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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어령 전 장관 아내 강인숙 관장 인터뷰(2)_남편이 남긴 인생 철학, 도전하는 정신

그러니까 기자가 마지막으로 평창동을 찾은 것은 ‘평창동 터줏대감’ 이어령 전 장관과의 식사 자리였다. 이 전 장관이 없는 평창동의 겨울은 유난히 차디찼다. 그의 아내 강인숙 관장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On February 2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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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어령 전 장관은 1972년 월간 문예지 <문학사상>을 창간했고, 출판사 ‘문학사상사’를 설립했다. 1977년 국내 최고 권위의 문학상 중 하나로 꼽히는 이상문학상을 제정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행사 기획자로도 활약했다. ‘벽을 넘어서’라는 구호와 함께 굴렁쇠 소년 기획도 모두 고인의 아이디어였다. 장관 시절엔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도 설립했다. 강 관장은 가장 좋아하는 이 전 장관의 글로 <문학사상> 창간사를 꼽았다.


이 전 장관이 남긴 인생 철학을 꼽자면요.
항상 도전하는 정신이지요.

이 전 장관이 기획한 일은 실패한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수학자와 시인의 자질을 동시에 지닌 분이 아니셨나 싶습니다.
우리나라에 새 컴퓨터나 새 기계가 나오면 그 회사에서 선생님에게 제일 먼저 가지고 왔어요. 사용해보고 모니터링을 해주면 수정해서 시판됐어요. 나중에는 하도 여러 제품이 나오니까 관뒀는데, 그렇게 첨단적인 양반이었죠. 떠나시기 전 마지막 카드 청구서를 보면 기계를 산 것과 누구 밥 산 게 다예요. 밥 사는 걸 그렇게 좋아하셨어요. 새 기계도 마찬가지인데, 새 기능을 가진 기계가 나오면 직접 꼭 써봐야 직성이 풀려요. 그래서 꼬부랑글씨의 청구서도 많았어요. 학교 다닐 때부터 남들이 안 보는 해외 과학 잡지도 많이 보셨는데, 거기에 나오는 리뷰들을 읽고 기계를 구매하셨어요.

기자에게도 일본 아키하바라 전자 상가 얘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한국에 없는 전자 기계를 살 수 있는 곳이었어요. 그래서 좋아하셨어요. 한데 이 집안 식구들이 다 그래요. 우리 시아버님이 시골에서 정미소를 운영하셨는데, 어느 날 정미 기계가 배달돼 온 거예요. 한데 그 큰 걸 설명서도 보지 않고 다 조립했어요. 그게 뭐랄까, 감각적으로 오는 것 같아요. 우리 아들도 중학교 때 일본어로 된 설명서가 있는 기계를 혼자서 조립을 다 해요. 내가 그걸 ‘기계에 대한 감성적 접근’이라고 말했는데, 그게 아주 발달돼 있는 사람들이에요. 르네상스 때가 만족을 모르고 계속 새것에 미치는 시대였어요. 고전주의와 새것이 혼합된 시대. 이렇듯 이원적인 게 있어야 문화가 발달해요. 이 선생도 그런 양면성이 있었어요. 미적분도 너무 잘해서 대학 때 수학과 전문 강의를 들었죠. 너무 재미있대요.

이 전 장관이 관장님보다 훨씬 감성적이라고 들었습니다.
따뜻한 남도 출신(충청남도 아산)이라 더 그래요. 서정시는 남쪽에서 나온다고들 하잖아요. 한쪽이 그렇게 과민하면 후천적으로 한쪽은 덜해지게 돼요. 걱정은 그쪽에서 다 해주니까. 그래서 나는 감성을 죽여가려고도 했던 것 같아요. 보통 이 선생이 걱정하고 내가 결정하는 역할을 했어요. 보통 그런 건 남편이 하잖아요. 덕분에 후천적으로 걱정을 안 하고 산 것 같아요. ‘나는 늘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하고 살았어요. 예술가들이 대체로 다 그래요. 김동리 선생님은 비가 지하실로 쏟아져 들어오면 너무 버거워 앓아누우셨대요. 그럼 누가 해결해요? 여사님이 물을 퍼내죠. 언젠가 어느 화가 따님이 자기네 집은 문도 꽝 하고 못 닫는대요. 그렇게 식구들이 조심하고 살았다는 거예요. 결국 온 가족이 같이 쓰고 같이 그리는 거예요.


아래는 이 전 장관이 쓴 시 한 편이다.

‘정말 그럴 때가’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 어디 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누가 “괜찮니”라고 말을 걸어도 / 금세 울음이 터질 것 같은 / 노엽고 외로울 때가 있을 겁니다.
내 신발 옆에 벗어놓았던 작은 신발들 / 내 편지봉투에 적은 수신인들의 이름 / 내 귀에다 대고 속삭이던 말소리들은 / 지금 모두
다 어디에 있는가. / 아니 정말 그런 것들이 있기라도 했었는가.
그럴 때에는 연필 한 자루 잘 깎아 / 글을 씁니다.
사소한 것들에 대하여 / 어제보다 조금 더 자란 손톱에 대하여
문득 발견한 묵은 흉터에 대하여 / 떨어진 단추에 대하여 / 빗방울에 대하여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 어디 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시집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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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그리울 때는 그 사람하고만 할 수 있는 토픽이 생겼을 때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 어떤 일이 일어났는데, 이 선생과 나밖에 그 내막을 모르는 거예요.
막 달려 올라가서 “여보, 여보” 하면서 말해야 하는데, 이제 그게 안 되잖아요.
떠나기 전 주로 서재에서 지내셨는데, 문득 ‘이제 거기 가도 없다’고 생각하면 눈물보다 더 진한 것들이 습격해옵니다.

“마지막 카드 청구서, 전자 기기 구매가 반 이상”

아내로서는 조금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늘 바쁜 남편, 산 같은 남편이었으니까요.
남편은, 어떤 남편이어도 다 힘들어요.(웃음) 반대로 옆에 붙어서 “뭐 해줄게, 뭐 해줄게” 하는 남자도 얼마나 피곤하다고요. 남하고 같이 살려면 한쪽 눈을 감아야죠. 남자도 마찬가지예요. 마누라가 옆에서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하면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남편의 시간을 아껴주려고 허덕허덕 바쁘게 사셨겠습니다.
관혼상제가 있으면 내가 대신 가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렇지 않으면 다음 날 글이 못 나가니까. 억울하지 않냐고 묻는데, 그렇지 않아요. 대신 우리 선생님은 누가 옷을 입혀주고 넥타이 골라주는 건 안 좋아하셨어요. 그런 시중은 들 필요가 없는 양반이라 남들이 불편하다는 게 우리는 편한 것도 있어요.

다시 태어나도 이 전 장관과 결혼하시겠습니까?(웃음)
글쎄, 다시 태어나면 결혼은 하고 싶지가 않지.(웃음) 하지만 한다면 이어령 선생과 한다고 그랬어요. 존경할 수 있으니까. 근데 결혼 자체를 안 할 것 같아요. 내가 워낙 ‘고양이과’예요. 혼자 있는 걸 좋아해요. 드디어 벌 받아서 혼자 남아 있지만, 혼자 살아서 자유롭다면 고독한 걸 참아야죠.


살고 싶지도 죽고 싶지도 않은 상태여서 죽음도 삶도 다 살뜰합니다.
일할 수 있을 때는 이승이 너무 좋고, 힘이 빠질 때는 저승도 무방하고요.

벌 받아서 혼자 남았다고 하셨는데, 혼자 지내니 어떠신지요?
평생을 손님들이 들락날락하는 집에 살아서 혼자 있어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애초엔 이 선생이 돌아가시고 혼자 있어야 하는 게 상당히 겁이 났어요. 한 서너 달은 힘들었어요. 일하던 아주머니도 그만두게 했더니 자식들이 걱정이 대단한 거야. 그래서 매일 저녁에 오는 거예요. 그것도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예전처럼 살아. 안 그러면 내가 사는 게 미안해지잖아” 했어요. 7년간 아버지가 편찮아서 자식들이 고생을 많이 했어요. 한데 나까지 뭘 의지하면 너무 오래 고생시키는 것 같아 “많이 아프면 그때 부탁할 테니 부탁 안 하는 건 하지는 마”라고 했죠.

이 장관은 생전에 죽음이라는 화두를 던지셨어요.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그렇겠지요.
아까 말했듯이 평생 잔병치레를 안 했던 사람이 대뜸 큰 병에 걸려 7년간 고생을 했어요. 심한 단계는 아니어서 4~5년 동안은 사회 활동을 50% 정도는 했어요. 우리 선생님은 전문 간병인에게 도움을 받은 게 딱 2주예요. 그래서 운이 좋았다는 거지. 잠이 잘 안 와서 서재며 방이며 하루에 네 군데서 주무시기도 했어요. 나는 새벽에 일하니까 옆에서 괜찮으신지 늘 체크했어요. 급하면 내가 들쳐 업지는 못해도 간병인을 깨울 수는 있으니까요. 지방에 있는 아들 가족도 주말이면 늘 와서 월요일 오전까지 같이 지냈어요. 그렇게 한 2개월을 보냈어요.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아픔은 아무래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때인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더 슬픈 건 나보다 어린 이들이 떠나는 걸 볼 때예요. 우리 손자가 대학 졸업하고 죽었어요. 이후 딸이 3년 만에 죽고, 10년 만에 우리 선생님도 가신 거죠. 그 아이는 완벽한 상태의 몸에서 예고 없이 죽은 거잖아요.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날 정도로 그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우리 손자가 버클리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한국 와서 예쁜 옷도 사 입고 이태원이 놀기 좋다며 까불고 그랬어요. 사람들이 자꾸 안부를 묻기에 귀찮아서 한 친구한테는 알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모르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딸이 집에 와서 농담하다가 웃는 순간에 그 친구에게 전화가 온 거예요. 웃으면서 받았더니 “당신이 웃으니까 내가 너무 좋다. 내가 살 것 같다” 하는 거예요. 나도 몰랐는데 3년 동안 내가 웃지를 못한 거야. 우리 딸은 결혼도 해보고 아이도 낳아보고 사랑도 해보고 죽었잖아요. 이 선생님이나 나는 딸보다 30년 더 살았으니까 죽음이 안 두려운 거야. 이 선생님과 나는 아무렇지 않게 죽음에 대한 얘기를 하곤 했어요. 그런 기분이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게 한 게 아닌가 싶어요.

종교에 대한 생각도 궁금합니다. 따님도 독실한 크리스천이었고, 이 전 장관도 그 끝에 크리스천이셨습니다.
저는 크리스천은 아니지만 기독교 속에서 십계명을 다 지키고 살아요. 문밖에 있는 기독교인이라고 해요. 죽으면 아마 장례식은 기독교식으로 할 거예요. 이 선생님 없어도 기도하고 박 먹고 그럽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을까요?
그런 건 생각 안 하기로 했어요. 우리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알고 사는 건 아니니까요. 이 삶을 그냥 받아들였듯이 그것도 그냥 받아들이는 거예요. 글쎄, 그래요. 이 세상도 천국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내가 뭘 잘못하면 벌을 받아야지. 내 삶에 대한 평가는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에요. 가라는 대로 가는 거지.

CREDIT INFO
취재
하은정 기자
사진
하지영, 서울문화사 DB, 열림원 제공
2023년 03월호
2023년 03월호
취재
하은정 기자
사진
하지영, 서울문화사 DB, 열림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