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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신 교수의 음식과 윤리

음식에 대한 세 가지 이데올로기

On September 01, 2014

식욕이 왕성한 사춘기 시절, 학교에서 집에 오자마자 하는 인사말은 늘 “배고파, 밥 줘!”였다. 밥이 없으면 그릇이라도 먹을 태세에 놀란 어머니가 허둥지둥 밥상을 차리면 별다른 반찬 없어도 단숨에 뚝딱 한 그릇 비우고 끄윽 트림을 한 후에야 ‘헐크’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시장이 반찬’이고 ‘배부르니까 평안 감사도 부럽지 않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도대체 그 강렬한 식욕과 뒤이은 만복감에서 오는 쾌락의 메커니즘은 무엇일까?

지금보다 훨씬 더 젊었던 시절, 장모님이 영지버섯과 그것을 달인 물을 보내어왔다. 진시황이 찾던 불로초라는 속설을 지닌 영지버섯은 암, 심장병, 고혈압 등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하지만 영지 달인 물의 쓴맛은 강렬했다. 감초를 넣어 단맛을 보탰다는데도 쓴맛을 지울 수는 없었다. 결국 한 번 마시고 손사래를 치며 물렸는데 지금이라면 아마 아무리 쓰다 해도 기를 쓰고 마셨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쓴 것이 약’이라는 사실을 잘 아는 나이이기에 훗날의 건강을 위해 이성과 의지로 눈앞의 쾌락을 억제할 수 있는 법이다.

한편 그리스도교에서 사순절이라 부르는 부활절 이전 40일 동안 신자들에게는 몇 차례 단식과 금육의 의무가 주어진다. 그런데 그 기간에 스스로 금주하는 신자들도 있다. 술을 정말로 좋아하는 이가 자발적으로 술을 끊는 행위는 거룩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게나 좋아하는 술을 40일 동안이나 끊을 수 있는, 강렬한 욕구조차 초월하는 그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사람은 동물 본능과도 비슷한 자연적 본성,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이성적 본성,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초월하는 영성적 본성이라는 세 가지 본성을 지닌다. 이를 자연성, 이성, 영성이라고 한다면 음식에 대한 이데올로기, 또는 이념 또한 자연성주의, 이성주의, 영성주의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사춘기 시절의 일화가 자연성주의, 쓴맛이 강해도 꾹 참고 먹는 영지물 일화가 이성주의에 해당한다면 사순절에 신앙심으로 술을 향한 욕구를 참아내는 것은 영성주의에 해당한다.

자연성주의는 본능과 욕구에 대한 자연스러운 응답으로 먹는 것을 뜻한다. 식욕은 유한한 생명을 지키는 데 필수 불가결하며 식욕을 만족시키면 자연스레 쾌락이 찾아온다. 음식의 자연성주의는 감각적 쾌락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보는 쾌락주의와도 일맥상통한다. 군대에서 갈망하는 초코파이, 이성적 욕구라기보다는 욕망의 차원에 가까운 맛집 탐방도 이에 해당한다.

음식의 이성주의는 자연성을 넘어 과학적 지식이나 합리적 사고에 의거해 음식을 먹는 것으로 합리주의, 과학주의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성주의의 최종 목표는 건강과 장수로, 영지버섯을 비롯한 다양한 건강식품은 이성주의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다. 건강 수명 100세야말로 현대인에게 삶의 목표가 되었고 이를 위해 고기보다 과채류를 더 많이 먹거나 유기농 식품을 사 먹는 등 나름의 노력을 하며 산다. 이는 건강을 위해 영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보신주의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음식의 영성주의는 자연성과 이성을 초월한 자세로 음식을 대한다. 영성주의는 종교적 가치뿐 아니라 철학과 도덕적 가치를 지향하는 태도로서 유대인과 무슬림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종교적 이념에 해당하는 영성주의, 미국인이 개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도덕적 이념에 해당하는 영성주의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영성주의를 통해 음식에 대한 자연적 욕구나 이성적 생각을 조절할 수 있다. 우리는 자연성주의, 이성주의, 영성주의라는 세 가지 이데올로기를 모두 지니고 있는데 사람마다 지향하는 주목표는 다르다.

하지만 한번쯤은 자극적인 음식을 푸짐하게, 중독된 듯 먹는 대신 영성주의적 먹거리 이념을 지향하며 자신에게 꼭 필요한 조촐한 음식을 즐기고 경우에 따라 기꺼이 절식도 하며 영과 육의 상태를 최고조로 유지하는 노력을 해보면 어떨까? 이렇게 절약한 자원으로 가난한 이웃을 돕거나 값이 좀 비싸더라도 공정무역 또는 로컬푸드 등을 선택해 좋은 먹거리 운동 실천으로 이어진다면, 영성주의 이데올로기를 지향하는 태도야말로 현대인에게 가장 바람직한 음식 윤리이지 않을까?

서울대학교 식품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식품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 분야의 오랜 연구를 바탕으로 음식 윤리를 대중에 알려 우리 사회에 올바른 식문화가 정립되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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