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추우나 더우나 문득문득 생각나는 맛, 많은 이들의 삶과 추억이 얽혀 있는 칼국수에 관하여.
A의 칼국수 이야기
어린 시절 혼자 밀어 맹물에 끓여 먹던 그 맛
어린 시절 어머니가 집을 비우면 혼자 칼국수를 밀어 먹었다. 왜 하필 칼국수를 만들어 먹었는지, 누구에게 반죽을 배웠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홀로 끼니를 해결해야 할 때면 으레 주방에 들어가 볼에 밀가루를 개고 꾹꾹 눌러 반죽하고 밀대로 온 힘을 다해 밀었다. 여기까지 하고 나면 팔과 어깨가 쑤셨지만 이것을 돌돌 말아 칼로 써는 것이 칼국수 만들기의 하이라이트였다. 최대한 가늘고 일정하게 썰어 도르르 말린 반죽을 펴면 길쭉한 면발이 만들어지는 것이 흐뭇했다. 어머니가 국물을 낼 때 쓰는 큰 멸치의 눈알이 무서워 그저 맹물을 끓인 것에 칼국수를 넣어 우르르 삶아내고 찬장에서 외할머니가 보낸 국간장을 찾아 넣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만든 칼국수는 담담하고 밀가루 내음이 올라오고, 그리고 어딘가 처량한 맛이 났다. 식탁에 홀로 앉아 처량한 맛의 칼국수를 먹자면 그렇게 인생이 흘러가리라는 묘한 예감이 들었다. ‘칼국수’ 하면 엄마나 할머니가 생각난다는 이들이 많지만 나의 어머니는 ‘그런 맨밀가루 반죽을 왜 먹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었기에 ‘칼국수’ 하면 혼자 주방에 덩그러니 칼국수 반죽을 밀어내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칼국수가 그저 ‘담담하고 처량한 맛’이 아니라는 것을, 칼국수도 사람들이 부러 찾아가 먹는 ‘요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대학에 입학하고 처음 알았다. 동경하던 선배가 ‘바지락칼국수가 먹고 싶어 죽겠다’며 끌고 간 가게에서는 세숫대야만큼 큰 그릇에 바지락과 국수 면발이 그득 나왔다. ‘으아~’ 하는 탄성을 내며 바지락을 까먹을 때마다 좋아하던 선배를 보며 덩달아 즐거웠다. 당시 제일 인기 좋은, ‘압구정’에서 온 칼국수라는 샤부샤부칼국수 앞에서는 고기와 채소를 잔뜩 먹은 후 소스를 찍어 먹는 칼국수가 내가 아는 그것이 아닌 것 같아 어딘가 미덥지 않았다. 몸이 아픈데 수술하라고 할까 봐, 그 돈이 무서워 병원에 가지 못한다며 나의 자췻집에서 쉬고 있어도 되겠냐는 동기의 연락을 받고 나서는 그 미련함에 화가 나고 어찌해 줄 수 없음에 속상해 약을 사 들고 가 화를 내다 칼국수가 먹고 싶다는 친구의 말에 속절없이 반죽을 밀기 시작했다. 잠이 든 친구를 앞에 두고 이미 어둑어둑해져 적막만이 감도는 거실에 파리한 빛의 백열등을 켜고 밀가루 반죽을 꾹꾹 내리누르고 있자니 ‘산다는 것은 왜 이리 고단한가’ 무언가 자꾸 치밀어 올라왔다. 생각해보면 인생의 많은 순간에 칼국수가 있었다. 친구들과 영화제 간다고 전주에 내려가 까르르거리며 찾아간 ‘베테랑 분식’의 고소하고 익살스런 들깨칼국수 맛, 집을 나와 갈 곳 없고 배고플 때 구원과도 같은 친구가 인심 쓴 24시간 매운탕칼국수와 청하의 알싸한 맛, 칼국수는 그렇게 능청스럽게도 자신의 색을 바꿔가며 슬프면 슬픈 대로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옆을 지켰다.
1. 종로 원조 할머니 손칼숙의 칼제비. 구수한 국물에 쫄깃하게 씹히는 면발이 자꾸 생각나는 맛.
2. 물과 밀가루, 소금만으로 반죽해 잘 숙성시킨 반죽을 기계로 민 뒤 주문이 들어오면 그 자리에서 썰어낸다.
서민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준 진한 멸치 국물 맛
종로 원조 할머니 손칼국수
종로3가 뒷골목에는 ‘칼국수 골목’으로 불리는 작은 거리가 있다. 멸치 국물을 베이스로 하는 ‘원조 할머니 손칼국수와’ 40년 넘게 해물칼국수로 사랑받은 ‘찬양집’이 약간의 거리를 두고 마주하며 종로 일대 회사원들의 끼니를 책임진다. 원조 할머니 손칼국수는 25년 전 처음 문을 연 뒤 구수한 맛과 푸짐한 양으로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진 곳이다. 멸치에 무와 파뿌리, 다시마 등으로 우려낸 구수하고 진한 육수에 직접 반죽해 넓적하게 자른 손칼국수를 넣어 끓여낸다. 손으로 자른 것이 한눈에 보이는 면발은 그 크기가 제각각인데 이것이 오히려 씹는 재미를 더하고 반죽은 잘 숙성되어 쫄깃함이 살아 있다. 여기에 김가루와 다대기를 풀어 먹는 정겨운 맛이 매력으로 매일 담그는 아삭한 겉절이가 질릴 틈 없이 젓가락질을 멈출 수 없게 한다. 이 집 메뉴에서 눈에 띄는 ‘칼제비’는 칼국수와 수제비를 합친 것으로 처음에는 칼국수와 수제비를 따로따로 팔다 단골들이 섞어 달라고 요청하는 일이 잦아 자연스럽게 칼제비라는 메뉴로 태어났다. 종로 한복판에 있다보니 평일에는 화이트칼라와 자영업자가, 주말에는 가족 단위로 즐겨 찾는다. ‘원조할머니’는 현재 몸이 편찮아 그 딸이 물려받아 맛을 책임지고 있다.
주소 서울 종로구 돈의동 49-1번지
영업시간 오전 11시~오후 8시(일요일 휴무) 문의 02-744-9548
국시집의 정갈한 사골칼국수. 부드러운 목넘김에 속이 편안하다.
A김숨의 소설 ‘국수’ 중에서…
‘그래요, 지금은 반죽의 시간입니다. 분분 흩날리는 밀가루에 물을 한 모금 두어 모금 서너 모금 부어가면서 개어 한 덩어리로 뭉쳐야 하는 시간인 것입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김숨의 단편소설 ‘국수’에서는 설암에 걸린 새엄마를 찾아간 중년이 된 딸이 칼국수 반죽을 밀어내는 몇 시간 동안의 과정이 밀도 있게 쌓아 올려진다. 친엄마가 집을 나가자 새로 들어온 새엄마를 딸은 ‘친엄마’가 아니라는 이유로 평생을 차갑게 대한다. 그런 새엄마가 집에 처음 온 날부터 꾸준히 양딸에게 내민 것은 아무것도 넣지 않고 양념간장 하나 쳐 먹는 칼국수였다. ‘손님처럼 마루 한쪽에 옹송그리고 앉아 밀가루 반죽을 이겨대던 당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손바닥 안의 손금이 다 닳아지지나 않을까 염려될 만큼 반죽을 꾹꾹 눌러대던 꾹꾹… 당신이 반죽 속에 몰래 섞어 넣어 그렇게 꾹 누르고 눌러야만 했던 것…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신이 오던 날 친척 어른들이 방 안에 모여 쉬쉬 나누던, 석녀 어쩌고 하는… 애를 낳지 못해 이혼당한 여자라는 소리를 엿들어서였을까요…’
설암에 걸려 혀가 끊어질 듯이 아파 아무것도 삼키지 못하는 새엄마를 위해 양딸은 처음으로 칼국수를 만들어준다. 자신이 그렇게나 싫어하던, 부러 심술을 내느라 숟가락으로 뚝뚝 끊어내며 깨작대던 칼국수다. ‘어찌나 고요한지, 반죽을 빚고 있는 나 자신과 까무룩 잠든 당신만이 유일한 생존자 같습니다. 얼마나 더 주무르고 치대고 이겨야 국숫발을 뽑기에 적당한 반죽이 만들어질까요. 당신이 양푼 속에서 소금물을 부어가며 치대고 치댄 것… 그것은 혹 밀가루 반죽이 아니라 시간이 아니었을까요. 문득 그런 생각이… 꾹… 내가 당신의 부엌에서 밀가루 반죽을 치대고 있을 줄은 정말이지 꾹…’ 국수를 한 번이라도 밀어본 이라면 누구나 가슴 먹먹히 공감할 만한, 칼국수가 아니고서야 느껴지지 않을 서사가 살아 숨 쉰다.
칼국수 히스토리
본래 잔칫날에나 먹던 귀한 음식
이제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음식인 밀가루 칼국수가 예전에는 왕실, 혹은 중요한 잔칫날에나 먹을 수 있던 대단히 귀한 음식이었다. 우리나라는 본래 밀가루가 잘 나지 않아 주로 메밀가루를 활용해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그 때문에 중국처럼 면 반죽을 길게 늘였다 다시 접고 그것을 늘였다 또 다시 접기를 반복해 국수 가락을 늘려가는 납면법으로는 면을 만들기가 힘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압착법과 절면법 두 가지로 국수를 만들었는데 압착법은 구멍이 송송 뚫린 틀에 반죽을 넣고 눌러 뽑는 방식으로 냉면이나 막국수 면 등이 이에 해당한다. 절면법은 밀가루로 반죽을 한 뒤 넓게 편 ‘번데기’를 말아 접어 칼로 썬 것으로 칼국수가 이에 해당한다. 압착법은 기구도 필요하고 힘이 많이 들어 장정 여러 명이 힘을 써야 하지만 절면법은 여자 혼자서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집집마다 절면법으로 국수를 만들어 먹었고 여기에서 칼국수가 유래했다.
조선 시대 조리서 <규곤시의방>에서는 메밀가루를 주재료로, 연결제로 밀가루를 사용해 만드는 절면이, <주방문>에는 메밀가루를 찹쌀 끓인 물로 반죽해 만드는 절면이 등장한다. 해외에서 수입한 밀가루로만 만드는 절면은 굉장히 귀해 양반집에서도 혼사 등의 큰 잔칫날에나 먹을 수 있었다. 흔히 결혼을 앞둔 처녀 총각에게 ‘언제 국수 먹게 해줄 거냐’고 묻는 말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렇게 귀한 취급을 받던 밀가루가 6.25전쟁 후 미국의 식량 원조로 서민들의 구호물자로 들어오게 되고 구호 급식이 시작되면서 서민들의 음식이 되었다. 분식장려운동이 전국적으로 펼쳐지면서 정부에서는 ‘분식의 날’을 정해 쌀 대신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먹는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펼친다. 이때 칼국수와 수제비가 서민들의 음식으로 자리 잡는다. 집집마다 칼국수를 흔히 만들어 먹고 지역별로 특색이 있는 다양한 칼국수가 생긴다.
박정희 정부 때에는 특히 ‘박정희도 육영수가 만들어주는 칼국수를 즐긴다’는 보도 등을 통해 칼국수를 정책적인 차원에서 홍보한다. 그래서인지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에 들어서는 칼국숫집이 가장 트렌디한 외식업체가 된다. 충청도식 칼국수로 닭 육수에 다진 고기 웃기가 올라간 ‘명동교자’와 경상도식 칼국수로 사골 국물을 사용한 성북동의 ‘국시집’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고 그 후 여기저기 칼국숫집이 우후죽순 늘어난다. 당시 인기를 끌던 칼국수는 대부분 닭 육수나 소고기 육수였으며 1990년도에 들어서 바지락칼국수, 해물칼국수가 새로이 유행하며 전국에 퍼져나간다. 김영삼 정부에 와서는 ‘칼국수 정치’라고 부를 정도로 칼국수를 좋아하는 대통령 덕에 칼국숫집의 위상이 더 높아지기도 했다.
물을 적게 배합하면 그만큼 반죽하기 힘들지만 곱고 얇게 면을 썰 수 있다. 오랜 시간 면을 밀어온 내공도 무시할 수 없다.
정계를 이끈 경상도식 칼국수
성북동 국시집
정부가 대대적으로 칼국수를 장려했던 1969년에 오픈한 성북동 국시집은 정재계 인사, 특히 김영삼 전 대통령이 즐겨 찾는 곳으로 더 유명해졌다. ‘칼국수 정치’라고 불릴 정도로 칼국수를 좋아해 대통령 오찬 메뉴로도 즐겨 올릴 정도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던 곳이 성북동 국시집이었다. 안동 지역의 ‘건진국시’ 전통을 잇는 이곳의 칼국수는 한눈에 보아도 얇고 고운 모양새의 면발이 특징이다. 칼로 썬 국수 가락 그대로를 장국에 넣고 끓여 제물에 올린 것을 ‘제물국시’, 면발을 따로 삶아 건져내 차가운 장국을 부어 낸 것이 ‘건진국시’로 안동 지역 반가에서는 최대한 얇고 곱게 면발을 썰어 만든 건진국시로 안주인의 솜씨를 뽐내곤 하였다. 국시집은 차가운 장국 대신 뜨거운 사골 국물에 면발을 넣는 것이 다르다. 기계를 일절 사용하지 않고 반죽부터 밀기, 자르기까지 모든 작업을 수작업으로 한다. 면이 유난히 얇아 후르르 부드러운 목 넘김이 좋고 웃기로 올라가는 소고기가 감칠맛을 더한다. 애호박까지 더해져 다소곳하니 정갈하고 속 편안한 칼국수다. 반죽할 때 물을 적게 배합해 얇은 면이지만 빨리 퍼지거나 툭툭 끊어지지 않는다.
주소 서울 성북구 성북동1가 9
영업시간 정오~오후 2시 30분, 오후 5시 30분~오후 9시(마지막 주문 8시 15분까지)
문의 02-762-1924
날이 추우나 더우나 문득문득 생각나는 맛, 많은 이들의 삶과 추억이 얽혀 있는 칼국수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