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태어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옛말 때문인지 대도시는 항상 사람으로 넘쳐난다. 학업과 취업, 성공을 위해 대도시로 떠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요즘, 한편에서는 새로운 흐름이 생기고 있다. 바로 젊은 청년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 대도시에서 생활했던 경험을 토대로, 자신이 살던 시골 마을의 장점을 백분 살려 마을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청년들이 생겨나고 있다. 전남 완도군 완도읍 용암마을 김유솔 이장도 그중 한 명이다. 서울에서 쉼 없이 5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완도 용암리. ‘26살 최연소 이장’이라는 정보가 없었다면 한참을 헤맬 뻔했다. 용암리 경로당 팽나무 앞에서 어르신들과 담소를 나누는 김유솔 이장은 여느 집의 손녀 모습 그 자체였다. 이장님이라고 하기에는 젊어도 너무 젊다. 김유솔 이장을 바라보는 어르신들의 눈에서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듯하다.
“제가 항상 작은 가방을 메고 다니는데 어르신들을 만나고 집에 갈 때쯤 되면 가방이 엄청 무거워져요. 가방에 금방 찐 옥수수도 넣어주시고, 약과도 넣어주시고. 이러니 제가 살이 안 찔 수가 없어요.”
김유솔 이장은 완도에서 나고 자라 고등학교까지 마친 뒤 서울에서 디자인 일을 하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학창 시절에는 좁고 답답하고 숨을 곳 없는 완도가 싫었는데 다시 돌아온 완도는 아름답고 여유로워 머물고 싶은 곳이었다. 서울 생활 덕분에 자신의 내면이 단단해져 완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그녀는 마을 이장 일을 하면서 ‘솔진관(유솔+사진관)’이라는 사진관을 운영(지금은 잠시 휴업 중이다)하고, ‘완망진창’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청년마을 사업도 하고 있다. 올해로 용암마을 이장 2년 차. 대통령직보다 더 어렵다는 마을 이장을 맡아 이제는 어르신들의 민원을 능숙하게 해결할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아직도 서울에서 뭐 해? 완도로 내려와!”라는 말을 할 수 있도록 완도 용암마을을 살기 좋은 멋진 곳으로 발전시키고 싶다는 당찬 포부를 이야기할 때는 26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옹골차다. 시골의 폐가와 빈집은 다르다고 강조하며 사람이 살 수 없는 폐가를 정리하고, 시골로 돌아오는 이들이 거주할 수 있는 숙소를 만들면 좋겠다는 현실적인 제안도 했다. 그러면서도 “한 번씩은 서울이 그리워요. 망원동을 워낙 좋아하는데 그곳의 힙한 카페와 소품 숍을 하루 종일 돌아다니면서 알차게 놀고 싶어요”라고 할 때는 영락없이 발랄한 20대다. 참 괜찮은 K-청년, 김유솔 이장이다.
올해로 2년 차 이장, K-청년 떴다!
26살이면 대한민국 최연소 이장 아닌가요?
사실 부끄럽지만 저도 가끔씩 인터넷 검색을 해봐요. 알기로는 제가 최연소인 거 같아요. 엊그제 고흥에 계신 40대 이장님을 만났는데 그분이 저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 “나 이제 최연소라고 말 못 하고 다니겠네” 하시더라고요. 40대도 최연소라고 생각하셔서 좀 놀랐어요. 그만큼 어르신 이장님이 많이 계신 거죠. 20대 이장이 전국에 한두 분 있는 거 같기는 한데 아마도 제가 가장 어릴 거예요. 누가 이런 거 정리 좀 해주셨으면 좋겠어요.(웃음)
어떻게 이장이 됐는지 궁금해요.
저는 완도에서 나고 자랐는데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서울로 올라가 디자인 일을 했어요. 5년 정도 서울 생활을 하다가 쉼이 좀 필요하겠다 싶어 완도에 내려왔죠. 여기서 사진관을 운영하면서 군에서 주관하는 ‘도시 재생’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고, 거기서 전 이장님을 만났어요. 전 이장님이 저를 유심히 지켜보셨나 봐요. 저를 좋게 보셨는지 어느 날 사진관으로 찾아오셔서 저한테 뭔가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게 바로 본인 후임으로 “이장 한번 해볼 생각 없냐”는 거였어요.
당시에는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겠네요?
전혀 제 계획에 없던 일이라 그날 당장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 ‘내가 왜 못하지? 할 수 있을 거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거죠. 제 신조가 고민을 많이 하고 선택한 일들은 항상 아쉬움이 남는다는 거예요. 옷을 사든 어떤 일을 결정하든 너무 간절히 원하면 오히려 고민하지 않고 바로 결정하게 되죠. 이장 일도 약간 그랬던 거 같아요. 걱정은 됐지만 내가 열심히 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 “네, 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어요.
이장 1년 만에 퇴출 위기 겪기도
마을 이장이 대통령보다 더 어렵다는 말이 있잖아요. 어르신들의 허락은 어떻게 받았나요?
제가 좀 불리한 상황이 되면 말을 잘하는 특성이 있어요. 마을 총회 자리에서 어르신들이 각오 한마디 해보라고 하셔서 “제가 사실 어르신들보다 어떻게 마을에 대해 더 잘 알겠습니까. 마을은 어르신들이 잘 아시니까 저에게 알려주세요. 대신 저는 어르신들이 모르는 걸 잘 알고 있어요”라고 말했어요. 다들 말은 잘하네 싶었지만 너무 어리니까 좀 찜찜해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아끼던 필살기를 꺼냈죠. “사실 저희 외할아버지도 옛날에 이 마을에 사셨어요”라고 했더니 누구냐고 물어보셔서 할아버지 성함을 말했더니 “그 집 괜찮지” 하면서 바로 어르신들이 마음을 여셨어요.(웃음)
사실 이장 업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어떤 일을 하나요?
제 생각에는 정부와 마을, 개인 간의 소통 창구인 거 같아요. 우리가 세금을 내면 정부에서는 그 세금으로 여러 가지 사업을 시행하는데 우리는 그걸 잘 알지 못해요.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이장의 중요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장애인이나 노약자에 대한 지원이 있어도 마을 사람들이 알기가 쉽지 않아요. 그런데 제가 이장 회의에 가서 이장회보를 가져오면 마을 사람들이 이장회보를 직접 읽거나 저를 통해 나라에서 어떤 지원 사업을 하는지 알게 돼 신청하는 거죠. 그리고 거리의 가로등이 나갔다, 계단의 난간이 부서졌다 같은 마을 민원이 생기면 제가 직접 민원을 넣어야 답이 빨라요. 그런 마을 민원을 책임지는 것이 이장의 역할입니다.
시골 마을에선 이웃집 수저 개수까지 다 안다는 말을 하잖아요. 용암마을의 가구 수는 얼마나 되나요?
78세대라고 등록돼 있어요. 그중에 20대 이하는 제가 다 알죠. 20대는 저 포함 2명이에요. 그리고 초1, 중1, 고1 3형제가 있는 한집이 있고, 저희 집 바로 뒷집에 중1 학생이 하나 있어요. 마을에서 낯선 아이를 만나면 제가 꼭 물어봐요. “얘, 너 어느 집 애니?” 그러면 아이가 ‘저 아줌마는 뭐지?’ 하는 눈으로 쳐다보죠. “나 이상한 사람 아니야. 이 마을 이장이야”(웃음) 그래요. 30대 서너 명, 50대 한두 명, 나머지는 다 60~70대 어르신이에요. 그런데 등록은 돼 있지만 요양원에 가신 어르신들도 있고, 다른 지역으로 일하러 간 분들도 있어 아마 마을 사람이 80명이 채 안 될 겁니다.
이장 일이 처음에는 어색했을 거 같아요. 어르신들을 대하는 것도 쉽지 않고.
처음 이장 일을 시작했을 때는 이장 임기가 3년이라고 들었는데, 1년마다 마을 총회를 하기 때문에 그사이에 퇴출될 수도 있어요.(웃음) 이제 2년 차니까 사실 고비를 한 번 넘긴 셈이죠. 작년 한 해가 정말 많이 배우는 시기여서 너무 서툴렀고 잘하지 못했어요. 심지어 마을 사람들이 저를 안 좋아하시는 줄 알았어요. 워낙 평소에 잘한다, 못한다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 좀 속상했죠. 나중에 알고 보니 제가 손녀 같은 생각에 상처받을까 봐 말을 아끼셨던 거더라고요. 저는 미리 약속을 하지 않고 경로당에 가서 어르신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민폐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제가 이유 없이 오는 걸 좋아하고 기다리세요. 왜 용건 있을 때만 오냐고 오히려 서운해하시죠.
“저는 미리 약속을 하지 않고
경로당에 가서 어르신들과 식사하는 것을
민폐라고 생각했는데,
어르신들은 왜 용건 있을 때만 오냐고
오히려 서운해하고 기다리세요”
원래 완도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서울 생활을 하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들었어요.
완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서울로 가서 취업했어요. 어릴 때부터 디자인을 하고 싶었는데 당시 완도에는 입시 미술학원도 없었어요. 이렇게 하다가는 명문대는커녕 디자인과도 못 갈 것 같아 스스로 내 길을 찾아가야겠다는 마음으로 서울에 올라가 무조건 디자인을 배우고 회사에 취직했죠. 편집 디자인 일도 하고, 사진관에서도 일하며 5년 동안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완도에 내려오기 전까지 광고대행사에서 광고물을 만드는 일을 했어요.
학창 시절에는 무조건 서울에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했나요?
고등학생 때는 너무 완도를 떠나고 싶었어요. 밖에 나가면 무조건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니까 너무 오픈돼 있는 게 싫더라고요. 초등학생 때부터 앞으로 디자인을 전공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조언해줄 사람도 없고. 뭔가 제 장래에 대해 진지하게 상담할 수 없으니 속상했어요. 얼마나 완도를 떠나고 싶었으면 엄마한테 “나는 죽어도 서울에서 죽을 거다”라는 말까지 했을 정도예요.
서울 생활은 만족스러웠나요?
서울에 도착해 처음 간 곳이 홍대거리였고 게다가 금요일이었어요. 캐리어를 끌고 지하철 홍대입구역 9번 출구로 나가는데 사람이 밀리는 걸 처음 경험했어요. 차가 밀리는 건 알았는데 사람이 밀리는 건 처음 봤죠. 홍대 앞 고시원에서 살았는데 처음에는 너무 좋았어요. 인터넷으로만 보던 예쁜 물건들을 내가 직접 가서 살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고요. 3년 정도는 신나게 놀고 즐겼던 거 같아요. 특히 제일 좋았던 건 하루 종일 밖에 있어도 아는 사람을 한 명도 만나지 않고, 아무도 저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이었어요. 그러다 하고 싶은 디자인 일도 하고, 놀고 싶은 곳도 다 가보고 나니까 뭔가 하고 싶고, 가고 싶은 욕구가 점점 사라졌어요. 서울 생활이 좀 재미없어진 거죠.
그냥 일상이 되고 나니 서울 생활이 별 감흥이 없었군요.
맞아요. 하지만 그때도 완도에 내려가서 살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러던 중 직장을 그만두고 엄마 얼굴도 볼 겸 쉬고 싶어 완도에 내려갔는데 완도가 너무 좋더라고요. 예전에는 맨날 소풍 가던 바다도 싫고 섬도 싫었는데, 학창 시절 놀러 다니던 곳이 그렇게 예쁘고 좋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마음이 단단해지고 그만큼 성장하고 나니 학창 시절 주변 사람들의 참견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냥 단순한 관심이었고, 그마저도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죠. ‘내가 서울 생활이 좀 지루해지고 피곤해진 이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서울에 다시 올라가면 행복하지 않겠다. 이 마음을 충분히 해결하고 올라가야 서울에서 다시 행복하게 살겠다’는 생각이 들어 완도에서 시간을 보내게 됐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완도에 정착해야겠다는 마음은 아니었네요?
네, 그냥 쉼을 좀 가지려는 거였어요. 제가 친구들한테 뭔가 해주는 걸 좋아하는데 마침 사진관에서 일했던 경험도 있어서 친구들 증명사진을 찍어줬어요. 마땅히 사진 찍을 곳이 없어 서울이나 도시로 나가던 친구들이 정말 좋아하면서 “너 같은 애가 여기 와서 괜찮은 사진관 하나 차리면 정말 좋겠다”고 했는데 제가 그 말을 듣고 밤에 잠이 안 오는 거예요. 제가 사진 찍는 걸 워낙 좋아하거든요. 포토샵도 자신 있고요. ‘어? 그거 진짜 내가 하고 싶은데?’라고 생각하다가 서울에 올라가서 당장 사진 학원에 등록하고 전문적으로 사진을 배웠어요. 그렇게 2년 정도 준비한 뒤에 완도로 완전히 내려왔죠.
김유솔 이장은 다 계획이 있었던 거군요.
2019년 2월에 내려와서 사진관 개업 준비를 열심히 하고 5월에 오픈했어요. 사람들은 서울에 올라갔다가 다시 고향에 내려오면 뭔가 하던 일이 잘 안 돼 돌아온 줄 알아요. 다행히 저는 사진관을 한다고 하니까 ‘아, 실패해서 내려온 게 아니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안심되면서 완도 생활을 더 잘할 수 있었어요.
“보통 고향에 있으면 ‘너 아직도 시골에서 뭐해?’ 그러잖아요.
반대로 ‘너 아직도 서울에서 뭐해? 얼른 완도로 내려와’라고 할 수 있게
멋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어요”
핫플 완도를 만드는 것이 목표
이장 업무와 사진관 운영 외에 또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완망진창’이라는 단체를 운영하고 있어요. 완도에 내려와 지내면서 친구들과 문화 기획자 수업을 들었어요. 완도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완도에는 쇼핑몰도 없고, 예쁜 가게도 없고, 멋지고 힙한 카페도 없고…”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강사님이 “그럼 너희가 만들면 되지. 왜 답답하게 불평불만만 하고 있어?”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게 자극이 돼 다 같이 뭐라도 하자고 해서 모이게 됐죠. 완망진창이라는 이름은 ‘완도+엉망진창’이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청년이라 처음부터 잘할 수 없으니 엉망진창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성장하자는 뜻을 담고 있어요.
완망진창. 한번 들으면 안 잊히는 이름이네요. 어떤 일을 했나요?
완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사진을 모아 전시회도 하고, 맛집과 카페 등 여행자가 완도의 즐길 거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지도도 만들었어요. 대도시에 가지 않더라도 예쁘고 좋은 수공예품을 비롯한 물건을 살 수 있는 플리마켓도 열었고요. 어르신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도 진행해 어르신들에게 휴대폰 사용법을 알려드렸어요. 지금은 청년마을 사업을 하고 있는데, 외지에 있는 청년들이 완도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사업이에요. 마을에서 ‘한 달 살기’를 한 후 마을에 정착해 살 수 있도록 하는 거죠. 참가했던 5명 중 3명이 정착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 이제 올해 하반기에는 그들과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계획이에요.
젊은 이장은 뭐가 달라도 다를 것 같은데 어떤가요?
마을 사업 하면 흔히 꽃 심고 길 정리하는 것이 기본이잖아요. 물론 길이 예뻐지기는 하지만 꼭 그걸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우리 마을은 작년에 마을 사업으로 한글 학교 전시회를 열어 어르신들이 자녀들에게 쓰신 편지 등을 전시했어요. 올해는 잡지를 만들고 싶어요. 마을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어르신들의 이야기도 담아야죠. 경로당 어머니들의 음식 솜씨가 정말 좋은데 설탕국수 같은 레시피도 싣고 싶어요. 그런데 사실 마을 사람들의 의견은 반반이에요. “그런 걸 누가 사겠어”, “누가 보겠어?” 하시는데 궁금하지 않나요? 수익보다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재미있고 의미 있는 사업들을 하고 싶어요.
아무래도 어르신들은 좀 보수적인 부분이 있죠?
그래도 우리 마을 어르신들은 저보다 열려 있어요. 제가 피어싱도 하고 타투도 했는데 처음에는 다 숨기고 다녔어요. 처음 이장으로 부임했을 때는 코로나19 때문에 마스크를 썼는데, 어느 날 어머니들이 “이장, 약과 먹고 가” 하셔서 아무 생각 없이 마스크를 내리고 먹다가 아차 싶었죠. 그걸 본 어르신이 “이장, 코걸이 했네. 이삐네(이쁘네)” 하시는 거예요. 그다음부터는 어르신들이 저를 보면 “이장, 코걸이 바뀌었네?” 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세요. 일부러 말하지 않으시기도 하고요.
완도를 알리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완도 자랑 좀 해주세요.
사실 너무 유명해질까 봐 걱정이에요.(웃음)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곳이야 많겠지만 완도에는 나와 바다만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장소가 되게 많아요. 그곳들을 다 차로 쉽게 갈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고요. 완도에 작은 섬이 많은데 바다 색깔이 해외 바다 같아요. 사람이 붐비지 않아 여유롭게 차박이나 야영을 즐길 수 있죠. 나 혼자 그 섬들을 전세 내서 즐기는 느낌이 들어 제대로 힐링할 수 있어요.
귀향이나 귀촌을 꿈꾸는 청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완도에서 한 달 살기 할 사람을 뽑을 때 가장 중요하게 본 것은 다양한 직업군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과 여기서도 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물 좋고 산 좋은 곳도 결국은 사람이 사는 곳이라 지속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해요. 물론 일을 하다 보면 지칠 수도 있지만 사람이 적다는 것이 장점이 될 수 있죠. 또 도시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 큰 위안감을 줘요. 우리가 해외여행을 가면 근본적인 문제에서 멀어지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잖아요. 하지만 귀향이나 귀촌을 도피처로 생각하면 절대 안 됩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지만, 중요한 건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이 분명 있다는 것이죠.
앞으로 완도 용암마을을 어떻게 바꾸고 싶은가요?
완도가 제주도와는 또 다른 제주도가 됐으면 좋겠어요. 제주도는 멋쟁이가 많고 가수 이효리가 사는 곳이잖아요. 완도는 이효리는 안 살아도 멋있는 사람이 가득한 곳, 제주도가 하와이라면 완도는 나폴리 같은 느낌? 그런 곳으로 발전했으면 좋겠어요. 엊그제 강의를 하나 들었는데 한 교수님이 “너 아직도 서울에서 뭐 해?”라는 말을 할 수 있게끔 하자고 하셨어요. 보통 고향에 있으면 “너 아직도 시골에서 뭐 해?” 그러잖아요. 반대로 “너 아직도 서울에서 뭐 해? 얼른 완도로 내려와!”라고 말할 수 있는 완도에 사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완도의 문화생활과 연결되는 좋은 브랜드의 제품을 만들고 싶은 것이 제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