 지쳐 합니다.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지혜는 어디서 찾으면 좋을까요?
종교나 신앙에서 구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신앙 시를 많이 읽고 쓰기도 했어요. 앞으로도 좋은 신앙 시를 쓰고 싶습니다. 그 안에 정말 축복이 있어요.
마지막으로 인생의 후배들에게 어떤 말씀을 해주고 싶으세요?
삶은 날마다 새로운 학교라고 말합니다. 쉽고도 바른 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루에도 여러 새로운 인생이 있기도 합니다. 이를 찾아보는 데는 겸손과 열망과 인내가 따릅니다. 지금 시대의 젊은이들은 조급하게 무언가를 얻으려고 서두르곤 합니다. 과일이 익기도 전에 열매를 따려고 하죠. 밤의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새벽이 오는 걸 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70년 넘게 시를 쓰면서도 “나는 시인이 아니다. 시는 한평생 나를 이기기만 한다”고 고백하는 노시인에게서 시를 향한 끝없는 애정과 갈망이 느껴진다. 김남조 시인의 시를 만나는 독자들이 행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안에 삶에 대한 사랑과 진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목숨
아직 목숨을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가
꼭 눈을 뽑힌 것처럼 불쌍한
사람과 가축과 신작로와 정든 장독까지
누구 가랑잎 아닌 사람이 없고
누구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고
불붙은 서울에서
금방 오무려 연꽃처럼 죽어갈 지구를 붙잡고
살면서 배운 가장 욕심 없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반만년 유구한 세월에
가슴 틀어박고 매아미처럼 목태우다 태우다
끝내 헛되이 숨져간 이건
그 모두 하늘이 낸 선천의 벌족이더라도
돌멩이처럼 어느 산야에고 굴러
그래도 죽지만 않는
그러한 목숨을 갖고 싶었습니다
-시집 <목숨>(1953)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