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작품을 결정할 때 대본도 크게 작용하지 않아요.
저는 항상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가장 중요해요.
감독님이 누구인지, 상대 배우가 누구인지.
지금까지 운 좋게 무척 좋은 사람들과만 일했죠.”
어제 드라마 <노무사 노무진> ‘쫑파티’를 했다고 들었어요. 한 작품 끝내고 회식할 때 기분은 어떤가요?
쫑파티 때까지는 끝났는지 잘 모르겠어요. 끝났나 싶다가도 늘 함께하던 사람들과 같이 있으니까요. 작품을 마무리하고 한 일주일 뒤에 이제 대본을 안 외워도 되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면 진짜 끝났다고 느끼죠. 이번 <노무사 노무진>은 조금 달랐어요. 이런저런 노무사 얘기를 다양하게 펼쳐 고생도 좀 하고 할 일이 많았죠.
노무사 관련 공부를 많이 했나 보네요?
노무사를 공부했다기보다 노무사분들을 직접 많이 뵀죠. 우리 드라마가 초반에 노무사라는 직업에 대해서 친절하게 설명해줘요. 어떤 직업이고, 어떤 일을 하는지. 노무사인 제가 귀신을 만나면서 원한을 풀어주는 내용인 휴먼 코미디죠.
보통 작품이 끝나도 그 안에서 오래 머무는 편인가요?
아니요. 많이 머무르진 않아요. 빨리 털어내려고 하는 편이죠. 다음 작품은 11월에 방송할 예정인데, 변호사 얘기예요. 지금까지 의사, 강사, 노무사, 변호사를 맡았으니 이제 사 자 들어가는 배역은 쉬어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웃음)
곧 다음 작품을 촬영하나요?
이제 시작이에요. 6월쯤 촬영 들어가니 두 달 정도 남았네요.
두 달이란 여유가 있네요. 그 사이 뭐 하고 싶어요?
두 달이지만 따지고 보면 시간이 별로 없어요. 촬영 전에 대본 외우고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그리고 <노무사 노무진>이 5월 방송 예정이니 홍보 기간도 있죠. 짧게 일본 여행이나 갈까 해요.
신기하게 전문직을 계속 맡아왔어요. 일부러 직업을 고르진 않았을 테고, 대본을 보고 결정할 텐데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요?
사실 작품을 결정할 때 대본도 크게 작용하지 않아요. 저는 항상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가장 중요해요. 감독님이 누구인지, 상대 배우가 누구인지. 지금까지 운 좋게 무척 좋은 사람들과만 일했죠. 이정효 감독님, 신원호 감독님, 유제원 감독님, 임순례 감독님, 김성윤 감독님과 같이 일했으니, 대본이야 뭐 내가 잘만 외우면 되겠지 했죠.
사람만 봤는데도 다 좋은 결과를 냈네요. 아니, 그래서 더 결과가 좋을 수도 있겠네요.
군대 제대하고 10여 년 계속 그렇게 결정했어요. 대본 잘 안 보고 그냥 누구랑 하느냐가 더 중요했죠. 좋은 분들이 하자고 하면 저도 참여하겠다고 했어요. 굳이 대본을 보면서 이럴까 저럴까 하는 고민은 감사하게도 안 했죠. <노무사 노무진>도 마찬가지고요.
작품이든 작품 외적이든 사람과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나 보네요.
네, 제일 먼저 사람과 관계를 생각해요. 이번에도 결과가 좋아야 하는데 어떡하지.(웃음)
노무사라는 직업을 알긴 해도 낯설잖아요. 배역에 접근할 때 따로 신경 쓴 게 있나요?
노무사가 직업이지만 귀신을 만나고 원한을 풀어주는 이야기예요. 사망한 이유가 산업 재해인데, 그 부분을 작가님들이 잘 풀었어요. 그래서 가슴 아픈 일도 나오고, 가슴 아픈 일을 해결하는 이야기이기도 해서 좋아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노무사라는 직업을 특별히 준비하진 않았어요. 다만 함께하는 배우들과 자주 보고, 리딩 연습도 많이 하려고 했죠.
이번 드라마에서도 정경호 하면 떠오르는 예민하면서도 속으로 자상하고, 그러면서 약간 짠하기도 한 모습이 나오나요?
아직까진 제가 잘하는 것을 하고 있어요. 다음 작품인 <프로보노>의 강다윗도 아마 제가 잘하는 걸 할 거예요. 잘하는 걸 할 수 있는 게 다행이면서도, 이제 변화를 줘야 할 나이가 됐다고 생각해요.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면 쉴 때 많이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죠. 작품을 바로바로 이어가는 것도 감사하지만, 시간을 두고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잘하는 거 아닌 다른 모습이라면 어떤 모습일까요?
저만 생각하는 기준일 수도 있는데, 작품을 보면 그냥 다 저 같거든요. 저 같지 않은 역할을 만나거나 다른 모습을 보여줄 감독님을 만나보고 싶어요. 그러려면 많이 보고 듣고 읽는 공부가 필요하죠.
아까 사진가와도 정경호다운 걸 정경호답게 잘 연기한다고 얘기했어요. 그 말과도 통하는 내용이네요. 칭찬인데, 배우 입장에선 또 고민하는 지점이군요.
사실 그게 제일 좋죠. 큰 칭찬 중에 하나예요. 그런 연기는 뭘 해도 그냥 보고 넘어가고 웃게 되죠. 그렇긴 하지만 한 번은 변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너무 예민한 역할만 많이 해서 이젠 살도 좀 찌우고 변하고 싶죠.
그러려면 사람보다 대본에 집중해야겠는데요?
그래도 사람은 보긴 할 거예요.(웃음) 어떤 대본이냐가 중요하겠죠.
자기 색이 도드라진 감독, 특히 영화감독이 배우의 다른 모습을 끌어내기도 하잖아요. 어떤 감독님과 작업하면 다른 모습이 나타날까요?
꼭 새로운 분이 아니더라도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동안 작업한 이정효 감독님이나 신원호 감독님, 유제원 감독님 모두 저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그분들과 영광스럽게 다시 해도 다른 모습을 정확하게 알려주실 것 같아요.
배우는 작품마다 얻어 가는 게 있다고 생각해요. 이번 작품을 통해 무엇을 얻었나요?
일단 6개월 동안 옆에 있는 사람이 그만 보라고 할 정도로 대본을 열심히 본 기억이 남아요. 원래 대본을 열심히 보지만, 이번에는 정말 열심히 봤어요. 대사가 많기도 했지만 계속 들고 다니면서 외웠죠. 남는 건 기억이고, 얻은 건 차학연, 설인아라는 배우이자 친한 동생이죠. 결국 또 사람이네요. 두 사람은 너무나 훌륭한 동생들이에요. 6개월 동안 둘 덕분에 현장에서 웃고 떠들며 재밌게 지냈죠.
이번 작품은 왜 특별히 대본을 놓지 않고 계속 봤나요?
너무 어려웠어요. 집중을 놓아버리면 안 될 거 같았죠. 정신 차리지 않으면 날 잡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동안 누군가에게 많이 기댔어요. 감독님이나 상대 배우에게 기댈 때도 있었죠. 이번 작품은 기댈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6개월 동안 대본을 한 번도 놓지 않았죠.
촬영장에서 선배 배우 입장이 돼서 그런 기분이 들었겠네요.
30분 일찍 현장에 가고, 카메라 앞에 계속 서 있으면서 대본 외우고 그런 거죠. 학연이가 형 그만 서 있어요, 할 정도였으니까요. <노무사 노무진>만큼은 정말 1분 1초도 집중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많이 힘들었나 봐요.
그러고 보니 기댈 수 있는 선배, 친구들이 함께한 작품들이 많았네요.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선 ‘구구즈’가 있었고, <일타 스캔들>에선 전도연 선배님이 계셨죠.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또래 배우들과 가족같이 찍었거든요. 오랜만에 혼자 해야 하니 더 집중했죠.
선배 역할을 해보니 그동안 함께한 선배가 더 기억났나요?
제가 선배라고 해서 이번 작품에서 특별히 뭘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제가 중심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졌죠. 기억나는 선배님이야 <일타 스캔들>에서 전도연 선배님과 함께했으니 인상 깊을 수밖에 없죠. 전도연 선배님과 멜로드라마를 찍으니 하루하루가 꿈같았죠. 정말 존경하던 사람과 같이 연기할 수 있어서 신기하고 행복했어요. 전도연 선배님과 투샷을 찍고 TV에 나오니 가문의 영광이죠.(웃음)
당시 전도연 배우와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출연을 결정했겠네요.
유제원 감독님과 전도연 선배님이 한다니, 대본 안 봤습니다. 나중에 대본 보고 슬슬 후회하긴 했죠. 대사가 이렇게 많고, 강의도 해야 하고, 심지어 수학을 외워야 하네.(웃음)
이제 배우로서 경력이 길어요. 그 시간을 보내면서 익숙해진 것과 여전히 낯선 것은 무엇인가요?
연기자로 카메라 앞에 서는 건 다행히 익숙해졌어요. 이제 떨리지 않아요. 예전에도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좋긴 했지만, 긴장도 좀 하고 떨렸거든요. 이젠 카메라 앞에 서면 어떻게 찍을 거야? 이렇게 됐으니 현장이 더 편해지고 좋아져서 놀이터처럼 다니는 익숙함이 있어요. 반면 여전히 낯가리는 건 예능이에요. 전 정말 예능을 못 해요. 낯선 사람들과 낯선 카메라들 앞에서 제가 준비하지 않은 상태로 계속 얘기해야 하는 건 정말 못 하죠.
예능 <슬기로운 산촌생활>도 했잖아요.
다 아는 사람이잖아요. 친한 사람들과 같이 찍는 거니 상관없죠. 제가 낯을 가리는 편이에요. 작품 할 때도 촬영하기 전에 대본 외우고 연습하면서 익숙해지는 시간을 보내잖아요. 리얼 예능, 이런 건 못 할 거 같아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얘기를 더 해볼까요? 그동안 쌓은 이미지 외에 어떤 이미지를 더하고 싶나요?
희망 사항인데, 그냥 살 좀 찌고 싶어요. <일타 스캔들>도 거의 섭식장애가 있는 사람이었고, 그전에 출연한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에서는 에이즈 환자였죠.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김준완도 성격이 까칠했잖아요. 주로 예민한 사람으로 나와서 이제 살찌우고 건강한 이미지로 보이고 싶어요.
살 빼야 하는 고민은 많이 들어봤는데, 살찌우는 것도 고민일 수 있겠네요.
전 살이 빠져도 건강하게 빠지지 않아요. 아파 보이죠. 밤샘 촬영하면 막 살 빠지는 소리가 들려요.(웃음) 그래서 건강하게 찌고 싶어요. 운동하면서 찌워야 하는데, 결국 열심히 안 해서 그렇죠. 다 제 핑계예요.
오랫동안 하나의 일을 해오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잖아요. 내 인생에 이 일 말고 다른 일은 없을까 하는.
아버지가 드라마 감독님이시고, 어릴 때부터 계속 이것만 봐왔어요. 지금 인생의 반을 연기하며 보냈잖아요. 후회해본 적은 단 한순간도 없어요. 감사하게 이거 아니면 뭘 하지? 하는 생각도 아직 안 해봤죠.
연기 외에 삶의 또 다른 기둥으로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요?
너무 빤한 얘기인데, 저는 연기 이외에 삶의 중심은 최수영이에요.
오, 연기와 연인!
사실 연기도 그분 때문에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해요.(웃음) 그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좋은 사람, 좋은 배우임을 알려주고 싶어서라는 이유도 있죠. 연기 외에 절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도 최수영의 행복이죠. 오래 만났고 가장 자주 보니까요. 그녀의 참을성 덕분에 오래 만날 수 있었죠. 제가 늘 실수하거든요. 이제는 그러지 않지만, 술 많이 마시고 취한다든가.(웃음)
오랫동안 함께해온 삶의 동반자란 존재는 중요하죠.
예전부터 좋은 배우라는 같은 꿈을 꾸어왔기에 더 그럴 수 있죠.
먼 훗날 사람들이 배우 정경호를 떠올릴 때 어떤 배우로 기억하길 바라나요?
좋은 사람, 좋은 배우로 남고 싶어요. 연기 잘한다, 못한다도 중요하겠지만, 그냥 저 사람은 좋은 배우라고 기억하면 좋겠어요. 좋은 배우라는 개념은 아버지한테 많이 배웠어요. 좋은 말을 할 수 있어야 좋은 행동을 하고, 좋은 사람이 돼야 좋은 연기를 하고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다고 어릴 때부터 들었죠. 좋은 척하며 살아온 시간이 길어지면 아예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죠. 그렇게 좋은 사람이자 좋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멋있다는 소리 많이 듣는 배우으로서 멋진 남자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너무 뜬금없지 않은 꿈을 확실하게 꾸는 남자. 되지도 않는 걸 꿈꾸는 게 아닌, 이룰 수 있는 걸 정확하게 알고 꿈꾸며 나아가는 사람이 멋있다고 생각해요.
좋은 배우라는 꿈을 꾸고 나아가는 것처럼 말이죠?
제가 멋있다는 건 아니지만, 그 꿈은 꾸준히 하면 이룰 수 있을 것 같아요.(웃음)
“좋은 척하며 살아온 시간이 길어지면 아예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죠.
그렇게 좋은 사람이자 좋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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