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프로익 10년
라프로익에 관한 단상이 두 가지 있다. 우선 라프로익의 슬로건.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You either love it or hate it).’ 대단한 자신감이다. 모두에게 사랑받길 원하는 시대다. 라프로익은 그런 시대에 선을 분명하게 긋는다. 어떤 면에선 아무나 좋아할 수 없다는 호기도 느껴진다. 이런 말 앞에서 사람은 좋아하는 쪽에 서고 싶어진다. 어떤 선을 넘어설 역량이 있다는 뜻이니까. 브랜드의 호기에 반응하는 미묘한 끌림이 있다. 뭔지 몰라도 경험해보고 싶다는 욕망. 브랜드 성격을 드러내면서도 호기심이 차오른다. 슬로건 잘 지었다.
또 다른 단상은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다. 그는 유명한 위스키 애호가다. 위스키를 주제로 책도 펴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에서 그는 라프로익을 이렇게 설명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초기작에서 볼 수 있는 예리하고 절제된 문체와도 같다.’ 하루키, 헤밍웨이, 단문 그리고 라프로익. 단어들이 서로 연결되며 마셔보지 않아도 상상하게 했다. 거칠고 강렬하면서도 쉽게 잊히지 않는 무엇. 이쯤 되면 위스키를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도대체 어떤 맛이기에?
사실 10여 년 전 맛본 적이 있다.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모금. 셰리 위스키 한두 번 맛본, 막 위스키 세계에 발을 디딜까 말까 하던 때였다. 한 모금만 마신 이유가 있다. 한 모금이면 충분했으니까. 마시자마자 이게 뭐야, 하는 손사래질. 셰리 위스키의 상큼하고 달콤한 풍미에 매료된 상태에서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는 넘어설 수 없는 장벽처럼 다가왔다. 곧바로 라프로익이 왜 슬로건을 그렇게 지었는지 이해했다. 하루키의 평도 문학적 표현 정도로 흩어졌다. 내가 즐길 만한 술은 아니라는 판단과 함께. 그렇게 라프로익은 기억에서 잊혔다.
“모두에게 사랑받길 원하는 시대다.
라프로익은 그런 시대에 선을 분명하게 긋는다."
벽을 넘으면
다시 라프로익을 만났다. 그때도 지금도 라프로익 10년. 그 사이 여러 위스키를 맛봤다. 피티드 위스키의 맛도 조금 알게 됐다. 이 정도면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있다. 아니, 이제야 라프로익과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겠다 싶다. 첫인상이 별로였어도 시간이 지나 그때를 추억하며 웃을 사이가 있잖나. 라프로익 10년은 그럴 수 있을까. 녹색 병의 마개를 열고 한 잔 따랐다. 매번 새로운 위스키를 처음 잔에 따를 땐 설렌다. 어떤 복잡미묘한 세계를 펼쳐 보일지 기대하게 하니까. 라프로익 10년은 조금 달랐다. 그때와 지금, 흐른 시간만큼 나 자신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기대하게 했다.
잔을 코에 대자 흠칫, 소독약 냄새가 콧속을 찔렀다. 10여 년 전 첫인상이 다시 선명해졌다. 그때는 벽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젠 안다. 그 벽 너머에 드넓은 세계가 있음을. 그동안 쌓은 경험이 더 나아가게 했다. 첫 향이 유독 강렬할 뿐이다. 잠시 잔을 떼고 시간을 둔 후 다시 맡았다. 노도처럼 밀려드는 이질적인 향을 버티면 이내 대지의 흙 내음이 퍼진다. 그 전환이 짜릿했다.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게 한 비밀의 영역을 뚫고 들어간 쾌감이랄까. 소독약 냄새가 꽉 찬 좁은 곳에서 대지가 펼쳐지는 넓은 곳으로 공간이 확장했다. 단지 잔을 들어 향을 맡았을 뿐인데. 후각이 시각으로 전이해 공감각적 감흥이 펼쳐졌다. 10여 년 전에는 모르던 세계를 이제야 만났다. 역시 사람이든 위스키든 첫인상만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향을 음미하다 머금자 찌릿한 알코올이 혀를 관통했다. 마개를 연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만큼 알코올이 뾰족하다. 이 또한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위스키도 공기와 만나면 둥글어지고 섬세해진다. 다음 모금을 기대하며 혀의 감각을 섬세하게 깨웠다. 뾰족함은 금세 사라졌다. 대신 견과류의 고소함이 고개를 내밀었다. 흙 내음과 이어지는 고소함이다. 라프로익 10년은 고소함이 특징인가, 결론 내릴 때쯤 다른 맛이 퍼졌다. 달콤함이 혀를 간질였다. 오렌지 계열의 상큼한 달콤함이 아닌, 배처럼 은은한 달콤함. 낯섦을 이겨내고 기다린 보람이 있는 위로 같은 달콤함이었다. 날숨으로 배어나오는 피니시는 모닥불을 떠올리게 했다. 매캐한 연기가 한동안 입에 머물렀다. 그 사이사이 흙과 풀, 소독약 같은 피티드 위스키의 인장 같은 풍미가 들고났다. 수미상관으로 쓴 시처럼 시작과 끝이 강렬하다. 헤밍웨이의 단문이 몇 줄 떠올랐다.
매력적인 날숨
진정한 첫인상을 각인하고 다음 날 다시 마셨다. 첫 만남보다 두 번째 만남이 더 자연스럽다는 걸 우린 안다. 위스키 또한 마개를 연 날보다 다음 날 맛이 더 섬세해진다. 찌르던 알코올이 날아가면 그 속에 숨어 있던 세부 요소가 저마다 고개를 든다. 라프로익 10년 역시 두 번째 마시자 또 달랐다. 우선 소독약의 이질적인 향이 감소했다. 대신 달큼한 향이 더해졌다. 변화의 기미가 보이자 더 깊게 들이마셨다. 이내 흙, 지푸라기 같은 시골 정취가 코를 채웠다. 처음보다 확실하게 향에 대지의 요소가 담뿍 담겼다.
스코틀랜드 농부가 된 기분으로 한 모금 넘겼다. 혀를 쏘는 알코올은 이내 사라지고 달콤함이 보다 선명하게 혀를 감쌌다. 그리고 날숨과 함께 이어지는 피니시. 라프로익 10년은 확실히 마실 때보다 마시고 나서 이어지는 피니시의 개성이 강하다. 이 풍미가 어디서 왔는지 분명하게 전한다. 피트를 구성하는 흙과 마른 풀의 풍미가 선명하고, 피트를 태우면서 밴 매캐함이 길게 이어진다. 날숨으로 즐기는 피니시의 여운이 길다.
라프로익 10년은 딱히 안주가 필요 없게 느껴진다. 다른 맛과 섞이기보다 서로 부딪칠 개성이 강한 까닭이다. 그래도 맛이 궁금해 초콜릿부터 곁들였다. 은은한 달콤함을 초콜릿이 증폭하길 바라면서. 그 달콤함과 초콜릿의 달콤함은 결이 달랐다. 찐득한 달콤함은 대지의 거친 느낌을 위로하긴 해도 상승작용을 일으키진 못했다. 초콜릿보다 견과류가 더 잘 맞을 거라 예상했다. 풍미를 지배하는 큰 축이 대지라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하지만 견과류의 고소함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의외로 결이 다르다고 여긴 말린 과일이 어울렸다. 라프로익 10년에는 상큼함이 없기에 말린 과일의 새콤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풍미를 다층적으로 더했다. 라프로익 10년에 어울리는 안주는 말린 과일, 당첨.
라프로익 10년은 다채로움 면에서 좋은 점수를 못 받을지 모른다. 하지만 시종일관 낮은음자리로 선 굵은 느낌을 전한다. 다 마신 후에도 잔에 짙은 잔향이 남는 점이 특히 흥미롭다. 바짝 마른 건초 더미와 흙먼지, 꺼진 모닥불의 매캐함이 잔 속에 소용돌이친다. 확실히 화사하고 향긋함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거칠고 야생적이어서 더 끌린다. 왜 하루키가 라프로익 10년을 극찬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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