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어령 전 장관은 1972년 월간 문예지 <문학사상>을 창간했고, 출판사 ‘문학사상사’를 설립했다. 1977년 국내 최고 권위의 문학상 중 하나로 꼽히는 이상문학상을 제정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행사 기획자로도 활약했다. ‘벽을 넘어서’라는 구호와 함께 굴렁쇠 소년 기획도 모두 고인의 아이디어였다. 장관 시절엔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도 설립했다. 강 관장은 가장 좋아하는 이 전 장관의 글로 <문학사상> 창간사를 꼽았다.
이 전 장관이 남긴 인생 철학을 꼽자면요.
항상 도전하는 정신이지요.
이 전 장관이 기획한 일은 실패한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수학자와 시인의 자질을 동시에 지닌 분이 아니셨나 싶습니다.
우리나라에 새 컴퓨터나 새 기계가 나오면 그 회사에서 선생님에게 제일 먼저 가지고 왔어요. 사용해보고 모니터링을 해주면 수정해서 시판됐어요. 나중에는 하도 여러 제품이 나오니까 관뒀는데, 그렇게 첨단적인 양반이었죠. 떠나시기 전 마지막 카드 청구서를 보면 기계를 산 것과 누구 밥 산 게 다예요. 밥 사는 걸 그렇게 좋아하셨어요. 새 기계도 마찬가지인데, 새 기능을 가진 기계가 나오면 직접 꼭 써봐야 직성이 풀려요. 그래서 꼬부랑글씨의 청구서도 많았어요. 학교 다닐 때부터 남들이 안 보는 해외 과학 잡지도 많이 보셨는데, 거기에 나오는 리뷰들을 읽고 기계를 구매하셨어요.
기자에게도 일본 아키하바라 전자 상가 얘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한국에 없는 전자 기계를 살 수 있는 곳이었어요. 그래서 좋아하셨어요. 한데 이 집안 식구들이 다 그래요. 우리 시아버님이 시골에서 정미소를 운영하셨는데, 어느 날 정미 기계가 배달돼 온 거예요. 한데 그 큰 걸 설명서도 보지 않고 다 조립했어요. 그게 뭐랄까, 감각적으로 오는 것 같아요. 우리 아들도 중학교 때 일본어로 된 설명서가 있는 기계를 혼자서 조립을 다 해요. 내가 그걸 ‘기계에 대한 감성적 접근’이라고 말했는데, 그게 아주 발달돼 있는 사람들이에요. 르네상스 때가 만족을 모르고 계속 새것에 미치는 시대였어요. 고전주의와 새것이 혼합된 시대. 이렇듯 이원적인 게 있어야 문화가 발달해요. 이 선생도 그런 양면성이 있었어요. 미적분도 너무 잘해서 대학 때 수학과 전문 강의를 들었죠. 너무 재미있대요.
이 전 장관이 관장님보다 훨씬 감성적이라고 들었습니다.
따뜻한 남도 출신(충청남도 아산)이라 더 그래요. 서정시는 남쪽에서 나온다고들 하잖아요. 한쪽이 그렇게 과민하면 후천적으로 한쪽은 덜해지게 돼요. 걱정은 그쪽에서 다 해주니까. 그래서 나는 감성을 죽여가려고도 했던 것 같아요. 보통 이 선생이 걱정하고 내가 결정하는 역할을 했어요. 보통 그런 건 남편이 하잖아요. 덕분에 후천적으로 걱정을 안 하고 산 것 같아요. ‘나는 늘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하고 살았어요. 예술가들이 대체로 다 그래요. 김동리 선생님은 비가 지하실로 쏟아져 들어오면 너무 버거워 앓아누우셨대요. 그럼 누가 해결해요? 여사님이 물을 퍼내죠. 언젠가 어느 화가 따님이 자기네 집은 문도 꽝 하고 못 닫는대요. 그렇게 식구들이 조심하고 살았다는 거예요. 결국 온 가족이 같이 쓰고 같이 그리는 거예요.
아래는 이 전 장관이 쓴 시 한 편이다.
‘정말 그럴 때가’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 어디 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누가 “괜찮니”라고 말을 걸어도 / 금세 울음이 터질 것 같은 / 노엽고 외로울 때가 있을 겁니다.
내 신발 옆에 벗어놓았던 작은 신발들 / 내 편지봉투에 적은 수신인들의 이름 / 내 귀에다 대고 속삭이던 말소리들은 / 지금 모두
다 어디에 있는가. / 아니 정말 그런 것들이 있기라도 했었는가.
그럴 때에는 연필 한 자루 잘 깎아 / 글을 씁니다.
사소한 것들에 대하여 / 어제보다 조금 더 자란 손톱에 대하여
문득 발견한 묵은 흉터에 대하여 / 떨어진 단추에 대하여 / 빗방울에 대하여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 어디 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시집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중에서
가장 그리울 때는 그 사람하고만 할 수 있는 토픽이 생겼을 때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 어떤 일이 일어났는데, 이 선생과 나밖에 그 내막을 모르는 거예요.
막 달려 올라가서 “여보, 여보” 하면서 말해야 하는데, 이제 그게 안 되잖아요.
떠나기 전 주로 서재에서 지내셨는데, 문득 ‘이제 거기 가도 없다’고 생각하면 눈물보다 더 진한 것들이 습격해옵니다.
“마지막 카드 청구서, 전자 기기 구매가 반 이상”
아내로서는 조금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늘 바쁜 남편, 산 같은 남편이었으니까요.
남편은, 어떤 남편이어도 다 힘들어요.(웃음) 반대로 옆에 붙어서 “뭐 해줄게, 뭐 해줄게” 하는 남자도 얼마나 피곤하다고요. 남하고 같이 살려면 한쪽 눈을 감아야죠. 남자도 마찬가지예요. 마누라가 옆에서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하면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남편의 시간을 아껴주려고 허덕허덕 바쁘게 사셨겠습니다.
관혼상제가 있으면 내가 대신 가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렇지 않으면 다음 날 글이 못 나가니까. 억울하지 않냐고 묻는데, 그렇지 않아요. 대신 우리 선생님은 누가 옷을 입혀주고 넥타이 골라주는 건 안 좋아하셨어요. 그런 시중은 들 필요가 없는 양반이라 남들이 불편하다는 게 우리는 편한 것도 있어요.
다시 태어나도 이 전 장관과 결혼하시겠습니까?(웃음)
글쎄, 다시 태어나면 결혼은 하고 싶지가 않지.(웃음) 하지만 한다면 이어령 선생과 한다고 그랬어요. 존경할 수 있으니까. 근데 결혼 자체를 안 할 것 같아요. 내가 워낙 ‘고양이과’예요. 혼자 있는 걸 좋아해요. 드디어 벌 받아서 혼자 남아 있지만, 혼자 살아서 자유롭다면 고독한 걸 참아야죠.
살고 싶지도 죽고 싶지도 않은 상태여서 죽음도 삶도 다 살뜰합니다.
일할 수 있을 때는 이승이 너무 좋고, 힘이 빠질 때는 저승도 무방하고요.
벌 받아서 혼자 남았다고 하셨는데, 혼자 지내니 어떠신지요?
평생을 손님들이 들락날락하는 집에 살아서 혼자 있어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애초엔 이 선생이 돌아가시고 혼자 있어야 하는 게 상당히 겁이 났어요. 한 서너 달은 힘들었어요. 일하던 아주머니도 그만두게 했더니 자식들이 걱정이 대단한 거야. 그래서 매일 저녁에 오는 거예요. 그것도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예전처럼 살아. 안 그러면 내가 사는 게 미안해지잖아” 했어요. 7년간 아버지가 편찮아서 자식들이 고생을 많이 했어요. 한데 나까지 뭘 의지하면 너무 오래 고생시키는 것 같아 “많이 아프면 그때 부탁할 테니 부탁 안 하는 건 하지는 마”라고 했죠.
이 장관은 생전에 죽음이라는 화두를 던지셨어요.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그렇겠지요.
아까 말했듯이 평생 잔병치레를 안 했던 사람이 대뜸 큰 병에 걸려 7년간 고생을 했어요. 심한 단계는 아니어서 4~5년 동안은 사회 활동을 50% 정도는 했어요. 우리 선생님은 전문 간병인에게 도움을 받은 게 딱 2주예요. 그래서 운이 좋았다는 거지. 잠이 잘 안 와서 서재며 방이며 하루에 네 군데서 주무시기도 했어요. 나는 새벽에 일하니까 옆에서 괜찮으신지 늘 체크했어요. 급하면 내가 들쳐 업지는 못해도 간병인을 깨울 수는 있으니까요. 지방에 있는 아들 가족도 주말이면 늘 와서 월요일 오전까지 같이 지냈어요. 그렇게 한 2개월을 보냈어요.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아픔은 아무래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때인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더 슬픈 건 나보다 어린 이들이 떠나는 걸 볼 때예요. 우리 손자가 대학 졸업하고 죽었어요. 이후 딸이 3년 만에 죽고, 10년 만에 우리 선생님도 가신 거죠. 그 아이는 완벽한 상태의 몸에서 예고 없이 죽은 거잖아요.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날 정도로 그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우리 손자가 버클리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한국 와서 예쁜 옷도 사 입고 이태원이 놀기 좋다며 까불고 그랬어요. 사람들이 자꾸 안부를 묻기에 귀찮아서 한 친구한테는 알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모르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딸이 집에 와서 농담하다가 웃는 순간에 그 친구에게 전화가 온 거예요. 웃으면서 받았더니 “당신이 웃으니까 내가 너무 좋다. 내가 살 것 같다” 하는 거예요. 나도 몰랐는데 3년 동안 내가 웃지를 못한 거야. 우리 딸은 결혼도 해보고 아이도 낳아보고 사랑도 해보고 죽었잖아요. 이 선생님이나 나는 딸보다 30년 더 살았으니까 죽음이 안 두려운 거야. 이 선생님과 나는 아무렇지 않게 죽음에 대한 얘기를 하곤 했어요. 그런 기분이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게 한 게 아닌가 싶어요.
종교에 대한 생각도 궁금합니다. 따님도 독실한 크리스천이었고, 이 전 장관도 그 끝에 크리스천이셨습니다.
저는 크리스천은 아니지만 기독교 속에서 십계명을 다 지키고 살아요. 문밖에 있는 기독교인이라고 해요. 죽으면 아마 장례식은 기독교식으로 할 거예요. 이 선생님 없어도 기도하고 박 먹고 그럽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을까요?
그런 건 생각 안 하기로 했어요. 우리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알고 사는 건 아니니까요. 이 삶을 그냥 받아들였듯이 그것도 그냥 받아들이는 거예요. 글쎄, 그래요. 이 세상도 천국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내가 뭘 잘못하면 벌을 받아야지. 내 삶에 대한 평가는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에요. 가라는 대로 가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