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코트·베스트·팬츠·흰색 셔츠·반소매 터틀넥 모두
프라다 제품.
(여자)시폰 소재 롱 원피스·목걸이 모두 구찌, 보라색 하이힐 크리스찬 디올 제품.
이것은 인터뷰가 아니다. <추적자>가 후반부로 흐를 무렵 김상중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매니저가 없었다. 수화기 건너편 목소리는 뉘앙스만 약간 달랐을 뿐 드라마 속 강동윤과 한 치도 어그러짐없는 단호한 말투였다. ‘전, 인터뷰 안 합니다. 다만, 패션 화보라면 찍어보고 싶습니다.’ 십수 년간 웬만한 인터뷰이는 다 만나보았다고 자부했건만 저절로 몸이 움찔해지는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그 단호함에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마 하고 <추적자> 종방 이후를 기약했다.
그는 엔진 성능이 스포츠카에 버금가는 자동차를 직접 몰고 나타났다. 잘 알려졌다시피 그는 소문난 스피드광이다.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선보인 바이크 실력은 수십 년간 쌓은 내공 덕에 가능했던 것이다. 헤어 메이크업을 전혀 하지 않은 단출한 외양으로 터벅터벅 걸어 내려오는 그의 얼굴은 의외로 순수해 보였다. 브라운관을 통해 익히 지켜봤던 양옆으로 날카롭게 치솟은 눈썹과 주름은 실제로 보니 고정된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펴지기도 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눈매를 편하게 풀어헤친 채 부드러운 말투로 첫마디를 떼는 그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더군다나 ‘참고로 전 왼쪽이 좋습니다’라고 나지막이 위트 그득 밴 멘트까지 덧붙이다니.
그래도 시청자들의 마음을 강렬하게 흔들었던 그 텐션은 여전했다. 그의 성향을 반영한 듯 무더위에도 빳빳한 흰색 셔츠 차림으로 스튜디오에 들어온 김상중은 핏이 완연한 맞춤 수트가 아니고서는 몸에 걸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화보 촬영에 익숙하지 않은 터라 뒤를 동여매고, 핀을 잔뜩 꽂아야 하는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조용히 정해진 옷을 걸치더니 묵묵하게 촬영에 임하기 시작했다. 이제나 저제나 등장하기만 고대했던 특유의 포스가 조금씩 그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레이스 켈리를 빼닮은 외국 여자 모델을 스튜디오로 불러들인 건 그의 지적인 이미지에서 자동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추적자>를 보며 새삼 느낀 건 대한민국에 그만큼 지적이면서도 우아한 배우를 또 찾을 수 있을까, 라는 것. 40대를 넘어서도 지성적인 느낌이 가득 밴 클래식 수트를 입을 줄 아는 남자를 또 만날 수 있을까, 라는 것이었다. 지금 프로젝터가 새하얀 벽면에 쏘고 있는 건 소녀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는 흑백사진 속 그레이스 켈리. 그리하여 오래전 그때와 같이 스튜디오에는 아트 테이텀의 우울하면서도 경쾌한, 불합리한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졌고, 엘라 피츠제럴드는 콜 포터와 조지 거슈윈의 송북을 특유의 솔 느낌이 충만한 목소리로 불러 젖혔으며, 카를로스 가르델은 지직거리는 흑백 영상 속에서 클래식 수트에 정중한 중절모까지 눌러 쓰고 ‘Por una cabeza’를 합창했다.
그리하여 이것은 인터뷰가 아니다. 끊임없이 화보 촬영이 이어지던 막간, 그는 인터뷰를 하지 않는 이유를 담담히 설명했다. 누구든 똑같은 얘기를 하고 받아 적고, 젊었을 때 고생깨나 해야만 배우 타이틀을 달 수 있는 것처럼 취급되며, 연예인이라면 자살 시도 한 번쯤은 해본 우울증 환자로 판정받는 것이 너무나도 싫다는 것. 결국 순수하게 작품 이야기만 하는 인터뷰는 본 적도 해본 적도 없기에 거부한다는 것.
검은색 턱시도 재킷 루이 비통, 흰색 턱시도 셔츠·검은색 벨벳 보타이·금장 커프링크스 모두 톰 포드 제품.
굳이 맘먹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20년 넘게 연극 무대와 브라운관, 스크린을 통해 쌓아온, 몸에 각인되어 있는 그의 연기관이 분위기가 풀리면서 조금씩 같이 풀려나오기 시작했다. 20년 넘는 연기 경력을 가진 그도 <추적자> 대본을 받아 들자마자 푹 빠져들었다는 것. 배우는 모두 일종의 직업병을 갖고 있기에. 자신의 경우 이해와 공감이 가는 짜임새 있는 작품은 한 번만 읽어도 대본을 깡그리 외울 수 있지만 수준이 떨어지는 작품은 몇 번을 읽어도 입에 붙지 않는다는 것. 이번 <추적자> 촬영은 박근형 선생과 손현주 사이에서 불꽃 튀는, 이른바 고수들 간의 싸움이었다는 것. 방송 2주 전에야 촬영이 간신히 시작된 탓에 거의 라이브로 촬영하고 방영해야 했지만 아무도 그것에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 심지어 엔지 한 번 나지 않을 정도로. 그렇지만 하루 만에 90분짜리 드라마가 떡하니 나오는 현실은 바뀌어야 하지 않겠냐는 것.
박근형 선생과 동갑내기 손현주와 치열한 연기 대결을 펼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영광이자 즐거움이었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그는, 그렇다고 최근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아이돌 출신 배우들을 폄훼하진 않았다. 가끔은 그들만의 놀라운 순발력에 깜짝 놀랄 때가 있다는 것. 머릿속으로 모든 것을 꼼꼼하게 계산하고 맞춰본 다음에야 슛에 들어갈 수 있는 연기자가 있는 것처럼 즉각적이고도 즉물적인 행동을 연기로 끌어들일 수 있는 연기자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
그래도 <추적자>에서 선보인 완벽에 가까운 연기 패턴에 대해서는 그 스스로도 조용히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가 연기했던 장면 중에서 방송되지 못하고 잘려나간 장면은 단 하나. 혜라의 배신 이후 새로 뽑은 보좌관에게서 그녀의 10년 전 풋풋했던 모습을 떠올렸던 신. 주변 상황이 여의치 않아 결국 통째로 날아간 그 장면이 지금도 못내 아쉽다고.
그리하여 그와의 대화는 45세라는 뒤늦은 나이에, 평소 드라마와 영화 한 편 보지 않고도 첫 작품을 완벽하게 완성해낸 작가에 대한 칭찬으로 이어지더니 전작(前作)인 <내 남자의 여자>를 쓴 김수현 작가에게로 연결된다. 호날두와 메시가 순전히 축구 실력 덕분에 고액 연봉을 받듯, 김수현 정도 되는 작가라면 높은 대가를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잠시 실제로 마주 대하니 의외로 자그마한 얼굴에 깜짝 놀랐다는 말에 허허 너털웃음을 짓는다. 자신의 실제 모습은 <인생은 아름다워> 속에서 스피드 투어를 즐기며 프라이빗한 삶을 고수하는 양병준과 싱크로율이 가장 높다며, 결국 자신을 두고 천상 마초라고 단정짓는다.
<추적자>의 높은 인기에 은근히 기분 좋았겠다는 묻는 이의 호들갑에 언제부턴가 자신을 비롯한 몇몇 배우들은 인터넷의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었다는 나직하면서도 묵직한 멘트를 날린다. 다시 한 번 움찔.
스튜디오 내에 스멀스멀 새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턱시도를 갖춰 입은 채 젠틀한 이미지를 연출하던 김상중은, 언제부턴가 입꼬리를 한쪽으로 치켜 올린 채 독한 담배 연기를 끊임없이 내뱉고 있다. 눈썹과 눈매를 슬쩍 움직이는 것만으로 미세한 감정 변화를 끌어올리는 그의 집중력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철컥철컥 카메라의 미세한 셔터 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지금, 수십 명의 스태프들이 하나같이 깊은 침묵에 빠진 채 그만을 응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인터뷰가 아니다. 40대 중반의 남자 김상중을 코앞에서 관찰하고 뜯어본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이다.
감색 재킷·꽃무늬 실크 머플러·검은색 팬츠 모두 구찌, 갈색 윙팁 슈즈 루이 비통 제품.
(왼쪽 페이지) 오렌지색 코듀로이 재킷·갈색 니트·흰색 팬츠·스카프·패턴 행커치프 모두 구찌 제품. (여자) 보라색 니트·패턴이 들어간 플레어스커트 모두 크리스찬 디올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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