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풍성한 햇곡식과 제철 과일을 보면서 어린 시절 벼메뚜기 잡으며 뛰어놀던 가을을 떠올린다. 그 어린 시절은 가고 벼메뚜기도 사라졌다. 내가 뛰놀던 길은 더 이상 흙길이 아니고 길옆에는 논 대신 집이 가득하다.
내가 그리워하는 가을은 마음속이나 TV 속에 있다. 옛 개구쟁이들이 뛰어놀던 길을, 요즘은 덩치 큰 어린이들이 휴대전화를 보면서 고개 숙인 채 느릿느릿 걷는다.
새는 날고, 냇물은 달리고, 어린이는 맘껏 뛰놀며 자란다는 건 노랫말에만 있는 꿈같은 얘기인가. “아이들이 아니면 웃을 일이 없다.”고 하는데, 요즈음 놀이터나 골목길에서 아이들의 까르르 웃음소리를 들어본 기억이 아스라하다.
이것이 건강한 사회인가? 우리 어린이들은 과연 건강한가? 요즘 어린이의 키나 몸무게, 즉 체격은 예전에 비해 확실히 커졌다. 하지만 어린이 100명 가운데 6명이 비만하고, 과체중은 훨씬 더 많다고 한다. 비만한 어린이는 신체 활동량이 적고, 음식 섭취량은 많으며, 지구력 등 체력은 낮아진다. 체격이 커도 체력이 약하다면 무슨 소용일까? 속담에 ‘두부살에 바늘뼈’라고 하지 않던가? 걱정이다.
어린이는 고혈압이나 당뇨병에 걸릴 위험률이 높아지고, 외모로 인한 자신감 부족으로 스트레스도 심해진다. 게다가 비만한 어린이는 지방세포의 수가 늘어나므로 성인이 되어도 비만해질 확률이 높다.
한마디로 살이 키로 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린이는 우리의 내일이며 희망인데, 그 어린이의 하늘에 구름이 끼고 있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경우 음식의 절제와 체력 단련을 미덕으로 삼았다. 한마디로 음식 절제가 고대 그리스의 음식 윤리였던 것이다. 당시 그리스 도시국가에는 시민과 노예가 있었는데, 음식의 절제는 시민에게만 주어진 윤리적 의무였고, 노예에게는 무절제한 음식 섭취가 허용되었다고 한다.
노예에게는 오늘의 음식이 내일 또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우리 어린이는 고대 그리스의 시민보다 더 고귀하지 않은가? 그 귀중한 어린이가 내일이 없는 그리스의 노예처럼 무절제하게 음식을 먹는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혹시 부모에게 문제가 있지 않을까? 보행자 신호등이 빨간색인데 건너가자는 부모가 있다면, 그 부모의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어린이는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처음에는 학교에서 배운 것과 달라서 어리둥절할 것이다. 하지만 곧 익숙해지면서 불편한 마음 없이 건너기 시작할 것이다.
어린이가 좋아하는 정크 푸드는 건너지 말아야 할 빨간색 보행 신호와 같다.
만약 부모와 자식이 함께 정크 푸드를 맛있게 먹으면서 살찌는 것을 걱정한다면 이것 또한 아이러니 아니겠는가? 예전에는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는 고리타분한 속담과 ‘부모가 먼저 수저를 든 다음 먹어라’라는 말로 인내심, 즉 절제의 기본을 키워주었다. 음식이 풍부해진 요즘 ‘아이 먼저’ 음식을 먹도록 하는 부모를 흔히 본다. 그 결과 요즘 어린이는 최소한의 인내심조차 익힐 필요 없이 자라고 있다. ‘엿 장사네 아이 꿀 단 줄 모른다’던데, 너무 풍족한 음식을 마냥 풍족하게 거리낌 없이 먹는 데에 윤리적 문제는 없을까? 혹여 우리는 현대를 사는 어린이를 매일매일 매머드 고기를 맘껏 먹는 구석기 어린이로 키우는 건 아닐까? 아스팔트를 느릿느릿 걷는 구석기인으로 말이다. 어린이에게는 건강할 권리가 있고, 그 권리를 우리 어른들이 침해하면 안 된다.
해결책은 간단하다. 음식을 절제하도록 가르치면 된다. 김석신 교수는 서울대학교 식품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식품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 분야의 오랜 연구를 바탕으로 음식 윤리를 대중에 알려 우리 사회에 올바른 식문화가 정립되기를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