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과 함께하는 삶
한국살이 10년째인 방송인 마크 테토는 강남에서 5년을 살다가 우연히 마주한 한옥에 매료돼 5년 전 고즈넉한 북촌 한옥마을에 터를 잡았다. 평행재라 불리는 마크의 집은 1970년대에 지어진 낡은 가옥의 구조는 고수한 채 자재만 전통 소재로 개조해 한옥의 멋스러운 자태를 살렸다.
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수수한 풍경은 마크가 이 집에서 힐링을 느끼는 장소 중 하나다. 좁다란 길옆으로 작은 정원이 반갑게 맞이하는데 사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꽃과 식물을 감상하거나 정리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미국과 강남에서 생활할 때는 절대 상상하지 못한 일이다.
“수국의 모습에 따라 계절의 변화를 느껴요. 수국이 서서히 마르며 자연스럽게 드라이플라워가 되면 가을이 왔다는 신호죠.”
누군가의 집을 제대로 방문했다고 말하려면 적어도 계절마다 한 번씩은 들러봐야 한다는 속담처럼 한옥은 사계절마다 느낌이 다 다르다. “한옥에서 맞이하는 가을은 특별해요. 한옥은 계절마다 빛의 온도와 그림자가 다른 게 매력인데 가을에는 빛의 온도가 차가워지고 그림자도 짙은 회색이 되죠.” 들기름과 참기름을 발라 만든 장판지로 바닥을 덮은 서재에서는 가을이면 고소한 향이 맴돈다.
마크가 한옥의 가을을 좋아하는 이유는 또 있다. 이 집에 처음 왔을 때가 8월이었는데 그때 이 공간에는 가구며 살림이며 아무것도 없었다. 무작정 논현동에 있는 가구 거리로 나섰지만 한옥과 어울리는 가구를 찾기 힘들었다.
“집과 어우러지는 가구를 놓고 싶어 한옥의 멋이 느껴지는 요소에서 영감받아 직접 디자인해 전문가에게 제작을 의뢰했죠. 거실에 있는 커피 테이블과 식탁이 제가 디자인한 가구예요.”
마크는 한옥에 살면서부터 오브제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릇이나 가구를 숍에서 사면 오브제와의 관계가 없는 게 아쉬웠어요. 단순히 오브제를 구입하는 행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브제를 통해 맺게 되는 인간관계가 의미 있고 좋더라고요.”
주방 찬장에 있는 그릇도 숍에 있는 제품을 보고 작가의 이름을 외워두었다가 인터넷으로 검색한 후 작가를 직접 만나 구입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지승민이라는 작가인데 만나보니 저랑 동갑이어서 친구가 됐죠. 완성된 그릇을 들고 아내와 함께 이 집에 놀러 오기도 했고요.”
마크가 직접 발로 뛰며 채워나간 가구와 살림살이는 11월에 완성됐다. 미국인에게 11월은 추수감사절이 있어서 더욱 뜻깊은 달이다. 그렇게 평행재의 첫 공식 행사로 친구들을 초대해 집들이 겸 미국식 추수감사절 파티를 열었다. 미국에서도 1년에 딱 한 번 먹을 정도로 요리하기 어려운 칠면조 요리를 해서 손님이 오기 전, 완성된 요리를 촬영해 SNS에 올렸는데 마크는 이 사진이 너무 소중하다고.
“이 사진을 보면 누가 만들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이야기를 담았는지를 알 수 있어요. 요리 잘하는 친구 제넷이 만든 칠면조와 매시포테이토, 지승민이 만든 그릇, 황민혁의 테이블, 건축가 이문호가 만든 한옥 등 각자가 만든 노력과 소중한 마음이 느껴지면서 그들의 이야기가 떠오르죠.”
마크는 평행재가 인간관계를 맺으며 재미있는 이야기가 계속되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
서양인에게 깃든 한국의 미감
그의 집 안 곳곳에는 가야 시대부터 조선 시대,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품이 놓여 있어 흡사 갤러리를 방불케 한다.
“한국의 전형적인 미도 좋지만 여기서 좀 더 벗어나 한국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유니크하고 개성적인 예술품을 수집하려고 해요. 최근에 구입한 소반과 화로도 그렇죠. 소반은 대부분이 직사각형인데 이 소반은 12각형이에요. 휴먼 스케일이란 인간의 체격을 기준으로 한 척도를 말하는데 요즘 이에 맞춘 인테리어와 가구, 건축물이 유행이잖아요. 제가 산 소반에도 휴먼 스케일이 담겨 있어요. 사람이 머리 위로 들 수 있게 옆에 손잡이가 있고, 어깨선에 맞춘 하단의 디테일만 봐도 사용하는 사람을 염두에 둔 섬세한 의미를 담아 소반을 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한국의 미가 드러나는 상징적인 것보다 개성 있는 아이템에서 한국적인 아름다움과 정서를 배운다는 마크. 앞으로도 새로운 작가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공부를 이어갈 것이라는 그가 섭렵하고 싶은 분야가 있다.
“서예를 꼭 한번 배워보고 싶어요. 전시를 볼 때마다 항상 신비롭게 다가온 분야예요.”
한옥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SNS에 글로 담아내는 마크는 컴퓨터에 익숙해져 손 글씨의 아름다움이 생경한 것이 못내 아쉽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글의 내용만 훌륭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글이 어떻게 보이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죠. 서예는 의미 전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담고 싶은 이야기를 아름답게 표현하려는 마음이 멋져요.”
한옥에서 살기 전과 후로 나뉜 한국살이
한옥이라는 공간은 마크의 라이프스타일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빈집이었을 때 이곳에서 느꼈던 이 집만의 향, 여백의 미, 에너지가 너무 신기해서 잊을 수가 없어요.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힐링이 되더라고요.”
공간이 주는 긍정적인 영향을 깨닫게 되던 순간이었다.
“미국 사람 대부분은 자신이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의 에너지 조절도 자신에게 달렸다고 생각해요. 공간을 자신이 지배할 수 있는 존재로만 여기죠.”
미국과 강남에서 보낸 생활을 돌이켜보면 집이라는 공간은 잠만 자는 곳이었다. 아파트의 넓은 창으로 보이는 도시 풍경은 삭막했고 비 오는 날이면 우울함을 증폭시켰다.
“집에 있는 것이 외로워서 늦게 퇴근하고 주말에도 일부러 약속을 잡았어요.”
한옥은 달랐다. 스케줄이 없는 날이면 툇마루에서 책을 보는 것이 마냥 즐거웠다.
“혼자 있어도 허전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고 오히려 힐링이 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득 채우는 느낌이에요. 오늘처럼 비가 오면 우울함보다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느끼기에 바빠요. 처마에 빗방울이 맺히는 모습, 비 내리는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소리 등 운치 있는 풍경에 흠뻑 취하죠.” 한옥은 비단 마크에게 아름다움을 누리고 힐링만을 주는 존재가 아니었다. “한옥은 저에게 인생의 교훈을 가르쳐준 집이에요.”
아파트 생활에서 느껴보지 못한 여유와 치유의 시간을 얻게 된 것. 출근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뉴요커 마크와 강남 마크는 매일 아침 급하게 뛰어나가기 일쑤였는데 한옥으로 입주한 이후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한옥의 특성상 창문마다 하나씩 다 걸어 잠가야 하는데 적어도 5분이 걸린다. 처음에는 조금 귀찮고 적응이 안 됐지만 갈수록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저에게 이 집이 ‘마크, 제발 5분이라도 숨 쉬면서 차분하게 천천히 하루를 시작하자’라고 말하는 것 같더라고요.”
정신없이 하루를 시작했던 마크에게 잠시 쉬어가는 여유를 권한 집이다. 한옥에 살면서 매일 설렘을 느낀다는 마크는 올해 특별한 목표가 있다. 한옥에 살면서 느낀 감성을 글과 사진으로 담은 에세이를 출판하는 것. 추석에도 주중에 바빠서 미뤄둔 작업들을 하면서 집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 한단다. ‘집에서’가 아닌 ‘집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그의 말이 참 따뜻하고 은은했다. 한옥에서 보내는 시간이 제일 설레고 기억에 남는 행복의 순간이라는 진심이 느껴지며 그의 에세이가 참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