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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를 보내며

삶과 시대를 노래했던 음악인. 스스로를 ‘앞것’이 아닌 ‘뒷것’으로 여기며 무대 뒤를 지켰던 연출가. 거리에서, 극장에서, 시대의 초입과 끝자락에서 불을 밝혔던 청년. 김민기를 떠나보내며 그가 지나온 길을 되돌아봤다.

UpdatedOn August 25, 2024

1 한경록

크라잉넛 베이시스트


올해 초 크라잉넛은 학전에서 ‘학전 AGAIN 프로젝트’로 공연을 펼쳤죠. ‘학전에서 마지막으로 공연한 밴드’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당시 멤버들과 어떤 심정으로 무대에 올랐는지 궁금합니다.
대학로 ‘학전’이라는 소극장은 청춘이라는 시대정신이 담긴 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공간에는 자유를 향한 외침과 뭉클한 울림이 서려 있습니다. 그 청년들이 머무른 공간에서 크라잉넛의 음악이 마지막으로 함께 공명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고, 경건한 마음으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2008년에 ‘학전’에서 김광석 추모 콘서트에 참여했습니다. 그때 김민기 선배님을 뵀었는데, 당시를 추억하며 김민기 선배님의 ‘천리길’과 김광석 선배님의 ‘일어나’를 불렀습니다.

제가 느낀 크라잉넛 음악의 특징 중 하나는 ‘누구나 따라 부르기 쉽다’는 점입니다. 경록 님은 작사가와 칼럼니스트로도 활동 중이죠. 평소 가사를 쓸 때 어떤 점을 고려하는지 궁금합니다.
동네 과일가게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과일 같은 음표들과 아이들도 따라 부를 수 있는 아이스크림같이 쉬운 가사로 노래를 만들어요.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고, 그냥 그게 크라잉넛입니다.) 어떤 과일이나 불량식품 같은 것을 먹으면 옛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잖아요. 그런 낭만과 유쾌함이 잔잔한 미소와 위로를 건넨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살아가는 일상을 노래합니다. 음악이라는 투명한 물감으로 인상 깊었던 추억을 그립니다.

1971년 발매된 앨범 <김민기>는 ‘대한민국 최초의 전 곡 자작곡 앨범’이라는 점으로도 의미가 깊습니다. 개인적으로 김민기의 곡 중 가장 좋아하는 가사는 어떤 곡인지 궁금합니다.
김민기 선배님의 음악은 문학과 음악 사이의 산책길이라고 생각합니다. 20대 초반, 공연이 끝난 후 밤새 술 마시고 음악 듣다가 김민기 선배님의 ‘새벽길’이 나오면 기분이 정말 묘해졌습니다. ‘밤새 하늘에선 별들이 잔치 벌였나 / 어느 초라한 길목엔 버려진 달빛 고였나.’ 집으로 돌아가는 새벽길, 옷깃에 묻은 꽃잎 같은 음악을 되새기면서 비틀거리며 걸었던 생각이 납니다. ‘기지촌’도 좋아합니다. 주홍색 노을을 안주 삼아 싸구려 위스키를 마시며 흥얼거리는 인상파 그림 같습니다. 김민기 선배님의 음악에는 아침의 연둣빛 푸르름도, 황혼의 쓸쓸함도 다양하게 공존합니다. 그래서 좋습니다.

크라잉넛은 2021년 ‘아침이슬 50주년 김민기 트리뷰트’ 콘서트에서 ‘그 사이’를 선보였어요. 만일 크라잉넛 콘서트에서 새롭게 김민기의 곡 중 한 곡을 커버한다면 어떤 곡을 고르겠습니까?
‘그 사이’ ‘천리길’ 두 곡을 크라잉넛 식으로 불렀는데, 모두 진심을 다해 편곡했습니다. 아직 우리 콘서트에서 불러본 적이 없는데, 언제 기회 되면 다시 부르고 싶습니다.

“치열하게 부딪치고 방황하고 행동하고 노래하셨습니다.
자유를 위해. 순수하고 연약한 눈꽃송이들을 곱게 뭉쳐서 세상에 던졌습니다.
그리고 얘기하는 것 같았습니다.‘우리는 살아 있다’라고.”

김민기의 대표곡 ‘아침이슬’은 대중음악사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에도 중요한 곡으로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습니다. 크라잉넛 역시 시간이 지나도 오래도록 듣고 부르는 노래들이 있죠. 오래도록 살아남는 곡에 공통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가사가 꼭 직설적이지 않더라도 좋은 곡은 그 사람, 그 시대가 묻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노래와 함께 걸어온 궤적에 사람들이 위로받고 공감하며 같이 걷는다면, 그 음악은 하나의 생명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발자국마다 음악이 피어나는 게 아닐까요? 고단한 삶의 나침반 같은 음악 발자국.

김민기는 살아생전 “나는 뒷것이야, 너희는 앞것이고”라는 말을 하셨죠. 김민기에게 들었던 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있습니까?
학전 대기실에서 정수기 통에 정종 대병을 거꾸로 꽂아놓고, “빨간색은 뜨거운 정종, 파란색은 차가운 정종이 나옵니다. 마음껏 드세요. 혹시나 여러분 불편해하실까 봐 제가 미리 마셨습니다. 편하게 드세요”라고 저희에게 해주신 따뜻한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게 제가 기억하는 선배님의 마지막 목소리였습니다.

한 작곡가는 ‘K-팝이 글로벌하게 잘되고 있는 것도, 우리 DNA가 형(김민기) 음악에 영향을 받은 덕분이라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후배 뮤지션으로서 가수 김민기가 한국 뮤지션에게 미친 영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치열하게 부딪치고 방황하고 행동하고 노래하셨습니다. 자유를 위해. 순수하고 연약한 눈꽃송이들을 곱게 뭉쳐서 세상에 던졌습니다. 그리고 얘기하는 것 같았습니다.‘우리는 살아 있다’라고.

막연한 질문이지만 좋은 음악은 어떤 음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역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닐까요?

좋은 음악은 어떻게 만들어진다고 생각하십니까?
살면서 우연히 스친 강렬하고도 소소한 여러 감정을 커피 추출하듯 고운 여과지에 걸러 내리는 것. ‘누군가 따뜻한 위안을 얻고 미소 지을 수 있겠지’ 하고 만드는 음악.

경록 님께서 바라본 김민기는 어떤 음악가입니까?
꾸밈없는 낭만 청년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로 ‘학전’이라는 소극장은 청춘이라는 시대정신이 담긴 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공간에는 자유를 향한 외침과 뭉클한 울림이 서려 있습니다.
그 청년들이 머무른 공간에서 크라잉넛의 음악이 마지막으로 함께 공명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고,
경건한 마음으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2 서정민갑

대중음악의견가·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김민기의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노래 3곡만 꼽는다면 어떤 곡이 있을까요?
‘아침이슬’. 젊은 포크 싱어송라이터 김민기가 오늘의 김민기가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곡이자, 한국 포크 음악의 상징 같은 곡. ‘임을 위한 행진곡’과 함께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대표하는 명곡입니다. 노래의 극적인 드라마가 역사와 만났을 때 얼마나 큰 힘을 갖는지 보여준 곡입니다.
‘이 세상 어딘가에’. 김민기가 1979년 만든 노래극 <공장의 불빛> 카세트테이프에 담겨 있는 노래 중 하나입니다. 김민기는 이 음반을 통해 비로소 정권과 음악 향유자들이 부여한 저항 음악인이 아니라, 능동적인 저항 음악인으로 변화했음을 알렸습니다. 이 음반은 ‘한국 최초의 노동가요/민중가요 음반’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동시에 향후 김민기가 노래극 작업에 몰두할 것임을 알린 예고편이었죠. 이 음반은 카세트테이프라는 방식으로 담아냄으로써 획기적인 보급과 유통 방식을 찾아냈다는 데도 가치가 있습니다. 의미와 아름다움이 굳게 손잡은 곡. ‘봉우리’. 김민기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만든 네 장짜리 음반의 수록곡입니다. 김민기는 여느 음악인처럼 자신의 음반을 만들고 활동하는 데 전념하지 않았어요. 이 노래를 수록한 네 장의 음반 역시 학전 운영비를 충당하기 위해 만든 음반일 뿐이지만, 당대 최고의 음악인들이 함께하면서 김민기의 거의 모든 자작곡을 음악답게 담아내 오늘까지 들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봉우리’는 1990년대 김민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곡이자, 김민기가 얼마나 웅숭 깊은 시선을 지닌 예술가인지 드러낸 명곡입니다. 1970년대 싱어송라이터가 현재에도 얼마든지 크나큰 울림을 줄 수 있는지 보여주는 곡이죠.

위원님께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김민기 노래는 무엇인지도 궁금합니다.
‘봉우리’를 가장 좋아합니다. ‘허나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라는 노랫말을 들을 때마다 탄식이 나오고 이따금 눈물이 납니다. 꿈을 이루고 싶어 안달하는 저에게 이 노래만큼 삶에 대한 통찰을 전해준 곡이 없습니다. 노래를 들을 때마다 삶의 속도를 늦추고 욕심을 내려놓게 됩니다. 양희은의 버전도 있고, 전인권의 버전도 있지만 역시 김민기가 부른 버전이 가장 울림이 큽니다. 삶의 무게로 버거워하는 모든 이들이 이 노래를 듣고 힘을 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지난 2013년 김민기는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을 수상했습니다. 위원님께서는 당시 선정위원으로서 김민기를 소개하며 ‘그가 만들어낸 것은 몇 장의 음악이었지만, 그로 인해 싹튼 것은 음악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정신이고 실천이었다’라고 하셨어요. 김민기가 싹틔운 ‘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민기는 자신이 살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않았고, 가난하고 아프고 힘겨운 사람들을 모른 체하면서 노래하지 않았습니다. 김민기는 노래가 현실을 바꾸는 무기가 되기를 원하지는 않았지만, 현실 앞에서 정직하려 했고, 불의를 회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노래에는 정직한 고통이 있습니다.
음악인들은 김민기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노래로 장난치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고, 이 노래를 잇겠다고 결심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음악인들의 사표가 된 정신이 김민기 한 사람에게서만 나온 것은 아니지만, 김민기의 노래가 없었다면 한국대중음악사에서 소금이 되고, 거울이 된 형형한 정신은 한동안 부재하거나 뒤늦게 태어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김민기가 떠나면서 그의 한결같은 삶이 알려진 오늘, 노래처럼 살다 간 김민기의 삶은 김민기의 정신에 더욱 무게를 싣습니다. 조동진과 김민기처럼 우리에게 기억하고 따를 정신을 남겨준 음악인이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지요.

같은 글에서 ‘이제는 오늘의 김민기들이 출몰하고 날뛰어야 한다’라고 쓰셨습니다. ‘오늘의 김민기’라고 할 수 있는 젊은 뮤지션은 누가 있을까요?
지금 수많은 음악인들이 김민기를 알고 있고, 김민기의 유산을 조금씩 나눠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그중에서도 오늘의 민중가수를 자처하는 ‘이랑’, 쫓겨난 사람들의 삶을 노래하는 ‘김동산’, 맑고 깊은 노래를 들려주는 ‘황푸하’를 뽑고 싶습니다. 이랑의 <늑대가 나타났다> 음반 속 ‘환란의 세대’를 비롯한 곡들은 2020년대에 가장 정직하고 아프고 치열하며, ‘수원 지동 29길’을 비롯한 김동산의 노래들은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처럼 낮은 삶으로 가장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황푸하의 노래는 고난 속에서 맑은 영혼을 지켜나간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김민기를 아는 이들이 이랑, 김동산, 황푸하를 많이 알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김민기의 정신은 계속 이어지고, 김민기의 정신은 오늘의 목소리로 피어나고 있습니다. 이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주었으면 합니다. 김민기만 신화화하고 박제하는 모습은 김민기 역시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포크는 다른 장르에 비해 유독 저항가요의 성격이 짙어 보입니다. 미국의 밥 딜런이, 한국의 김민기, 한대수가 그랬죠. 포크가 사회적 메시지를 잘 담아내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모던 포크 음악은 민요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공동체적입니다. 당연히 공동체의 삶과 지향점을 노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모던 포크 음악을 정립한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우디 거스리와 피트 시거가 음악을 통해 싸우고 연대하는 전통을 만들어냈습니다. 또 다수의 포크 음악인이 흑인민권운동과 반전운동에 결합하면서 노래의 힘을 보여준 역사, 노래가 세상을 바꾼 것처럼 보이는 역사를 만들어내면서 포크 음악의 성격과 역할을 신화처럼 확정해버렸습니다. 게다가 포크 음악은 함께 부르는 방식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장르이며, 가장 자연스러운 소리를 내면서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장르입니다. 록처럼 악기 소리가 압도하는 장르가 아니고, 재즈처럼 꾸준히 들어야 겨우 이해할 수 있는 장르도 아닙니다. 맑고 자연스러우며 쉽고 진지하고 공동체적인 포크 음악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 건 당연한 선택이라고 봅니다.

김민기가 한국 대중음악사에 남긴 업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민기가 한국대중음악사에 남긴 업적은 오래 듣고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만들었다는 사실이고, 자신이 그 노래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미 있는 생각을 품은 사람은 많지만 그 생각을 김민기만큼 감동적인 노래로 표현한 음악인은 드물고, 좋은 노래를 만든 사람은 많지만 그만큼 삶과 노래를 일치시킨 사람 역시 드뭅니다. 김민기는 계속 듣고 부를 노래를 남겼을 뿐 아니라, 그 노래를 듣고 부르기 전에 고민할 필요가 없도록 살다 갔습니다. 이런저런 사건과 추문으로 자신의 작품을 욕되게 한 예술가가 많은데요. 그럼에도 예술가가 훌륭한 작품의 생산자일 뿐 아니라 위대한 정신일 수 있음을 증명했다는 사실이 김민기의 독보적인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위원님께서 생각하는 김민기는 어떤 음악가입니까?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에 필요한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 목소리는 기쁨의 목소리이기도 하고, 슬픔의 목소리이기도 하며, 분노의 목소리이기도 합니다. 김민기는 한국 현대사에서 누군가는 담당했어야 할 현실의 기록자이자, 저항을 결심한 순결한 영혼의 목소리, 바로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목소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로 인해 하나의 길이 생겼고, 누군가는 그 길을 따라 걷게 되었습니다. 그 길을 따라 걷지 않더라도 누구도 그 길을 외면하지 못하도록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낸 음악가입니다.

“김민기는 한국 현대사에서 누군가는 담당했어야 할 현실의 기록자이자,
저항을 결심한 순결한 영혼의 목소리, 바로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목소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로 인해 하나의 길이 생겼고, 누군가는 그 길을 따라 걷게 되었습니다.”


3 최승연

뮤지컬 평론가


평론가님께서 학전에서 작품을 관람하셨다면, 당시 어떤 작품을 보셨는지, 왜 그 작품을 보게 되었는지 에피소드가 궁금합니다.
학전에서 공연을 많이 봤어요. <지하철 1호선>을 포함하여 <의형제> 초연, <고추장 떡볶이> 등 어린이 뮤지컬도 봤습니다. <지하철 1호선>은 뮤지컬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놓쳐선 안 되는 클래식입니다. 독일 그립스 극장 폴커 루트비히의 동명 작품이 원작인데, 이를 김민기 선생님이 한국의 1990년대로 배경으로 번안하셨어요. 한국의 지하철 1호선에 탑승한 사람들의 풍경이 마치 만화경처럼 펼쳐져 독일 원작의 느낌이 거의 나지 않는 공연이었죠. <지하철 1호선> 초연이 1994년인데요. 당시 뮤지컬은 한국에서 소문으로만 존재하는 미지의 무대와 같았어요. 독일 작품을 한국 작품으로 완벽하게 바꿔 당시 세태를 풍자했던 <지하철 1호선>은 매우 돌출적이고 한편으로는 흥미로운 걸작이었습니다. 무조건 봐야 했죠.

그간 학전에서는 아동극을 포함해 많은 작품들을 선보였습니다. 그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무엇입니까?
저는 위의 이유로 <지하철 1호선>을 좋아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학전블루에서 공연한 <의형제>를 가장 좋아해요. 아직 제 기억 속에 2000년에 공연한 초연이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 작품은 영국 극작가 윌리 러셀의 <블러드 브라더스>를 번안한 것입니다. 한 집안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가 가난 때문에 헤어져 자라다가 성인이 되어 운명적으로 만나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작품입니다. 한 사람은 원래 가난한 집에서 자라고, 다른 한 사람은 부자 부모 아래에서 자라 완전히 다른 계급에서 교육적, 문화적 차이를 보이며 성장하죠. 그러다 마치 예언이 실현되듯 두 사람은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다시 만나 형제임을 알게 되는 과정에서 작품은 사회가 만들어놓은 계급이 무엇인지 진중한 질문을 던집니다. 저는 영국에서 직접 <블러드 브라더스>를 봤지만, 학전의 번안작도 매우 훌륭해서 어색한 느낌이 없었어요. 한국전쟁의 여파가 남아 있는 1950년대 이후를 배경으로 삼고 한국 현대사를 두 사람의 성장 과정에 겹쳐놓아 그들의 이야기가 매우 생생하게 와닿게 구성했어요. 무남과 현민을 연기한 권형준, 김학준 배우의 연기가 참 맛깔스러운 공연이었습니다.

연출가 김민기의 대표작으로는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 가장 먼저 생각납니다. <지하철 1호선>이 지닌 의미와 특별함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위에서 설명한 그대로입니다. <지하철 1호선>은 1990년대 중반에 한국적 뮤지컬의 전형을 보여준 작품이었습니다. 당시 세계화 물결이 거세게 불어왔지만 한국 공연계에는 뮤지컬을 만들 수 있는 노하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특히 뮤지컬은 문제의식이 희박한 ‘쇼’에 불과하다는 관점 때문에 폄하되거나 저열한 장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작된 <지하철 1호선>은 뮤지컬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넘어섬과 동시에 ‘한국적 뮤지컬’에 대한 개념에 값하는 것이었습니다. 김민기 선생님이 끝까지 ‘199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전혀 수정하지 않으신 것도 당시에 유의미한 오리지널리티의 가치를 보존하고 싶으셨기 때문일 겁니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사실 젠더나 인종 이슈에 걸리는 요소가 많거든요.

<지하철 1호선>은 1994년 국내 초연 이후 2023년 12월 31일까지 총 4257회 공연됐습니다. 대학로에서 한 작품이 4000회 넘게 공연되는 것은 얼마나 특별한 일인지 궁금합니다.
상업성 강한 작품이 오픈런으로 공연하는 경우 외에 대학로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무대에 오른 작품은 거의 없습니다. 2005년에 초연되어 현재까지 공연되는 뮤지컬 <빨래> 정도가 예외적으로 장기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이렇게 오랜 세월 공연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프로덕션의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작품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는 동력을 공연에 끊임없이 만들어줘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지하철 1호선>처럼 비상업적인 지향성을 품은 작품이 오랫동안 지속된 것은 특별하고 예외적인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김윤석, 황정민, 설경구, 조승우, 장현성 등 학전 출신 유명 배우들이 많죠. 한 극단에서 이토록 많은 배우들이 배출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학전 공연을 통해 배우로서 많은 것들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학전은 일종의 배우 산실 같은 곳이죠. 제가 가르쳤던 제자가 <지하철 1호선> 마지막 시즌에 참여했었는데요. 오랜 세월 쌓인 프로덕션의 노하우가 있었음에도 투병 중이셨던 김민기 선생님이 연습실에 자주 나오셔서 새로 합류한 배우들과 연습을 함께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 친구는 선생님의 그런 모습 자체만으로도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이야기를 전해줬습니다. 학전은 배우가 공연에 유연하게 적응하는 법, 그리고 공연을 지속시키는 ‘진정성’을 배울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막연한 질문이지만, 좋은 연출가는 어떤 연출가라고 생각하십니까?
좋은 연출가란 ‘소통’에 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편의 공연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 공연의 예술적 비전에 동의하는 순간 운명 공동체처럼 단단해집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언제나 훌륭하죠. 하지만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예술적 지점을 찾는 것은 연출가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이며, 또 반드시 도달해야 할 목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뮤지컬에 대한 평론가님의 개인적인 생각과 기준도 궁금합니다.
하려는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표현 방식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뮤지컬이 좋은 뮤지컬 아닐까요? 프로덕션이 감당할 수 있는 수위에서 이야기와 표현이 상호작용할 때 저는 그 공연을 사랑하게 돼요. 이는 공연의 규모와 무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학전은 경영난을 이유로 폐관하게 됐습니다. 극단을 운영하는 방식, 뮤지컬을 대하고 소비하는 방식에서 국내와 외국(미국, 유럽)의 차이가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일단 현재 극단 중심으로 운영되는 뮤지컬 프로덕션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뮤지컬은 제작사 중심의 운영체계를 갖추고 있어요. 이는 국내외 모두 동일합니다. 창작진에게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공연까지 구체화할 수 있는 프로듀서가 없다면, 그리고 이를 제작할 제작사가 없다면 아이디어는 그냥 사장되고 맙니다. 다만 국내와 영미권에 차이가 있다면 국내는 배우가 ‘스타’ 개념으로 통용되고, 영미권은 공연을 하는 노동자라는 개념으로 인식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영미권에도 스타 배우가 당연히 있습니다. 지금 브로드웨이 뮤지컬 <The Great Gatsby>에 출연하는 제레미 조던, 에바 노블자는 캐스팅 영순위 배우들입니다. 하지만 보통은 배우 자신들조차 노동자라는 인식을 갖고 있으며, 이것이 영미권과 한국 뮤지컬 시장을 구별 짓는 핵심적인 요인 중 하나라고 판단됩니다.

평론가님께서 바라본 김민기는 어떤 예술가입니까?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하고, 아무도 걷지 않은 일을 걸어가신 분이죠. 특히 선생님이 일관되게 유지하셨던 극단 운영 방식을 생각하면 숙연한 마음마저 듭니다. 공연에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 10원 단위까지 공정하게, 모든 재정을 투명하게 공개하신 선생님의 마인드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선생님과 동시대에 존재할 수 있어서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공연에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 10원 단위까지 공정하게,
모든 재정을 투명하게 공개하신 선생님의 마인드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선생님과 동시대에 존재할 수 있어서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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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주현욱
Illustration 최재훈

2024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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