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1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위건’은 20개 팀 중 최하위를 달리다가 마지막 10게임을 남겨두고 리버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아스널과 같은 강팀에게 차례로 승리, 극적으로 1군 잔류에 성공했다.
풍경 2
한국 프로 야구 9구단 ‘NC 다이노스’의 2013년 1군 진입이 진통 끝에 가까스로 확정됐지만 2015년을 목표로 한 10구단 창단은 일부 대기업 구단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사실상 무산됐다.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 축구의 빅 리그는 시즌이 뒤로 갈수록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2011~2012 시즌 영국의 프리미어리그가 그러했다. 맨체스터 시티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의 선두 경쟁도 치열했지만 ‘풍경 1’에서 보듯 강등권 탈출을 두고 벌이는 하위 팀들 간의 경쟁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였다. 한국의 K리그와는 달리, 프리미어리그(를 비롯한 유럽의 빅 리그)는 20개 팀 중 하위 3개 팀을 하부 리그로 내리고 그 자리에 하부 리그의 상위 3개 팀을 올리는 승강제를 실시한다. 우승 팀이 일찍 결정되어도 강등권 경쟁은 시즌 마지막 날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팬들의 관심은 시즌 내내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한국 프로 스포츠의 관점에서 보자면 굉장히 생소한 풍경이라 할 만하다. 한국의 프로 스포츠는 철저히 우승한 팀과 우승하지 못한 나머지 팀으로 극명히 나뉘는 이분법의 세계다. 팬 서비스를 통한 흑자를 구단의 최종 목표로 삼는 프로 스포츠의 선진 국가와 달리 한국은 기업 이미지 제고를 위한 우승만을 지상 최후의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프로 스포츠팀들은 팬들을 위한다는 모토를 내세우지만 실질적으로는 팬이 아닌 모(母)기업을 위해 존재한다. 실제로 프로 야구는 1982년 출범 이후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지만 9구단에 이은 10구단 창단을 통해 시장의 확대를 꾀하려고 해도 뜻을 이루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풍경 2’에서 언급했지만 결과적으로 우승할 수 있는 확률이 줄어들 거라고 판단한 몇몇 재벌 구단이 반대표를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한국의 프로 스포츠팀들 대부분은 매년 큰 폭의 적자를 메우지 못하는 실정이다. 구단 자체가 기업이었다면 회장 혹은 구단주 교체와 같은 방식으로 (일례로,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는 경선을 통한 회장 선출로 팀의 체질 개선과 수익 구조의 다변화를 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적자 구조를 고치려 하겠지만 기업의 소유인 상황에서 실권자의 의지가 발동하지 않으면 변화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팀이 유지되는 것은 모기업의 직원 단합 등 내부 결속과 같은 목적이 절대적으로 작용하는 까닭이다. 한국의 프로 스포츠 게임에서 유독 자주 연출되는 볼썽사나운 광경, 감독과 선수 할 것 없이 심판의 판정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이들의 최종 목표가 모두 우승에만 있는 탓이 크다.
바로 이 점이 한국 프로 스포츠가 갖는 한계의 본질인데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K리그가 2013년 시즌부터 승강제를 실시, 좀 더 팬들을 위한 경기를 준비한다는 점이다. 물론 K리그의 일부 구단들이 승강제를 반대하는 등 진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꾀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렇다고 승강제가 팬 서비스를 위한 만병통치약이 될 수는 없다. 오래전부터 승강제를 실시하며 나름 타의 모범을 보인 유럽의 축구 리그에도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승부 조작이나 훌리건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고민거리였고 리그의 인기가 날이 갈수록 치솟다 보니 전 세계 거부들이 경쟁적으로 클럽을 사들여 트레이드 시장을 어지럽히는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유럽의 축구 시즌이 거의 막을 내린 현재(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첼시와 FC 바이에른 뮌헨이 맞붙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만이 남은 상태다), 대표적인 리그의 우승이 확정된 팀들은 대개 막강한 자금력이 뒷받침되고 있다. 스페인의 프리메라리가에서는 강력한 우승 후보 FC 바르셀로나가 2위로 내려앉는 이변(?)이 연출됐지만 감독부터 선수까지 호화 군단으로 불리는 레알 마드리드의 우승이 그리 낯설지 않아 보인다.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경우, 시즌 내내 맨유와 1위 싸움을 벌인 맨체스터 시티가 영입한 선수들의 몸값에 걸맞은 결과로 환호성을 불러일으켰다. 다만 각 포지션별로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선수를 모은 이들 재벌팀의 우승은 상대적으로 예상이 가능한 경우라서 연고 팬과 같은 직접적인 연이 없다면 다소 흥미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동떨어진 비유일지 모르지만, 맨체스터 시티와 첼시, 레알 마드리드와 같은 재벌 구단의 경기를 보고 있으면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이나 런던의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 여담이지만 사람들은 왜 대영박물관이라고 부를까?)을 구경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전 세계에서 광범위하게 약탈한 귀한 문화재들을 모아놓은 탓에 규모가 방대하고 개별적으로 좋은 작품은 많지만 뭔가 응집력이 없다고 해야 할까. 오히려 규모나 인지도 면에서는 떨어지지만 1900년대 초기의 인상주의 작품을 일별할 수 있는 오르세 미술관이나 지금 젊은 영국 작가들이 동시대에 작업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테이트 모던이 더 흥미롭고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리그의 우승 경쟁보다 하부 리그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가난한 구단들끼리 벌이는 강등권 싸움, 또는 예상을 뒤엎고 선수 구성이나 클럽 규모 면에서 한 수 아래인 팀들이 빅 클럽을 상대로 대등한 경기를 펼치거나 이기는 게임에 더 관심이 갔다. ‘풍경 1’의 위건은 차치하더라도 유로파리그에서 맨유를 꺾고 결승까지 오른 중소 규모의 스페인 클럽 빌바오의 경기력은 스포츠의 매력이 무엇인지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맨유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경기를 앞두고 빌바오에서 경계해야 할 선수가 누구냐는 질문에 “아르헨티나 출신의 비엘사 감독”이라고 답할 정도였다. 그만큼 빌바오는 특정 선수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닌 감독의 전술, 전략에 따라 팀 자체가 유기적으로 움직여 120% 능력을 발휘, 승패와 관계없이 올 시즌 가장 매력적인 경기력을 구사한 팀으로 관심을 모았다.
비록 빌바오는 유로파리그 결승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게 패배,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지만 클럽의 가치는 그 어느 때보다 수직 상승했다. 비엘사 감독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유로파리그 준우승으로 얻은 수익금으로 좀 더 유능한 선수의 영입이 가능해졌다. 무엇보다 클럽의 존재를 전 세계 축구 팬들에게 각인시켰다는 점에서 빌바오 수뇌부(와 프리메라리가의 운영진)들은 상당히 고무된 상태다. 이야말로 팬들을 위한 축구를 구사했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결과다. 구단의 가치, 선수 개개인의 능력은 떨어질지 몰라도 열정만큼은 뒤질 것 없는 감독과 선수들이 명문 구단과 맞붙어 대등한 경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팬들에게는 일종의 서비스가 되는데 이를 넘어선 성과까지 이룬다는 것, 거기에는 단순히 돈만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프로 스포츠의 진짜 가치가 담겨 있다.
비록 위건과 빌바오는 축구의 사례지만 국내의 모든 프로팀들이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특히 시장을 뺏길 것을 우려해 10구단 창단을 반대하는 일부 프로 야구단에게 시사하는 바는 예사롭지 않다. 위건과 빌바오의 선전이 해당 클럽뿐 아니라 리그 전체의 인지도 및 시장의 확대를 가져오는 것 또한 중요하다. 맨유와 빌바오 경기를 시청한 후 빌바오의 경기력에 매료된 시청자들이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의 팀을 응원하는 팬들뿐 아니라 라이벌 구단을 응원하는 팬들 역시 리그 전체로 보자면 똑같은 팬이라는 사실, 이런 동업자 의식이야말로 자본이 활개치는 프로 스포츠에서 유일하게 스포츠 정신으로 인정받을 만한 것이다. 리그가 있기 전 팀이 있고, 팀이 있기 전 팬이 있다. 그래서 팬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우승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이를 넘어 어깨동무해가며 리그의 발전을 도모하는 팀 간의 경쟁에 더 큰 감동을 느낀다. 이쯤 되어야 팬들과 호흡하는 ‘진짜 프로 스포츠의 맛’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유로파리그에서 맨유를 꺾고 결승에 오른 빌바오의 전술은 스포츠의 매력이 무엇인지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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