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6일이면 ‘우리 시대의 지성’으로 불리던 이어령 전 장관이 영면한 지 1년째가 된다. 아내 강인숙(90세) 영인문학관 관장이 자전적 에세이집 <글로 지은 집>(열림원>을 펴냈다. 부제는 ‘구십 동갑내기 이어령 강인숙 부부의 주택 연대기’다. 단칸방 신혼집에서 각자의 서재가 있는 집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북적이고 때로는 쓸쓸했던, 64년 부부 일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부부에게는 집이 필요했다. 글을 쓰는 남편과 아내 모두 서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셋이었다. 부부에게는 그냥 집이 필요한 게 아니라 방이 많은 아주 큰 집이 필요했다. 그래서 사람도 집도 하나 없는 텅 빈 산 중턱에 외딴집을 지었다. 평창동 499-3. 일곱 번의 이사를 거쳐 마침내 원하는 크기의 집을 짓는 데 성공한 것은 1974년이었다. 강인숙 관장은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기뻤던 해로 1974년을 기억한다. 남편에게 원하는 서재를 만들어준 해였다. 이어령은 좋은 것을 다 주고 싶은 남편이었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 내 고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서재에서 강 관장을 만났다. 올해 구순이지만 정정한 모습이었다. 손사래를 치며 간신히 버티는 중이라 했지만, 곱고 정갈했으며 빈틈이 없었다. 인터뷰 내내 이 전 장관에 대한 애정과 그보다 더한 존경심이 묻어났다.
“걱정은 감성적인 남편 몫, 나는 결정자 역할”
이번 겨울은 어떻게 보내고 계신지요. 조금 적적하진 않으신가요?
두 사람 일을 혼자 해야 하니까 바빠요. 우선 1주기 준비를 해야 하는데, 추모식과 전시회를 따로 해서 손이 두 배로 갑니다. 늘 하던 영인문학관 일도 해야 하고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6개월간 사람이 와서 ‘이어령 자료 아카이빙’을 만들고 있었어요. 3년은 더 걸려야 정리될 것 같아요. 이 선생님 서재도 곧 일반에게 공개되는데, 빨라야 가을에나 가능할 것 같아요. 책 정리만 1년이 걸렸네요. 바빠서 다행이죠. 긴장해서 늘어지지도 않고. 늘어지면 못 일어나요.
고인은 소문난 다독가였다. 세상을 뜨기 직전에도 책을 샀고, 손에서 책을 놓지 못했다. 서재에는 고인의 손때가 묻은 책들과 책상, 큰 탁자와 소파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곳곳에 강 관장이 애지중지하는 고가구도 보였다. 볕이 잘 드는 방이었다.
요즘 책도 내고 인터뷰도 종종 하시니 좋습니다.
인터뷰는 조심스러워 잘 안 했는데, 이 선생님 1주기도 곧 다가오니 겸사겸사 하고 있어요. 인터뷰라는 게, 그쪽에서 하는 말이 이쪽에서는 곤란한 것들이 있잖아요. 예전엔 한 인터뷰에서 우리 이 선생님이 완벽주의자라 칭찬을 잘 안 하고, 나도 애들한테 칭찬을 잘 안 한다고 했더니 “욕만 먹고 살았다”고 나온 거예요.(웃음) 그런 오해가 생깁디다. 그래서 잘 안 해요.
사진기자가 촬영을 하자 강 관장이 말을 거들었다.
“사진 찍는 건 영 안 좋아해요. 증거인멸.(웃음) 남의 앞에 안 나서야 할 나이인데, 입장이 이러니까 할 수 없이 합니다. 나를 찍기보다는 이 가구 좀 찍어봐요. 내 컬렉션이야.(웃음)”
강인숙
문학평론가, 국문학자.
1933년 함경남도 갑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숙명여자대학교 국문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평론가로 등단했으며, 건국대학교 교수와 문학평론가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논문집 <일본 모더니즘 소설 연구> <박완서 소설에 나타난 도시와 모성> <김동인> <자연주의 문학론 1·2>, 수필집 <언어로 그린 연륜> <생과 만나는 저녁과 아침> <네 자매의 스페인 여행> <아버지와의 만남> <어느 고양이의 꿈> 등 다수이며, 옮긴 책으로는 콘스탄틴 버질 게오르규의 <25시> <키랄레사의 학살>과 에밀 아자르의 <가면의 생> 등이 있다. 현재 건국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영인문학관 관장이다.
못다 한 말이라…, 늘 격려하고 칭찬했어야 하는데
미흡한 부분만 지적하지 않았나 반성하고 있습니다.
강 관장님 역시 문학평론가이자 국문학자로 평생 연구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다. 연구하는 분야(프랑스 문학과 일본 근대문학을 비교문학적 시각에서 보는 연구)가 조금 낯설기도 한데요.
이 선생님은 새것을 개척해나가는 전진형이라면, 나는 외골수예요. 비교문학은 일본어, 프랑스어, 독일어까지 가능해야 연구할 수 있는 분야라 힘은 들고 생색은 나지 않아요. 그걸 평생 했는데, 내가 남자였으면 자연주의 문학회를 만들고 세미나를 열면서 적극적으로 전면에 나섰을 텐데 나는 그럴 시간이 없었어요. 엄마, 아내라는 다른 직업도 있었으니까요. 힘닿는 데까지 책을 내놓을 생각이에요. 그걸 해놓지 않으면 또 원점으로 돌아가서 누군가가 다시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내가 ‘설거지’한다고 표현해요. 문학사의 설거지요.(웃음) 2020년에 평론 전집을 냈는데 1년에 50권씩은 나가요. 내 돈 들여 내야 하는 책이지만 다음 연구를 하는 데 기초 자료로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최근에 자전적 에세이 <글로 지은 집>(열림원)을 내셨습니다. 단칸방 신혼집에서 각자의 서재가 있는 집에 이르기까지의 이어령·강인숙 부부의 주택 연대기입니다. 평생 연구를 하고 글을 쓰셨던 두 분이기에 서재의 의미가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일터가 집으로 들어온 것이죠. 우리 연구는 사진이며 책이며 자료가 많이 필요해요. 그래서 왔다 갔다 들고 다니지 못해요. 그러니 남들보다 집(서재)이 더 중요했지요. 저녁에 집 밖에 안 나가고 계속 글을 쓰니까요. 그래서 결혼 후 다른 부분은 다 빼고 집에만 집중했어요. 누구나 다 그렇게 노력해 집을 만들어가는 것이고, 그 과정이 재미있기도 하고요. 이 집에 이사 온 지도 50년이 됐어요. 위치가 조금 불편해도 글을 쓸 자리가 있으니 이사를 안 갔어요. 당시만 해도 산 전체에 우리 집 딱 하나였어요. 나중엔 랜드마크가 돼서 “이어령 씨 집 윗집이야, 아랫집이야” 뭐 그렇게 된 거죠.
이 전 장관 서재는 종종 찾았는데, 강 관장님 서재는 못 봤네요.
내 서재는 학생들 방만 해요. 작지요. 그리고 책이 없어요. 필요한 책만 가져다가 읽고 다시 꽂아두는 식이에요. 여기서도(이 전 장관의 서재) 빌려가고, 아래서도 빌려가고 그러죠. 저는 큰 방을 원치 않았는데, 요즘에 드는 생각이 그게 ‘사람의 크기’가 아닌가 싶어요. 일을 많이 하지 못했거든요.
이어령 전 장관은 2015년 대장암 진단을 받았다. 생명에 시한이 생기자 조급해졌다. 쓰다가 끝내지 못한 글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혼자 글을 쓸 수 있는 고독한 시간을 갈망했다. 아내인 강 관장도 자연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삶을 정리해야 할 시기였다. 그래서 책을 쓰기 시작했다. 구순이 가까운 동갑내기 부부가 한 사람은 아래층에서, 한 사람은 위층에서 글을 쓰면서, 각기 자기 몫의 아픔과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 세월이 계속됐다.
에세이의 글 중에 “둘만 남는 세월이 왔다. 나간 자리가 살펴져서 슬프고 외로웠다. 우리는 그 외로움을 공부하고 글 쓰는 일로 메꾸어갔다”라는 말이 기억납니다.
다 그러고 사는 거겠죠. 글을 쓰려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버리고 혼자 있는 건 외롭죠. 구제 불능의 외로움. 이 선생님은 그렇게 하고도 모자라 10년에 한 번씩 외국에 가서 1년씩 살다 왔어요. 주로 일본에 가셨는데, 거기 가면 더 외롭고 고독하지만 아주 깊이 있는 글을 쓸 수가 있어요. 거기선 “주례해달라”, “축사해달라” 하는 부탁들이 없으니까. <축소지향의 일본인>(1982)(당시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상당한 반응이 있었다. 영어와 프랑스어로 번역·출간됐고, 고전적 명저 <국화와 칼>, 당시 인구에 회자되던 <재팬 애즈 넘버원(Japan as No.1)>과도 비견된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도 그렇게 완성된 책이에요.
이 전 장관은 혼자 글을 쓸 수 있는 고독한 시간을 갈망하셨군요.
꼭 필요한 시간입니다. 일본에 계실 때 이 선생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한 달에 두어 번 가서 살림을 조금씩 돌보는 거였어요. 이불보를 여러 개 준비해 세탁기에 집어넣기만 하게끔 해두고 얼른 도망 오는 식이죠. 가정과 사회를 피해서 갔는데 내가 거기 오래 있으면 방해가 되니까. 2004년에는 일흔이 넘어서도 혼자 문학연구소의 관사에 가 계셨으니 그 기간이 힘들었을 겁니다. 오죽했으면 그곳에 있는 다른 연구자들이 “장관까지 했다는 사람인데 며칠이나 견디나 보자” 그랬대요. 식당에 가면 밥이 있는데, 줄 서서 기다리기 싫다고 직접 만들어 잡수셨어요. 식당에 나타나지도 않고 1년을 버텼으니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오롯이 집안일은 관장님 몫이었겠네요.
요즘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나처럼 오래 살면 1, 2년이 별거 아니라는 생각. 내가 따져보니 나는 교수도, 책 내기도 남편보다 딱 10년 늦게 됐더라고요. 세 아이를 키우다 보니 기본적으로 3살 정도는 길러놓아야 했던 거죠. 한데 그 10년이 얼마나 행복한 10년이었습니까? 아이들 키우면서 배운 게 많으니까 손해 난 건 없어요. 더구나 남보다 많이 살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남편이자 아빠로서는 어땠나요?
성적이 나쁠 수밖에 없지요. 늘 잘하려고 노력했지만 시간이 없어 못 도운 거니 봐드려야죠. 오죽했으면 우리 아들이 자기는 아이와 놀 시간은 꼭 확보하면서 살겠다고 그랬어요. 이해할 수 있고 존경할 수 있는 남자를 만나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돌아가신 다음에 아이들이 아빠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는 걸 보니까 좋은 아빠였던 것 같아 기쁩니다.
그동안 여덟 번 이사를 다니셨어요. 성북동 골짜기 셋방, 삼선교 북향 방, 청파동, 한강로 집, 이 전 장관님의 좋은 글이 많이 나와서 독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던 신당동 집, 그리고 박경리 선생, 김지하 시인과 왕래하던 성북동 집과 현재의 평창동까지요.
제가 어릴 때는 아버지 사업이 망해 늘 집을 줄여 이사를 다녔어요. 그에 비하면 이사하는 건 힘들어도 어제보다 방이 더 커지고, 방이 하나씩 늘고 하니까 덜 힘들었죠.
유독 기억에 남는 집이 있을까요?
제일 작았던 한강로 집이요. 처음으로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집이었어요. 예전의 셋방은 한 집에서 방만 나눠 쓰는 셰어하우스 개념이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삼각지 집은 남과 같이 살지 않는 첫 집이었어요. 크기가 문제가 아니죠. 구조상 옆집 말소리도 들리고 안방은 낮에도 불을 켜야 했지만 그럼에도 그때가 너무 좋았어요.
앞서 “좋은 것을 다 주고 싶은 남편”이라고 하셨는데, 이 전 장관은 어떤 남편이었나요?
내 삶에서 항상 우선순위 1번은 남편이어서 지금도 무언가 도울 일이 있으면 만사 제쳐놓고 합니다. 그렇다고 100%는 아니고요.(웃음) 다 주고 싶은 면과 그렇지 않은 면이 있지요. 글쎄, 다 준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우리 선생님이 나에게 돈을 다 줬어요. 근데 그게 단순히 돈이 아니에요. 가진 걸 다 준다는 거잖아요. 다 주면 얼마나 불편해요, 주머닛돈, 쌈짓돈이 다 다르잖아요.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주는 거니까요. 그렇다고 삶을 다 준 건 아니고, 어느 부분만 다준 거죠. 나도 어느 부분은 다 줬어요. 예를 들어 저기 있는 장롱은 내 컬렉션이에요. 내가 골동품을 참 좋아해요. 그 컬렉션 중에서 제일 좋은 건 늘 “당신이 다 가지고 가” 했지요. ‘프라이어리티 넘버원’이죠. 그래서 이 방에 필요한 것도 다 내 것을 가져온 거예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이 전 장관과 인터뷰했을 때, 아내가 누가 사용한지도 모르는 가구들을 사 온다고 푸념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귀신 나올지 모른다고 덧붙이셨던 것 같기도 하고요.
나는 낡은 게 좋아요. 절대 내 골동품은 누굴 안 줘요. 선물도 안 해요. 집은 좁은데 자꾸 사니까 언젠가는 이 선생이 “다음에 또 사면 이고 있어” 하셨어요. 한국에는 다락이라는 공간이 있잖아요. 그래서 내가 “걱정 말아. 내가 다 처리할 테니까” 하고 말했죠.(웃음)
그런 분, 프라이어리티 넘버원이었던 분이 이제는 옆에 없습니다.
그냥 뭐…,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이제 곧 이 전 장관이 영면한 지 1년이 되네요.
그렇게 지나가네요. 돌아가시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 아들이 “엄마 이상해. 오래전에 돌아가신 것 같아. 왜 그러지?” 하더라고요. 아마도 투병 과정이 길어서 그런 것 같아요. 지금은 오히려 오래됐다는 느낌이 없어요. 돌아가실 무렵에는 여러 번 고비를 넘겨 모두 얼이 빠져 멍하니 있었어요. 시간이 지나니까 문득 정말 안 계시구나 하는 거죠. 사람이 참 독해요. 박완서 선생 글에 보면 어머니가 아들이 죽고 배급이 나온 쌀로 밥을 해 먹으며 어떻게 이게 목구멍으로 넘어가나 하면서도 꾸역꾸역 다 먹는다는 거예요. 누가 와서 먹으라고 부추기면 먹게 되고, 먹으면 살게 되고, 그 힘으로 장례식도 치르게 되고. 생사 소멸이라는 게, 질서가 다 돼 있구나 싶어요.
<글로 지은 집>에는 이 전 장관에 대한 이야기가 심심찮게 등장합니다. 생전에 원고를 읽으셨던가요?
“재미있다. 재미있다” 하시며 다 읽으셨어요. 사실 이 선생님에 대한 언급을 저는 질색하는 편인데, 네 것과 내 것을 분리할 수 없는 것이 부부이니 할 수 없지요. 하지만 혹시라도 남편을 다치게 할까 봐 마지막까지 손이 떨렸던 것도 사실입니다.
잠깐 언급하셨지만 7년간의 투병 생활을 옆에서 지켜보는 심경이 어떠셨습니까?
아주 몸져누워 있는 생활은 아니었어요. 활동하실 때는 멀쩡했고, 열정적이기까지 했으니까요. 한데 그 순간이 지나면 리액션이 왔어요. 힘 있게 말하면 힘 있게 아픈 식이었죠. 사람이 다 늙는 게 아니라, 이 부분은 성하고 이 부분은 환자고 그래요. 물론 그게 플러스 요인이 되기도 해요. 활동하는 시간엔 환자인 걸 잊어버리니까. 한데 몸이 안 좋아서 나중에 제가 못 하게 했어요.
나는 낡은 게 좋아요. 내 골동품, 그러니까 내 ‘컬렉션’은 절대 누굴 안 줘요.
이 선생에게만 최고 좋은 걸 줍니다.
집은 좁은데 자꾸 사니까 언젠가는 “다음에 또 사면 이고 있어” 하셨어요.(웃음)
상대방 역시 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잊을 만큼 일하실 때 열정적이셨어요. 그럼에도 얼굴이 많이 야위셨던 기억이 있어요.
근데 살이 빠지면서 얼굴이 예뻐지셨어요. 많이 주무시니까 핏발이 서 있던 눈동자도 맑아졌고. 그 모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살이 빠지는데도 예쁘구나’ 하는. 그럼에도 마지막에는 무너지기 마련이라 그 단계에는 기자들에게 사진을 못 찍게 했어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이 전 장관은 죽는 순간까지도 죽음에 대해 탐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죽음을 오롯이 느끼고자 노력하셨다고 하는데, 어떤 모습이셨나요?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맑은 정신으로 계셨어요. 보통 헛소리나 이상한 행동을 한다고 하는데, 그런 걸 안 하셨어요. 그 전날까지 누굴 만났고, 돌아가시던 날도 손자들과 전화 통화를 하셨어요. 그렇게 맑은 정신이었고, 그러다가 주무시듯이 돌아가셨어요. 통증이 시작돼 진통제를 두 번 잡수시고는 돌아가셨는데, 진통제 기운이 있어 편안하게 가셨죠. 주사 놓으면 더 연명된다고 하는데 주사를 거부하셨어요. 그 전엔 식구들이 난리 쳐서 맞으셨는데, 마지막엔 “10시간 걸려 주사를 맞고 이틀을 더 살더라. 그걸 왜 연장하느냐” 하셨어요. 의미 없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신 거죠. 그래서 주사를 가지고 온 사람을 돌려보내고 사흘 만에 돌아가셨어요. 체력이 모자라 그런 거지 병 때문에 돌아가신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병 때문이라면 몸부림칠 만큼 아픕니다. 그래도 너무나 아팠을 거예요. 죽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강 관장님은 죽음이 두렵지 않으신가요?
두려워도 할 수 없지요. 난 할 수 없는 건 양보해요. 덧붙이자면, 살고 싶지도 죽고 싶지도 않은 상태여서 죽음도 삶도 다 살뜰합니다. 일할 수 있을 때는 이승이 너무 좋고, 힘이 빠질 때는 저승도 무방하고.
이 전 장관이 언제 가장 그립습니까?
그 사람하고만 할 수 있는 토픽이 생겼을 때. 예를 들어 오늘 어떤 일이 일어났는데, 이 선생과 나밖에 그 내막을 모르는 거예요. 막 달려 올라가서 “여보, 여보” 하면서 말해야 하는데, 이제 그게 안 되잖아요. 그럴 때가 제일 답답해요. 누구 말처럼 등 긁어줄 사람이 없어 생각나는 건 아니고요.(웃음) 떠나기 전 1년을 서로 아래층과 위층에 살았어요. 간병인이 필요한 단계니까. 서재가 잠이 더 잘 오신대요. 그래서 아래층에 있으면 오히려 안 계신 느낌이 안 들 때도 있는데, 문득 ‘이제 거기 가도 없다’고 생각하면 눈물보다 더 진한 것들이 습격해옵니다.
유독 기억에 남는 모습이 있나요?
7년 동안 여기서 진지 드시러 아래로 내려오셨어요. 매일 저녁에 진지 드시고, TV 잠깐 보고 올라가셨지요. 엘리베이터를 안 타고 걸어 내려오셨는데, 내려올 시간이 아닌데 문득 오실 때가 있어요. 무슨 할 얘기가 있을 때죠. 책 보다가 뭔가를 발견해 신나게 내려오시기도 하고요. 뜻하지 않게 계단으로 내려와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마지막 무렵에는 다리가 부실해지니까 걸어오는 능력이 있는 게 매번 고마웠지요.
이 전 장관에게 못다 한 말이 있으신가요?
늘 격려하고 칭찬했어야 하는데, 미흡한 부분만 지적하지 않았나 반성하고 있습니다.
이 전 장관이 우리 시대에 어떤 흔적을 남겼다고 생각하시나요?
그건 남들이 할 얘기이긴 한데요, 이 선생은 내가 본 가장 크리에이티브한 사람이었어요. 우리 선생님은 부전공이 없어요. 다 전공이에요. 뭐 물어보면 언제나 거기에 대해 전문적인 대답이 나오죠. 그 양반은 예술 작품이 완성도가 떨어지는 걸 견디지 못했어요. ‘이상문학상’은 유일하게 스폰서가 없이 성공한 문학상이에요. 이 선생은 그 심사를 상당히 오래 했어요. 보통 문단은 네트워크가 있는데, 이 선생은 문단에 모임이 없어요. 그래서 정실에 얽매이지 않고 작품으로만 뽑을 수 있었어요. 작품만 좋으면 그날로 그 작가와 친구가 되는 사람이에요. 덕분에 양 진영에서 고루 사랑을 받았지요. 덕분에 혼자 있어도 그런 면에서는 외롭지 않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