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실장님이 대세라더니 그것도 옛말, 이젠 의사 선생님이다. TV만 틀면 여기저기 의사 천지다. 흥선대원군 시대로 시간 여행을 간 신경외과 의사부터 고려시대로 날아가 무사의 여인이 되는 의사에, 시초를 다투는 응급실 의사, 한의사와 짝을 이룬 의사까지. 요즘처럼 TV만 틀면 의사들이 우르르 나오는 때가 또 있었던가 싶다. 조선시대 수의사를 다룬 드라마까지 나온다니 보건복지부 장관이라도 나서서 올해를 의사의 해로 지정할 기세다.
2012년 방송가를 ‘의학 드라마의 홍수’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방송사끼리 약속이라도 한 듯 지상파 3사는 물론, 케이블 공룡 CJ까지 두 팔 걷고 의학 드라마 제작에 나섰다. 올 한 해 방송된 의학 관련 드라마만 해도 KBS2 <브레인>, JTBC <신드롬>, MBC <닥터 진> <골든타임>, SBS <신의>, tvN <제3병원> 그리고 10월 방송을 시작하는 MBC <마의>까지 총 7편이다. 한국이 갑자기 병원 왕국이라도 된 걸까? 아니면 의사에 국민적 관심이 몰리고 있는 걸까?
의학 드라마가 갑작스럽게 범람하는 이유를 찾으려면 아무래도 흥행의 지표인 시청률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수치가 꽤 흥미롭다. 가장 최근 종영한 작품부터 살펴보자. <닥터 진> 8.8%(이하 최종회, AGB닐슨 집계 기준), <브레인> 16.1%, <심야병원> 4.1%, <산부인과> 11.9%. 좀 더 성공한 예전 작품을 보자. <하얀 거탑> 23.2%, <외과의사 봉달희> 24.9%, <뉴하트> 32%. ‘국민 드라마’의 기준이라는 40%를 넘은 작품은 하나도 없고 그나마 <뉴하트>가 유일하게 30%대를 기록했다. 의학 드라마의 지존 <하얀 거탑>도 20%대 초반에 그쳤고, 신하균 신드롬을 일으킨 <브레인>은 20%에도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냈다. 40대 이상 시청자들을 끌어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의학 드라마가 ‘흥행 불패’ 장르라고 말하는 것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이야기다. 단, 이렇게 말할 순 있다. 의학 드라마는 만들기는 쉽지 않아도 일단 만들고 나면 크게 망하는 일은 흔치 않다고. 꿈의 시청률 40%를 넘기며 전 국민의 사랑을 받은 드라마는 없지만, 욕만 먹고 사라진 작품도 드물다. 수요층은 주로 20, 30대 여성들이다. <하얀 거탑> <외과의사 봉달희> <뉴하트> <브레인> 그리고 최근의 <골든타임>까지. <골든타임>의 김진만 책임 프로듀서(CP)는 “의학 드라마는 국내에서 가장 확실하게 검증된 장르물”이라고 규정한다.
의학 드라마에 시청자들이 열광하는 이유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일처럼 긴장감 넘치는 영역은 없다. 의학 드라마는 그 영역을 정면으로 다룬다. 막장 드라마의 황당함이나 범죄 드라마의 잔인함을 피하면서도, 생사의 기로에 선 인물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펼쳐 보일 수 있다. 하지현 건국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시청자 스스로 의사, 환자와 동일화하기 때문에 드라마에 좀 더 깊숙이 들어간다고 말한다. 때론 “생과 사를 다루면서 생명을 구원하는 의사라는 전지전능한 존재”에 빠져들며 ‘나도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대리 경험을 할 수도 있고, 환자와 동일시하며 자신이나 가족이 경험했던 힘든 기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하 교수는 “폭력적인 장면이나 자연재해 같은 게 없어도 짧은 시간 내에 긴박감과 극적 반전을 줄 수 있는 것”을 의학 드라마의 장점으로 꼽았다.
그런 점에서 국내 의학 드라마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두 작품이 있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 방송된 MBC <종합병원>과 일본 원작을 리메이크한 <하얀 거탑>이다. <종합병원>은 신은경, 전도연, 전광렬, 이재룡, 김지수 등을 스타로 만들며 2년 가까이 장수한 인기 드라마였고, <하얀 거탑>은 내밀한 인간 드라마와 묵직한 정치극으로 의학 드라마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이다. 하 교수 역시 드라마사(史)에서 가장 중요한 의학 드라마로 두 작품을 꼽았다. <종합병원>이 이전 의학 드라마와 차별적인 건 “인턴과 레지던트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성장 드라마를 다뤘다”는 점이다. 매회 에피소드가 끝나는 구조도 새로웠다. <하얀 거탑>은 고참 의사들 사이의 정치를 다루며 의사라는 사회적 존재의 의미, 삶의 존재 의미를 그렸다는 점에서 의학 드라마의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하얀 거탑> 이후 의학 드라마는 로맨스와 성장 드라마, 정치극 사이를 오갔다. 때론 스릴러와 시대극 같은 장르를 껴안기도 했다. 2012년 방송가를 수놓은 의학 드라마는 이 같은 변화의 축약판 같다. 현재의 의사가 19세기 말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의 <닥터 진>과 과거로 간 여의사가 고려시대의 무사와 시공을 초월한 사랑을 나눈다는 <신의>는 의학 드라마라기보다는 판타지 드라마로 보는 게 맞을 듯하다. 사실상 같은 뿌리에서 나온 작품인 두 드라마에서 ‘의학’은 단지 토핑에 지나지 않는다. 드라마 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두 드라마에서 의학은 단지 소재 차원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의학 드라마라고 보기는 힘들다”면서 “의료의 진정성을 다루기보다는 현대 의술을 신기한 볼거리로 만드는 드라마”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브레인>의 뒤를 잇는 정통 의학 드라마 <골든타임>은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의학 드라마의 최근 경향인 꼼꼼한 고증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의사의 직업윤리와 책임, 현실과 이상 사이의 딜레마 등을 고루 담고 있다. 거기에 왜곡된 의료 현실을 고발한다는 사회적 메시지도 있다. 김진만 CP는 “생사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시간이라는 골든타임을 소재로 중증 외상 환자를 다룬다는 점에서 ‘에지’가 있다”고 말한다. 40대 이하 사망 원인 1위라는 중증 외상을 다루는 의사들의 이야기가 시청자의 관심을 끄는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이야기다.
과거 의학 드라마 속 의사들은 천재적인 영웅이거나 정의감에 불타는 의인, 카리스마 넘치는 전문 직업인이 대부분이었다. 요즘은 조금 다르다. 작가들은 그들에게서 권위나 정의를 빼앗고 그 대신 해결하기 힘든 고민을 던져준다. 의사라는 정체성과 그에 따른 질문을 생각하게 하며 궁지로 몰아넣는다. 심지어 최근 한국 드라마의 만능 아이템인 로맨스조차 앗아가기까지 한다. 덕분에 <골든타임>의 주인공들은 멜로 연기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직구도 자주 쓰면 질린다. 의학 드라마를 제작하는 사람들도 변화구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온 게 장르 분화와 혼합이다. 외과에서 신경외과, 성형외과, 산부인과로, 그리고 중증외상센터와 양·한방 협진병원으로 분야를 확장한다. 로맨스, 스릴러, 수사극, 시대극, 판타지 등 이종교배도 빈번해지고 있다.
하지현 교수는 국내 의학 드라마가 앞으로는 ‘미드’를 따라가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성형외과를 다룬 막장 의학 드라마 <닙턱>이나 친구들끼리 동업해 개업한 병원이 배경인 <프라이빗 프랙티스>, 부촌의 왕진 의사를 소재로 한 <로열 페인즈>처럼 국내 의학 드라마도 점점 구체적이고 세분화될 것이라는 견해다. 국내에선 의학 드라마와 추리 수사극을 결합한 <신의 퀴즈>가 하나의 힌트가 될 듯하다.
업계 내에서 ‘안정빵’이라 불릴 만큼 의학 드라마는 매력적이다. 그렇지만 그것만 보고 무작정 덤벼들 수 없는 것도 이 장르의 특성이다. 의학 드라마의 구성 요소들을 제대로 준비하는 게 적잖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의사는 전문직이면서도 매우 익숙한 직업인 탓에 제작진은 탄탄한 시나리오는 물론, 치밀한 사전 조사와 세밀한 검증을 거쳐야 한다. 세트 제작이나 특수 분장 등에도 적지 않은 비용을 써야 한다. 연출자도 힘들고 배우도 힘들다. 더구나 중간은 하지만, 대박도 힘들다. 제작하는 입장에서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골든타임>의 김진만 CP는 의학 드라마에 대해 “장사가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한다. <뉴하트>도 제작비가 많이 들어 수익이 거의 나지 않았다고 한다. 광고가 줄줄이 붙는 의학 드라마는 없다는 이야기다. 하긴 유치원생 꼬마와 70대 할머니가 함께 보는 의학 드라마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알아듣기 힘든 전문 용어가 난무하는 의학 드라마로 중장년층 여성 시청자를 사로잡기엔 분명 한계가 있다. 더구나 의학 드라마는 한류 시장에서도 찬밥이다.
‘빛 좋은 개살구’인 의학 드라마가 요즘 갑자기 쏟아진 이유는 뭘까? 김진만 CP는 의학 드라마의 유행에 주기가 있다고 했다. 올 한 해 의학 드라마가 봇물처럼 터져 나온 건 방송사마다 그러한 주기를 탄 거라는 말이다. 실제로 2007년 <하얀 거탑>부터 올 초 종영한 <브레인>까지 방송된 모든 의학 드라마는 연말이나 연초에 전파를 탔다. 예외적으로 <닥터 진>은 <태양인 이제마>(2002) 이후 10년 만에 제작된 ‘여름 시즌 의학 드라마’였는데 그땐 이미 종편과 케이블의 가세로 의학 드라마가 홍수를 이룬 상황이었다.
매년 1~3편에 머물던 의학 드라마는 최근 종편 개국, CJ의 공격적인 드라마 제작 등과 맞물리며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진지하고 묵직한 정통 의학 드라마가 여전히 ‘흥행 불패’ 신화를 이어가고,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도로 의학 드라마의 외연을 넓혀가기도 한다. 하지만 작품 수가 늘어나면서 의학 드라마의 희소가치도 명성도 점점 퇴색하는 분위기다. 저조한 반응을 얻으며 조용히 사라진 MBC의 <닥터 진>과 JTBC의 <신드롬> 같은 작품이 앞으로 더 많아질 것이란 예상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방송사들이 한꺼번에 쏟아냈으니 당분간 의학 드라마 제작 붐이 잠잠해질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의학 드라마에 대한 시청자의 관심이 쉽사리 사그라질 것 같진 않다. 의학 드라마만의 긴장과 감동은 쉽게 찾기 힘든 소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 사회가 그런 걸 원하니까.
의학 드라마는 검증된 장르물로 자리 잡았다. 사람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긴박한 상황 덕분이다. 또 그 뼈대에서 파생될 영역도 무궁무진하다. 이런 특수성에 힘입어 그 흐름은 계속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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