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대한 차분한 성찰과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한 아쉬움 항상 남아
월요일은 단소, 화요일은 스케치와 오카리나&색소폰, 수요일은 캘리그래피, 목요일은 미술과 서예, 금요일은 하모니카와 컴퓨터를 배우며 시간을 보낸다. 틈틈이 헬스와 수영, 요가를 번갈아가며 하고, 하루는 골프로 건강을 단련한다. 김희수 건양대학교 명예총장의 일주일이다. 문화센터 전체의 시간표만큼이나 빼곡한 배움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영원한 현역이라는 말을 실천하고 있다.
영등포 ‘김안과병원’으로 유명한 김희수 총장. 인생 전반기는 의사로, 그 후 고향에 건양중·고등학교와 건양대학교, 건양대학교병원을 설립하면서 인생 후반기는 교육자로 살아가고 있다. 덕분에 김안과병원은 동양 최대의 안과 전문 병원으로 입지를 굳혔고, 건양대학교는 ‘교육 명문’과 ‘취업 명문’ 대학으로 인정받고 있다. 총장직을 수행하는 동안에는 시험 기간 때마다 빵을 사 들고 도서관에서 학생들을 격려해 ‘빵 총장’, 캠퍼스 곳곳을 누비며 휴지와 꽁초를 줍고 다녀 ‘꽁초 총장’, 스쿨버스를 타고 출근하면서 학생들과 격의 없이 소통해 ‘총장 오빠’라는 별명을 얻었다.
건양대 총장으로 직접 대학을 이끌면서 6년 연속 보건의료인국가시험에서 전국 수석을 배출했고, 산업연계 교육 활성화 선도대학(PRIME),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ACE), 산학합력 선도대학 육성사업(LINC), 지방대 특성화(CK-1) 등 교육부 4대 사업에 모두 선정됐다. 2014년에는 교육부 선정 전국 4년제 대학 ‘다’ 그룹(졸업생 1000~2000명) 대학 취업률 1위(74.5%) 달성을 이루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무궁화장(2007),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교육발전 부문 2011), 캄보디아 훈센 총리 훈장(2015), 2016년을 빛낸 도전 한국인 대상(2017) 등을 수상했다. 현직에서 물러난 지금은 학교법인 건양교육재단 설립자 겸 건양대학교 명예총장, 의료법인 건양의료재단 김안과병원 이사장으로 숨은 조력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 뒤돌아보니 성공한 보람과 기쁨은 컸다. 하지만 삶에 대한 차분한 성찰과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한 아쉬움이 항상 남아 있었다. 그래서 꼭 섭렵해보고 싶었던 문학, 사학, 철학과 심리학, 유학 등의 분야와 삶에 촉촉한 감성의 양분을 줄 수 있는 서예와 그림, 음악 등을 배우며 선물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김희수 총장은 새로운 배움에 거리낌이 없다. 숫자로 환산하는 사람의 나이가 얼마나 덧없는지를 보여주는 이 시대의 진짜 어른이다.
주 2회 트레이너와 강도 높은 운동
두부, 우거짓국, 채소 자주 먹어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소감이 어떠신지요?
벌써 아흔 번을 넘게 새해를 맞아서인지 해가 바뀌어도 좀 무덤덤합니다.(웃음) 새해가 됐다고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야죠. 2023년은 토끼해, 계묘년입니다. 우리나라도 토끼처럼 온화하고 편안한 한 해가 됐으면 합니다. 개인적으로 아내와 건강하게 올 한 해를 지내고 싶습니다. 나이를 먹어보니 가장 가깝고 소중한 게 바로 부부 사이더군요.
애처가로 유명하십니다.(웃음)
아내도 어느덧 90살이 넘었어요. 함께한 세월이 길지만 처음과 같이 저에게 귀한 존재예요. 특히 노후에는 부부가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 수밖에 없어요. 젊었을 때는 병원 일이 바빠서 아내는 물론 자식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적었어요. 가족에게 소홀했던 것이 가장 큰 후회로 남아요. 요즘은 아내에게 잘하려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같이 운동도 하고 하모니카도 배우고 취미 생활을 같이해요. 오늘 점심에도 아내와 같이 식사했어요. 근처에 추어탕을 잘하는 집이 있어서 아주 맛있게 먹고 왔죠.(웃음)
연세에 비해 정정하다는 말을 자주 들으실 것 같아요. 건강한 체력을 위한 총장님만의 루틴이 궁금합니다.
보통 오후 9시에 잠을 자고 오전 5시 30분쯤에 일어납니다. 나이가 들면 잠을 많이 자는 것이 건강에 좋아요. 일어나면 신문을 읽고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면서 몸과 정신을 깨웁니다. 일주일에 두 번은 헬스장에 가서 땀을 흘릴 정도의 강도로 한 시간씩 운동을 합니다. 전문 트레이너와 함께 몸을 푸는 운동과 체조를 충분히 하고 근육을 단련할 수 있는 다양한 기구 운동도 합니다. 또 일주일에 한 번은 지인들과 골프를 치고 있어요.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2~3시간 걷는 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참 좋은 것 같아요.
젊은 사람들 못지않게 운동을 하시네요. 특별한 건강법이 있는 건 아닌가요?
자신의 몸에 맞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나이가 들수록 삼시 세끼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배변 활동이 규칙적으로 이뤄져야 해요. 다행히 저는 이 세 가지에 큰 어려움이 없어요. 천성적으로 술은 체질에 맞지 않아서 마시지 않고, 담배는 30대까지 피우다가 50년 넘게 금연을 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체력을 유지하는 비결은 시간을 헛되게 보내지 않고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음식도 가리지 않고 다 잘 먹는 편이지만 항상 소식하려고 노력해요.
평소에 어떤 음식을 드시나요?
두부, 우거짓국, 채소를 자주 먹어요. 경계성 당뇨가 있어 식이요법을 철저히 하는 편입니다. 어깨에 당뇨 센서를 부착해 휴대전화로 혈당을 수시로 체크하면서 관리하고 있죠. 튀긴 음식이나 기름진 음식은 먹지 않고, 육류를 먹을 때는 살코기만 먹어요. 또 과식을 하지 않고요.
노년의 건강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주시면요?
나이가 들었다고 몸을 덜 움직이고 쉬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에요. 자동차를 오래 타면 탈수록 기름칠하고 조이고 살펴봐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래 탄 차는 좀 낡았지만 대신 길이 잘 들어 있는 만큼 정기적으로 관리해주면 더 좋은 성능을 발휘해요.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쉬어버리면 몸 전체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문제가 생겨요. 직장을 다니면서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일을 해도 좋고, 취미 생활을 해도 좋고, 운동을 해도 좋아요. 몸을 계속 움직이며 활동하는 것이 노년의 건강을 지키는 첫 번째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시는지 궁금합니다.
여전히 병원 일과 학교 일을 보고 있지만, 이제는 일선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조언하는 정도입니다. 요일에 따라 다양한 취미 활동을 하고 있어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본식 교육을 받고 자랐어요. 당시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음악이나 미술 같은 예술 분야는 사치로 여겨져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어요. 또 워낙 일에 파묻혀 살다 보니 문화 예술에 관심은 있었지만 직접 배우거나 체험해보지 못했어요. 그래서 총장직에서 물러난 뒤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혼자 책을 읽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몇 달간 전문가와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며 소위 ‘문사철’이라고 하는 문학, 사학, 철학을 배우고 심리학, 유학 등을 공부했어요. 그러다가 서예와 그림, 문인화, 스케치, 악기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기본 지키면 만사형통
“사람의 기본은 정직, 성공의 기본은 노력”
아흔에 새로운 배움을 시작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죠. 무언가에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인생에 있어 은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죽을 때까지 즐겁게 열심히 살아야죠. 저는 항상 어디에서나 필요한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의사로서 누군가를 치료해주는 사람이 되고, 교육자로서 인재를 키워내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쉬지 않고 무언가 새로운 일을 찾아 해왔어요. 어떤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그만큼 고민하고 몸으로 뛰는 게 필요한데, 그런 과정이야말로 내가 살아 있는 이유이자 내가 사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림을 직접 배워보니 어떤가요? 의학과는 많이 다르죠?(웃음)
인간이 의학을 배우고 법학을 배우는 건 어떻게 보면 먹고살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실제로 인생이라는 건 예술을 아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2022년 6월에 그동안 작업한 연필화부터 채색화, 수묵담채화에 삶을 반추하면서 적어놓은 글을 묶은 책 <나이를 먹어서야 시의 마음을 알게 되었네>를 펴냈어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항상 어떤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돌진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 자신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어요. 인생에 있어 어떤 성과를 내는 것만큼이나 스스로를 성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그림, 글씨, 음악 등은 이제껏 제 인생에서 충족되지 못했던 내적 수양과 문학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키는 소중한 활동이에요.
말씀처럼 돌이켜보면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오신 것 같아요. 의사로서 살다가, 그 후에는 교육자로 또 새로운 길을 가셨죠.
김안과병원이 한창 바쁜 시기에 제 고향인 논산 양촌의 유지 몇 분이 저를 찾아왔어요. 저에게 면 소재지에 운영이 어려운 작은 중학교가 있는데 인수해줄 수 없냐고 제안했어요. 제 나이 50살이던 해였죠.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게 쉽지 않아 고민하다가 이대로 폐교가 되면 그 일대 학생들이 다닐 학교가 아예 없어진다는 안타까운 현실에 인수를 결심하게 됐습니다. 가진 것 없이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의 사다리가 배움이라는 사실을 미국 유학 시절에 뼈저리게 느꼈어요. 그렇게 학교를 인수하면서 운명처럼 교육자로 살게 된 겁니다. 저는 학생들을 손주라고 생각해요. 할아버지의 마음으로 학생들이 빛나는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최고의 교육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같은 마음으로 고등학교와 대학교도 설립했습니다. 평생 의료인으로 살아온 경험과 노하우를 교육에 접목해 의과대학을 만들고 대학 병원을 세우고 싶다는 꿈도 이뤘습니다.
의사와 교육자, 다른 분야의 어떤 연결 고리가 총장님의 마음을 움직였나요?
교육자의 길과 의사의 길이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의사의 소명은 사람을 돌보는 것이에요. 아픈 곳을 치료해주고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의사가 하는 일입니다. 의사로 평생을 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교육자가 돼 있더군요. 정식으로 교육학을 배운 적은 없지만, 교육자의 삶도 의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지식을 채우고, 나아가 그 사람의 인성과 됨됨이를 살펴 우리 사회에 중요한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교육자의 역할이라면 이 또한 사람을 돕는 일이죠. 둘 중 무엇이 더 중요하거나 더 가치 있다고 잴 필요는 없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일을 했으니 내 삶이 참 많은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의사도, 학교를 운영하는 것도 모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떤 일이든 쉽지 않기는 매한가지예요.(웃음) 조직의 구성원들이 일을 잘해 조직이 원활하게 돌아가면 문제가 없어요. 구성원들이 열정을 가지고 각자의 업무에 최선을 다할 때 그 조직이 잘되는 법이죠. 구성원들의 그런 열정을 끌어내는 것이 관리자의 역할이에요. 가장 먼저 저 자신이 바뀌어야 하고, 구성원을 격려하면서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조직의 발전이 가능합니다.
“자신감을 가지고 노력하라”
진부한 말이지만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된 비결
살아오면서 마음에 새겨온 문장이 있나요?
‘기본에 충실하자’라는 말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 말은 수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이만큼 제 인생을 대변하는 말도 없죠. 기본을 지키면 모든 게 만사형통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의 기본은 정직이고, 성공의 기본은 노력이에요. 병원의 기본은 당연히 치료이고, 학교의 기본은 교육이죠. 이 기본이 잘 지켜진다면 사회에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기본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죠. 1962년 영등포에 김안과의원을 개원했을 당시 의사가 권위적으로 환자를 대하는 분위기였어요. 노인 환자가 진료를 받으러 오면 젊은 의사가 반말로 진료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의사의 기본은 치료라는 생각으로 24시간 365일 진료 원칙을 지키며 치료에 충실했습니다. 부자든 가난한 노동자든 차별 없이 환자의 병을 치료하고 웃음을 찾아주는 일은 의사로서 큰 보람이었어요.
인생을 먼저 살아온 어른으로서 청년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으신가요?
우리 사회의 변화가 너무 빠르다 보니 청년들이 자신의 미래, 희망, 목표 등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불확실한 사회에서 자신이 좇아야 할 꿈이 무엇인지 명확히 찾기 힘든 것이죠. 제가 청년이었을 때는 무엇을 하든 그 일에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어느 정도 있었어요. 하지만 요즘 청년들은 여러 사회 현실 때문에 그런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우리 건양대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에게 항상 하는 말이 있어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라’는 당부입니다. 자신에 대한 확신과 꿈을 명확히 갖고 노력하라고 말합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지 못하고 지방대에 왔다고 실망하는 학생이 많지만, 그들의 인생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입니다. 제가 하는 말이 나이 많은 기성세대의 진부한 당부일 수도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노력해온 사람들이에요.
총장님은 어떤 청년이었나요?
젊은 시절을 되돌아보면 정말 ‘코뿔소’같았습니다. 삶의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코뿔소처럼 전진만 할 줄 알았죠. 안과를 처음 열었을 당시 미국에서 배워온 선진 치료 방법을 도입하고, 아픈 사람이라면 언제든지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했어요. 밥을 먹다가도 환자가 오면 뛰어나갔죠. 그 결과 많은 돈을 벌 수 있었고 사회적으로 나를 성공한 사람으로 봐주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저를 돕는 직원들을 더 잘 보살펴주지 못한 점이 많았던 것 같아 늘 미안한 마음이에요. 하지만 제가 개인의 사심을 위해 살아오지 않았다는 것 하나만큼은 자부합니다. 지금이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하는 중입니다.
최고의 의사로 교육자로 많은 것을 이룬 인생입니다.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요?
눈을 감는 날까지 ‘Do My Best!’ 내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에 정년은 없다고 생각해요. 맡은 일을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인생의 최종 목표입니다. 제가 이룬 모든 것은 후세대에게 남겨지죠. 예를 들어 건양대학교병원에는 수천 명의 직원이 있는데 그들에게 건양대병원은 삶의 터전이자 중요한 수입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룬 모든 것이 잘 유지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건양이라는 이름 아래의 모든 기관에서 일하는 구성원들이 행복할 수 있다면 저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김희수 명예총장은…
1928년 충남 논산시 양촌면 남산리에서 태어났다. 공주고등학교(1946), 연세대학교 의대 졸업(1950) 후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학에서 수학(1958)했고, 연세대학교에서 의학박사(1966)를 취득했다. 1962년 영등포에 김안과의원을 개원해 동양 최대의 안과병원으로 성장시켰다. 고향에 건양중·고등학교(1980~1983), 건양대학교(1991)를 설립했고, 2000년 2월 건양대학교병원을 개원했다. 이런 공적을 인정받아 국민훈장 무궁화장(2007),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교육발전 부문, 2011), 캄보디아 훈센 총리 훈장(2015), 2016년을 빛낸 도전 한국인 대상(2017) 등을 수상했다. 현재 학교법인 건양교육재단 설립자 겸 건양대학교 명예총장, 의료법인 건양의료재단 김안과병원 이사장을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