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글의 심상을 눈여겨보고 있는, 모 매체의 에디터 한 명이 최근 자신의 트위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한 바 있다. “지금부터 속이 바짝 타들어가고 있을, 마감을 코앞에 둔 세상 모든 에디터들을 위하여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틀겠나이다.”
당연히도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라 단독 표기한 이유는 바흐 때문이 아니라, 글렌 굴드 때문일 것이다. 일찍이 알렉산더 슈나이더가 “살짝 미치기는 했지만 피아노만큼은 당대 최고”라 극찬한 바 있는, 샴페인 파티장에 말쑥한 턱시도를 갖춰 입고 2대8 가르마를 완벽히 빗어 넘긴 채 나타날지언정 털이 보송보송한 두툼한 장갑만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콘서트 투어를 죽기보다 싫어하고 손가락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괴짜’라는 별명이 떠돌아다녀도 콧방귀도 뀌지 않았던 그 글렌 굴드가 뉴욕 이스트 30번가의 낡은 건물에서 전설적인 ‘굴’드베르크 변주곡을 초연했을 때 그의 나이 고작 스물셋이었다.
때마침 ‘펑크의 대모’ 패티 스미스가 내한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김에 몇 개월 동안 읽을까 말까 묵혀두었던 <저스트 키즈>를 꺼내 들었다. 그녀가 솔메이트(서로의 감성과 영감을 충만케 하는 관계라는 이 케케묵은 단어에 딱 맞는 사례는 20세기 들어서는 이 커플만이 유일할 것이다. 굳이 역사 속에서 찾아보자면 고흐와 그 동생 테오 정도?) 로버트 메이플소프와 1960년대와 1970년대 뉴욕이라는 냉랭하면서도 낭만적인, 참혹하지만 뭉클한 역사적 현장을 관통하며 겪어낸 생생한 시적 언어의 기록.
비트족 샌들과 양가죽 조끼를 입고 누더기 스카프를 걸친 채 광장에 울려 퍼지는 포크송 가수들의 노래와 반전 데모의 행렬과 “저들은 예술가가 아니라 그저 애들일 뿐이야”라고 조소하는 노인들 사이에서 외롭지만 뭉클하게 손에 깍지를 낀 채 서 있던 이 커플.
디에고 리베라의 도록, 잭슨 폴록에 대한 비평집, 윌리엄 블레이크의 <순수와 경험의 노래> 복사본,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고이 간직해온 아르튀르 랭보의 시집, 그리고 영화 <보니 앤 클라이드>의 포스터만 덜렁 놓여 있을 뿐인 허름한 뉴욕의 뒷골목 그 어디쯤.
이 젊은 예술가 커플은 그 온기 하나 없이 차디찬 공간들 사이로 울려 퍼지는 존 콜트레인의 ‘러브 수프림’과 조앤 바에즈, 밥 딜런의 ‘블론드 온 블론드’와 엘리노어 스테버의 ‘마담 버터플라이’를 들으며 초라하면서도 위대한 20대 초반을 흘려보냈던 것이다.
그 즈음 보도가 꽝꽝 얼어 거니는 사람 하나 찾을 수 없는 고요한 일요일 오전, 충무로의 허름한 뒷골목을 걸어 대한극장 한쪽에 자리 잡은 채 조용히 <레미제라블>을 보았다. 참혹할 정도로 추운 날이었고, 커플 하나 나타나지 않는 냉혹한 공간이었으며, 예술적 낭만 따윈 눈을 씻고도 찾아 볼 수 없는 삭막한 날이었건만 상관없이 <레미제라블>을 보았다.
물론 집단적 힐링 따윈 경험하지도 못했고, 가끔 울컥하기는 하였으나 펑펑 눈물을 쏟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노래하는 앤 해서웨이는 지독하리만큼 아릿하게 예뻤지만. 그나저나 그래서 어쨌다고? 코맥 매카시의 언명은 진즉 틀렸다는 걸 그리도 몰랐나?
그 즈음 너무나 투명해 시퍼런 핏줄 하나하나가 그대로 눈에 들어와 박힐 정도로 곱상하면서도 초췌한, 전형적인 프랑스식 외양을 띤 한 젊은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혀만 끌끌 찼다. 저 세상사에 둔감한 도련님이 ‘비참한 사람들’에 대해 무엇을 알까. 과연 지금 발화하고 있는 저 과잉된 언어의 속뜻을 10%라도 이해하고 있을까.
그런데 결국 눈물이 났다. 파리 시민들이 문과 창문을 닫아건 채 외면하고, 막강한 화력을 앞세운 정부군이 대포를 쏘아대며, 결국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기적인 내면 속으로 깊이 침잠해버렸을 때 그 청년은 프랑스 국기를 휘감은 채 기꺼이 창문 밖으로 거꾸로 나가 떨어졌다. 그리하여 인류사에 남을 위대한 프랑스 공화국은 그 새파랗게 질린 겁 많은 청년의 시행착오와 과잉과 용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그리하여 다시금 말하지만, 세상 모든 젊은 것들을 찬양함. 마음으로. 깊숙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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