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대중에게 비치는 이경규의 모습은 늘 새로웠다. 개그맨, MC, 배우, 심지어 영화감독까지. 그가 이번에는 원맨쇼에 가까운 프로그램을 진행하겠다고 나섰다. 그것도 ‘떼토크(집단 토크)’가 판치는 종편 예능 시장에서 말이다.
TV조선의 새 예능 프로그램 <이경규의 진짜 카메라>의 첫 회 방영이 예정된 날, 이경규와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35년 방송인의 여유가 넘쳤지만 막중한 책임감 때문인지 간간이 긴장하는 표정도 비치는 것 같았다.
이번에 그가 단독 MC를 맡은 <이경규의 진짜 카메라>는 세상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별난 이야기들을 찾아내 카메라에 담아 사연의 주인공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관찰 토크쇼다. 리액션을 담당할 방청객도, 그를 서포트해줄 만한 다른 방송인 패널도 하나 없다. 카메라 앵글을 가득 채우는 건 오로지 이경규뿐이다.
“축구를 하면 서로 볼을 주고받으면서 골을 넣잖아요. <이경규의 진짜 카메라>는 축구 경기로 치자면 리오넬 메시의 플레이를 보여줘야 하는 경기예요. 골을 넣어도 내가 넣고, 욕을 먹어도 제가 다 먹어야 하는 거죠. 다른 누군가와 같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면 성공하지 못해도 그 사람한테 뒤집어씌울 수 있는데, 이제 의지할 곳이 없어요.(웃음) 저의 밑바닥까지 다 보여줘야 할 것 같아요.”
프로그램의 담당 PD인 민병주 PD는 미국의 토크쇼 프로그램 <코난 오브라이언 쇼>에서 착안해 이번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했다. 미국의 인기 진행자 코난 오브라이언에 버금가는 인물로 이경규를 꼽은 것이다. ‘이경규가 아니면 이 프로그램을 맡을 사람은 없다’는 것이 담당 PD의 생각이었다.
“돌이켜보면 제목이 좋았던 프로그램은 하나같이 시청률이 굉장히 잘 나왔어요. <이경규의 몰래 카메라> <남자의 자격> <힐링캠프> 등이 모두 히트를 쳤죠. 이번에도 프로그램 제목이 참 마음에 들어요. <이경규 쇼>라고 했다가 망하면 이경규가 망하는 건데 <이경규의 진짜 카메라>가 망하면 진짜 카메라가 망하는 거잖아요.(웃음)”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 부담감이 오죽할까. 그는 “다른 프로그램에선 옷도, 헤어와 메이크업도 대충 하고 다녔는데 이번 첫 녹화 땐 슈트에 올백 헤어스타일까지 준비했다”며 껄껄 웃었다.
“방송 환경이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카메라 한 대를 놓고 촬영했다면 요즘은 총 15대의 카메라가 출연진을 하나하나 비추는 식이죠. 그래서 출연진 한 명에게 쏠리는 부담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 사실이에요. 그만큼 편집의 영향도 많이 받게 되는 거고요.
<이경규의 진짜 카메라> 같은 경우는 그런 점에서 다른 프로그램들과는 차별성이 있죠. 내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할 곳이 없으니까 열심히 해야 해요.(웃음). 내일이 녹화인데 오늘 오후에 미팅 마치고 7시쯤 집에 들어가 방송을 모니터링한 후 일찍 잘 거예요. 녹화해보니까 내 컨디션이 가장 중요하겠더라고요.”
박명수, 김구라 등 ‘쎈 개그’ 선수가 많지만 원조는 이경규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확실한 성격을 방송에서 가감 없이 드러냈기 때문에 이경규의 캐릭터는 친근하기보다는 조금 무서운 존재로 그려지곤 했다.
“제가 ‘버럭’ 하는 캐릭터로 굳어진 데는 후배 개그맨들이 일조를 했어요. 카메라 앞에서 저를 과도하게 모시는 태도를 보여줘 제가 대중에게 굉장히 어려운 캐릭터로 인식된 것 같아요. 실제로는 별로 안 그런데 방송에선 굉장히 권위주의적인 사람으로 비춰진 거죠. 이게 다 개그맨 이윤석 때문이에요.(웃음)”
<남자의 자격> 이후 최근 몇 년 사이 이경규의 방송 캐릭터는 많이 바뀌었다. SBS <힐링캠프>에서는 개그계의 대부로 따뜻한 면모를 보여주더니, SBS <아빠를 부탁해>에서는 힘을 뺀 평범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조영남과 함께 호흡을 맞추는 KBS <나를 돌아봐>에서는 선배 앞에서 쩔쩔 매는 그의 모습이 웃음을 자아낸다.
“알고 보면 제가 다른 사람 이야기를 굉장히 잘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리액션도 좋아서 다른 사람 이야기에 잘 웃어주지요.(웃음) 사람이 나이를 먹으니까 많이 유해지는 것 같아요. 방송에서 중요한 건 ‘진정성’이라고 봐요. 화가 날 땐 화를 내고, 이야기를 듣다가 슬프면 같이 울어주는 거죠. 이번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일반인 게스트들도 저를 굉장히 좋아하세요. 처음에는 다가오기 어려워하다가도 몇 마디 나눠보고 편안하게 속내를 털어놓으시는 거죠.”
사람 가리기로 유명한 조영남도 “이경규는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날 이경규가 들고 온 통가죽 가방도 조영남이 직접 만들어 선물한 것이라고 했다. “솔직히 저도 영남이 형이랑 같이 있으면 정말 좋아요.
예쁜 여자가 주변에 있으면 말 걸고 싶은데 형님은 제가 쭈뼛쭈뼛하는 사이에 벌써 그리로 가 계시거든요.(웃음) 형님과 같이 있으면 철없던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랄까? 예전에는 이렇게 기자를 만나는 자리도 굉장히 부담스러웠는데 얼마 전 <나를 돌아봐> 제작발표회 현장에서 영남이 형이 자리를 박차고 나간 사건 이후로 참 편안해졌어요.(웃음) 영남이 형은 이렇게나 저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분이에요.”
이경규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영화감독’이라는 타이틀이다. <복수혈전>을 시작으로 2007년 작 <복면달호>를 거쳐 재작년엔 <전국노래자랑>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취미라고 하기엔 꽤 진지하다.
“영화는 지금도 계속 구상 중이죠. 사실 영화 제작이 MC로 활동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돼요. 늘 사람들을 만나고 아이디어를 나누니까요. 배우들도 많이 만나고, 카메라 감독님과의 소통도 훨씬 원활해요. 유재석과 강호동이 저한테 안 되는 이유도 그거예요. 나한텐 절대 안 되지. 내가 이걸로 수업료를 얼마나 까먹었는데.(웃음)”
그의 최근작 <전국노래자랑>(2013)은 안타깝게도 흥행에서 참패했다. 비슷한 시기에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주연의 할리우드 대작 <아이언맨2>가 개봉하면서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것이다.
“<이경규의 진짜 카메라>에 언젠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초대할 거예요. 내가 영화판에서 망한 이유가 걔 때문인데 그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나?(웃음) 걔 입장에선 연예 정보 프로그램에서 인터뷰하는 거나 우리 프로그램에 나와서 한 시간 떠드는 거나 똑같아요. 한국에 오기만 해봐라.(웃음)”
그의 말처럼 영화감독으로서의 생활은 방송 일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많이 달라지게 했다. 출연진 입장에서만 프로그램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제작진과 투자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방법을 깨친 것이다.
“예전에는 프로그램이 잘되면 다 내가 잘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어요. 그런데 나이를 먹고 많은 사람을 만나보니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죠. 마흔이 넘어가면서부터 ‘아, PD와 작가, 감독을 잘 만나야 되는 거구나’라고 많이 느껴요. 사고가 심플하고 뛰어난 제작진을 만나 저 자신이 가꾸어지고 다듬어지는 것이 좋아요. 제 역할은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을 거기에 조금씩 더하는 거죠. 영화도, 드라마도, 버라이어티도 다 똑같아요.”
이경규가 오랫동안 대중에게 사랑받는 비결도 어쩌면 여기에 있는 듯했다. 최고의 개그맨이라는 타이틀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역량을 키워나가는 것. 쉰여섯의 이경규가 여전히 청년처럼 진화하는 이유다.
“제가 케이블 채널로 넘어온 최초의 MC예요. tvN에서 <화성인 바이러스>라는 프로그램을 론칭할 당시, ‘공중파에서 잘나가는 사람이 뭐 하러 케이블 채널에 가냐’는 시선이 많았던 게 사실이에요. 종합편성 채널이 생겼을 때도 마찬가지였죠. 하지만 방송 일을 하는 사람에게 채널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공중파든, 케이블이든, 종편이든, 인터넷이든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요?”
그는 서른넷 이후 자신의 생일을 챙겨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아직 서른넷인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지난 일요일이 제 생일이었어요. 예림이가 아빠 생일이라고 문자 한 통을 남겼더라고요.(웃음) <아빠를 부탁해>를 촬영하면서 ‘요즘 젊은 세대와 우리 세대의 사고방식이 많이 다르구나’ 하고 느껴요. 나름대로 젊은 친구들과 잘 소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충격이었죠. 그래도 감이 떨어지진 않은 것 같아요. 2년 전쯤 예림이가 학교에 와서 강연을 해달라고 해서 갔는데 아이들이 많이 좋아해줬거든요.(웃음)”
그는 화려한 잔치 대신 조용히 낚시를 다녀왔다고 한다. 그는 연예계에 소문난 낚시 마니아다. 낚시 이야기가 나오자 금세 눈이 초롱초롱해진다. 낚시꾼 사이에서 ‘오짜붕어(길이 50cm짜리 붕어)’를 잡으면 ‘대어를 낚았다’고들 하는데 자신의 기록이 46cm라며 한참 자랑을 늘어놨다.
“사람이 살다 보면 수만 가지 고민을 하게 되잖아요. 인생 고민도 해야 하고, 방송 일 걱정도 해야 하고요. 그런데 낚시를 하면 그런 잡념이 싹 사라져요. 낚시꾼의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에요. 고기를 낚아야겠다는 것. 그래서인지 낚시할 때면 무척 행복해요. 도전정신도 샘솟고요.”
녹화장 아니면 낚시터. 이것이 그의 심플한 일상이란다. “일반 사람들은 장어를 보면 ‘자연산이냐, 양식이냐’로 논쟁을 하잖아요. 그런데 낚시 고수들은 그걸로 논쟁하지 않아요. ‘바다에 살 수 있는 장어냐, 아니냐’로 장어를 구분하죠. 댐에만 사는 애들은 바다에 못 나가요. 그런데 간혹 바다와 강을 오갈 수 있는 장어가 있어요. 두 장어의 맛을 비교해보면 맛이 달라요. 강에만 살았던 애들은 밍밍하고 느끼한 맛이라면, 바다에 살았던 애들은 씹어도 질리지 않는 맛이죠.”
기자와의 인터뷰는 결국 그가 가장 ‘애정한다’는 낚시 이야기로 끝났다. 또다시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한 이경규. 그의 모습은 ‘댐’에서도, ‘바다’에서도 살 수 있는 한 마리의 장어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