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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씨, 여전하시네요

정우성은 자신을 스타덤에 올린 영화 <비트>에 출연한 직후 진한 멜로 향이 가득한 영화 <모텔 선인장>을 선택했다. 이유는 ‘사랑’이었다.

On February 12,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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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이 출연했던, 아니 한국 영화가 그에게 기댔던 몇 편의 작품을 우린 알고 있다. 일단 그를 스타덤에 올린 영화 <비트>와 <태양은 없다>를 보자. 스크린 속 그의 모습을 통해 대중은 기억한다. 자신의 세계를 아직 구축하지 못한 미완의 청년이 거친 남성미를 만났을 때 얼마나 치명적으로 매력적일 수 있는지.

멜로를 빼놓고 그의 필모그래피를 논한다면 서운하다. 어쩌면 데뷔 이래 20여 년간 정우성을 채운 건 8할이 멜로가 아닐까. 만약 그가 단순히 명성만을 좇았다면 <비트> 이후 비슷한 액션과 누아르 장르로 승부를 봤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모텔 선인장>이라는 의외의 선택을 했다.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급선회다.

최근 만난 정우성은 이 물음에 망설임 없이 답했다.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고, 나 또한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사랑 이야기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게 지상 명령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는 인기의 부침이나 작품의 성패를 떠나 사랑하고 또 사랑했다. 최근 연달아 출연한 영화 <마담 뺑덕>과 <나를 잊지 말아요>가 그 사실을 방증한다. 무엇이 그토록 정우성을 사랑에 열정적일 수 있게 하는지 궁금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눈빛엔 늘 사랑을 갈망하는 외로운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어쩌면 대중은 정우성을 보며 저마다 자신의 속마음을 투영하고 있었는지도.

“평소 의식하며 살진 않지만 외면하고 싶은 아픔과 마주하게 될 때면 외로움의 감정이 살아납니다. 사람들이 제 눈빛을 보고 강하다, 혹은 깊다고 하는데 정작 스스로는 제 눈빛이 어떤지 잘 모르겠어요. 애정 결핍이 있어 그럴까요? 어릴 적 가정환경이 넉넉하지 않았고, 부모님의 사랑을 따뜻하게 받지 못해서 사랑에 대한 갈망이 있는 거 같아요. 아마 그런 결핍에서 비롯된 감정이 눈빛에 담긴 건 아닐는지.”

정우성이 출연한 사랑에 대한 영화를 복기해보자. 손예진과 함께 출연한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중국 배우 가오위엔위엔(고원원)과 호흡을 맞춘 <호우시절> 등은 멜로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한 번쯤 봤을 작품이다. 한 남자의 행동과 마음이 그렇게 올곧고 순수하다면 그 진심은 이윽고 통하지 않을까? 설령 이역만리 떨어진 곳에 두 사람이 머물지라도 말이다.

혹자는 그의 훤칠한 외모가 결정적인 매력 포인트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한 정우성의 대답은 꽤 진지했다. 데뷔 후 2000년대 중반까지 스스로 연기보다 외모가 부각되는 것에 부담을 느껴온 그다. 여러 인터뷰에서 정우성은 “잘생겼다는 수식어는 분명 감사하지만 그냥 배우로 불리고 싶다”는 바람을 강조했다. 또한 “외모로 규정되기보다는 스스로 내 존재를 확립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 그가 최근 3년간 달라진 게 있다면 타인의 평가보다 자신의 중심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여전히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잘생겼다’는 소리에 웃으며 “나도 알고 있다. 잘생긴 게 최고다”라고 눙칠 여유를 갖게 됐다. “남이 뭐라 하든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스스로의 내면과 연기에 집중하면 된다”고 그가 덧붙였다.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는 법을 터득한 셈이다. 자신만 사랑하는 게 아니다. 그는 기자에게 넌지시 “어떤 형태로든 사랑하는 게 중요하다”라고 힘주어 말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건 정우성이라는 배우가 유독 멜로 영화에 애착이 깊은 이유일 것이다.

“배우로서 멜로를 해야 한다는 어떤 사명감이 있는 건 아니에요. 그냥 좋잖아요. 사랑 이야기 말이죠. 저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듣거나 볼 때 마음이 설레요. `‘맞아. 진짜 이런 사랑이 있었지!’라고 생각하게 되죠. 우리가 알지만 종종 잊곤 하는 사랑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면 기분이 좋더라고요.”
 

사랑 이야기에 눈길이 가고 마음이 끌리는 이유를 좀 더 생각해봤다. 일반적이지 않은 성장 과정이지만 그는 여자와 가깝게 지낼 수 없는 환경이었다. 남자 중학교를 나왔고 고등학교는 중퇴를 했다. 이후 대학교에도 가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과팅이나 미팅의 경험이 없으니 여자에게 서툴고 이성에 대한 판타지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언급한 이성에 대한 판타지는 곧 연기의 원동력이기도 했다. 정우성은 이것을 “이성에 대한 원초적인 궁금증”이라 표현했다. “궁금증이 있고 잘 알지 못하니 배우로서 표현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사랑을 위한 모든 행위와 사랑과 관련한 모든 사건이 달콤한 건 아니다. 사랑은 때론 처절한 아픔이자 상처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을 두고 가수 김광석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라는 노래로 절실하게 표현했다. 같은 맥락에서 정우성 역시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아픈 사랑을 이야기할 때 김하늘과 함께한 영화 <나를 잊지 말아요>를 빼놓을 수 없다. 정우성은 극 중 부분기억상실증을 겪는 남자 ‘석원’ 역을 맡았다. 자동차 사고로 근 10년의 기억을 잃은 인물로 거기엔 물론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기억도 포함돼 있었다. 나쁜 기억은 잊고 싶어 하고 좋은 건 미화하려는 성향이 짙은 요즘 사람들. 정우성은 나쁜 기억을 잊고 싶지는 않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꽤 단호하게 말했다.

“전혀! 제겐 모두 소중한 기억이니까요. 어린 시절 불우한 환경이었지만 그것 역시 잊고 싶지 않습니다. 어릴 때 언젠가 버스 정류장에 서서 ‘뭘 먹지? 어디로 가야 하지?’ 생각하고 있는데 그 순간 거리의 냄새가 코끝에 닿는 거예요. 바람에 실려 온 가을 냄새였죠. 그때 기억이 참 강하게 남아 있어요. 어렸을 때 기억은 말 그대로 불우한 기억일 뿐이지 그때가 불행했던 건 아니에요. 가정환경과 성장 과정이 넉넉하지 않았다고 해서 다 불행한 건 아니거든요. 이를테면 부유한 가정환경, 잘나가는 부모를 뒀다고 해도 불행한 사람은 있어요. (외부 조건과 상관없이) 어린 저는 세상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고 그게 절 움직이는 힘이었습니다.”

행복의 본질에 대해 밤새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은 기세였다. 정우성의 말에 따르면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대한 기억은 좋고 나쁜 것으로 분류할 수 없이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다. 기억을 잃거나 스스로 기억을 편집하는 남자는 그만큼 상처에 약한 법이다. 외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남자를 영화 <나를 잊지 말아요>의 또 다른 주인공 ‘진영’(김하늘)은 따뜻하게 보듬는다. 자신 역시 사랑의 상처가 있음에도 말이다. 이 대목을 언급하며 정우성은 “실제로 남성보단 여성들이 상처를 대하는 자세가 좀 더 성숙하다”고 말했다. “제가 맡은 ‘석원’은 참 비겁한 인물이에요. 스스로 기억상실증을 만들어내죠. 그에 비해 ‘진영’은 자신의 상처를 넘어 한 남자를 보듬고 이해하려 해요. 여성의 속성 중 하나겠죠? 그래서 여성은 더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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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목 중 ‘잊지 말아요’라는 서술어는 의미로만 따지면 ‘기억하라’ 혹은 ‘기억해달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다. 제작진이 굳이 ‘잊지 말아요’라는 표현을 쓴 건 여기에 슬픔과 호소의 감정이 더 진하게 담길 수 있어서가 아닐까? 그만큼 상대를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다뤄달라는 의미다. 정우성이 평소 사람을 대하는 태도 역시 작품 제목과 관련 있어 보였다. 그가 동의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인연이라면 정우성 입장에서 “인연은 쉽게 혹은 함부로 맺어서는 안 될 어떤 것”이었다.

“일단 인연을 맺으면 책임을 져야 하죠. <나를 잊지 말아요>를 통해 알게 된 이윤정 감독 역시 제겐 인연이 됐습니다. 감독과 배우의 만남이고 영화를 사랑하는 후배와 선배의 만남이기도 하죠. 그래서 선배로서 책임 있게 행동하려고 노력했어요. 영화 쪽 선배라면 후배가 더 잘 뛸 수 있게 도움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선뜻 같이 작업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종종 인연을 강조하면서도 사람을 대할 때 책임감 없이 가볍게 대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좋지 않은 일을 겪어도 나중에라도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는 건 결국 서로를 얼마나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인연과 기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지만 정작 배우가 된 이후 맞이한 세상은 그리 입체적이진 않았다. 다양한 작품 속에서 말 그대로 격변의 캐릭터들을 연기했지만 정우성은 “현실 속 배우의 삶은 그리 풍부하지 않다”고 고백했다. 하긴 삶의 일부가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되기 십상인 배우 아닌가. 그는 어릴 적 자유롭게 거리를 쏘다니며 세상의 냄새를 맡았던 때를 자신도 모르게 동경하고 있었다.

“이 직업이 현실과 단절된 부분이 있어요. 많은 작품을 연기하고 경험하면서 영화계에 대한 제 생각과 가치관은 한 차원 나아졌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모르겠어요. 제겐 신기함의 대상이죠. 우리의 일상엔 정말 다양하고 풍부한 감정이 있고, 많은 인간관계가 있는데 배우 입장에선 그런 것에서 고립된 거니까 속상할 때가 있어요. 전 영화를 통해 ‘청춘의 아이콘’이니 하는 별명을 얻었는데, 정작 실제의 저 자신은 ‘청춘의 때’를 보내진 않았어요. 흔히 말하는 학창 시절이 없었고 대학생으로서 이성을 사귀어본 것도 아니고요.”

그리고 잠시 그는 침묵했다. 사랑이란 단어를 되뇌던 그는 “요즘이야말로 진짜 사랑이 필요한 시대”라고 읊조렸다. 과거에도 지금도 보편적일 사랑이 요즘 특히 필요한 이유라니? 정우성이 바로 이어 대답했다. “인간성과 낭만이 사라지고 있잖아요. 단순히 남의 일에만 관심이 높아지고 있고. 그래서 더욱 사랑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라고. 말에 뼈가 있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삶을 채우는 소식 대부분이 남의 이야기들이다. 정말 알아야 할 뉴스와 의미 있는 정보가 있는 반면, 굳이 알지 않아도 되고 혹은 알 필요가 없는 정보도 존재한다. 그는 사람을 온전히 사람으로 보지 않고 돈과 어떤 수치화된 데이터로 평가하는 각박한 요즘을 경계하고 있었다.

“인간 본연의 감정, 그러니까 굉장히 기본적인 감정에 대한 결핍을 다들 갖고 있는 거 같아요. 솔직히 전 궁금한 게 다들 자기 자신을 조용히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있는지…. 남의 얘기에 귀 기울이고 따라가다 보면 번잡해지잖아요. 그것만큼 불행한 게 또 있을까요? 온전히 ‘나’라는 인간을 바라보고 차분하게 교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관객 역시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해요. 멜로 영화일 수도 있고 따뜻한 가족 영화나 친구와의 우정을 다룬 작품일 수도 있습니다. 차분하게 우리의 속내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짜 자신이 원하는 감정이 무엇인지 말이죠.”

알려진 대로 정우성은 <나를 잊지 말아요>의 제작자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연출자다. 지난해 발표한 단편 영화 <킬러 앞의 노인>으로 주목받았던 그는 최근 제작사 ‘더블유 팩토리’를 설립했다. 이 모든 것이 정우성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걸 찾아온 과정에서 비롯된 일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더블유 팩토리의 전신이 있다. 2008년 토러스 필름이 그것이다. 당시 영화 <호우시절>의 공동 제작자였던 그는 그때부터 이미 감독의 꿈을 키워오고 있었다. “확실히 제작자 겸 배우로 함께 참여하니 눈에 보이는 게 다르더라고요. 현장에서 사람들 표정이 안 좋으면 ‘무슨 일들이 있나?’라고 생각하게 돼요!(웃음) 밥은 맛있는지 걱정하게 되고, 바닥에 깔린 선을 보면 정리 좀 하자고 잔소리하게 되고. 휴… 만약 배우가 아닌 제작자로만 참여했다면 또 다른 자세를 취했을지도 모릅니다.(웃음) 장편 영화 연출? 당연히 하고 싶죠. 20대 후반엔 하루빨리 감독이 되고 싶었고, 30대 후반엔 배우의 입지를 더 굳혀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제 여유가 좀 생겼으니까 본격적으로 시작해보려고요. 시점이 맞을 때 선보일 겁니다. 준비하고 있는 건 많아요! 출연도 물론 하겠죠.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정우성이라는 이름은 좋은 상품이니까요."

넌지시 어떤 장르를 먼저 내놓고 싶은지 물었다. 씨익 웃던 그가 “가족 드라마”라고 말했다. “큰 규모가 아닌 중소 규모의 내실 있는 작품이 될 것”이라며 정우성은 영화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천만보다 이젠 이백, 삼백만 관객의 영화가 더 귀합니다. 양극화가 심해졌어요. 그러다 보니 멜로 장르도 귀해졌고요. 영화인들이 그런 면에서 책임감을 갖고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봐요. 선택의 폭을 넓게 제시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관객은 단순하게 큰 예산의 보기 편한 영화만 찾을 겁니다. 저 역시 새롭게 제작사를 차린 이상 저예산 상업 영화에 관심을 꾸준히 가질 것이고요. 실패? 그걸 두려워했다면 지금처럼 못 살지요. 여전히 전 꿈꾸고 있어요. 영화계의 문제점, 배우들이 취약한 점을 알고 있는 만큼 동료들과 나누고 선배, 후배들과 함께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싶어요. 교류가 중요합니다. 몇몇 영화제의 심사위원을 맡는 것도 영화라는 틀 안에서 교류한다는 의미고요. 결국은 소통이잖아요. 영화제들은 여러 형태로 발전해가는데 정작 영화계 내부의 소통은 미미했거든요. 그걸 위해 저도 기여할 바를 찾아가는 겁니다.”

이 모든 게 정우성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사랑을 꿈꾸고 갈망하며 그가 남겨온 족적, 그리고 영화에 대한 그의 진정성을 생각해본다. 감히 말하건대 정우성은 한국 영화계의 중요한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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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기획
이예지 기자
취재
이선필(<오마이스타> 기자)
사진 제공
레드브릭하우스
2016년 02월호
2016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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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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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필(<오마이스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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