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의상을 통해 양면성을 표현하는 콘셉트로 촬영했어요. 낯선 컷과 편한 컷이 있었나요?
요즘에 연극 연습을 하면서 인간 유승호의 생각에 많은 변화가 생겼어요. 뭔가를 굳이 낯선 것, 편한 것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기로 했어요. 그동안 안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나누고 살았더라고요. 이젠 굳이 나눈다기보다 뭐든지 그냥 받아들이려고 해요. 처음에는 다 낯선 거 같아요. 오늘 촬영도 마찬가지고, 내일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연극도 마찬가지고요. 모든 게 낯설고 처음에는 긴장하지만, 점점 받아들이며 편해지는 과정인 거 같아요. 오늘도 그 루트를 그대로 따랐다고 봐요. 그래서 재밌었어요.
가죽 옷을 입었을 때 과해서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고 말한 걸 들었어요. 한창 다양한 옷을 좋아할 시기 아닌가요?
패션에 관심 많은 배우들도 있죠. 하지만 난 어떤 이유인지 예전부터 옷에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현장에 나와서 남들보다 화려한 옷을 많이 입어본 경험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평소에는 편한 옷이 1순위예요. 중요한 자리에는 또 차려입으니까 개인 일정이나 어디 다닐 땐 움직이기 편한 옷을 선호하죠. 직업도 그렇고 보이는 부분이 중요하다 보니까 배우로서 공부해보려고 한 적도 있어요. 해보니 그런 차원에서 가능한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일단 개인적으로 흥미가 생겨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보니까 잘 안 하게 되더라고요.
낯선 것을 겪으며 익숙해지는 경험이 재밌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상당히 낯선 도전을 하네요. 연극무대는 하나의 작품을 고르는 것 이상의 특별한 이유가 있을 듯해요.
왜 지금일까. 사실 그 부분은 아직까지도 명확한 이유를 모르겠어요. 정말 느낀 대로 얘기하자면, 뭔가에 홀린 것처럼 그냥 하겠다고 했어요. 연습하거나 시간이 지나면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명확한 이유는 모르겠어요. 공연을 하더라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어요. 혹여 무대 위에서 그걸 알게 된다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한번 생각해보자면 비슷한 일상을 보내면서 다른 면으로 변화가 필요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죠. 아직까지 찾고 있어요. 왜 했을까, 내가.
연극은 다른 매체의 작품을 할 때와 연습 방식이 다르잖아요? 매번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 모여서 연습하면 직장인이 된 느낌일 텐데 어떤가요?
영화나 드라마는 대략적인 프로세스를 알아서 예측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연극은 처음 연습실에 갔을 때부터 아예 예측조차 할 수 없었어요. 대체 뭘 해야 하지? 무인도에 혼자 덜렁 내버려진 것처럼 뭘 해야 할지 몰랐죠. 그래서 연극 베테랑들이 모여서 같이 작품을 만들어나가니 일단 그들의 말을 무조건 따르기로 했어요. 그러면서 나만의 방식을 찾고,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건 가져가자고 생각했죠.
일단 탐색을 택했네요.
연습하면서 공부를 많이 한 점이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이 연극의 시대 배경이 1980년대 미국이고, 그 안에서 소수자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가요. 우리가 그 시대를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없어서 당시 미국 역사, 특히 소수자에 관해 공부했죠. 조연출님이 자료를 많이 만들어줬어요. 그걸로 같이 얘기하고 관련 작품들도 많이 참고해서 캐릭터를 만들어나갔죠. 연습한 지 지금 7주 차 정도인데 아직도 계속 얘기하고 공부하고 있어요. 그런 경험이 재밌고 특별했죠.
연극이란 형식 자체도 도전인데, 맡은 배역도 성소수자 역할이어서 도전적이에요.
공부하고 연습하다 보니 인종이나 종교, 동성애 같은 설정보다 결국에는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더라고요. 누구보다 아프고 힘들고 차별받은 사람들이기에 그들을 통해 시대상을 잘 표현할 수 있는 거죠. 극 안에서 그 요소는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아요. 자극적일 순 있겠지만, 결국 들여다보면 인간에게 던지는 커다란 메시지죠.
맡은 역할이 유승호 님의 인생과 상당히 거리가 있잖아요. 거리감이 멀기에 도전적이고, 그래서 접근할 때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었어요.
배역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왔죠.(웃음) 처음에는 전형성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그냥 사람다운 모습으로 접근했죠. 굳이 이성애자, 동성애자로 나누지 않고 한 사람을 사랑하는 남자로 좀 넓게 접근했어요. 사실 아직까지도 내가 온전히 받아들인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남은 시간 최대한 이들의 마음이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거짓 없이 표현하는 게 목표예요.
새로운 것을 하다 보면 알게 모르게 이전의 자신과는 다른 모습을 발견하잖아요? 이번에 그런 순간이 있었나요?
처음에 말한,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으려는 마음이 인간 유승호에게 가장 큰 변화일 거예요. 배우로서는, 알고 보니 내가 연기할 때 심각한 단점이 하나 있었더라고요. 말할 때 속으로 먹는 소리를 진짜 많이 내더라고요. 연극에서는 힘 있게 소리를 뱉어내야 하는데 그게 굉장히 부족했죠. 모르던 부분인데 지금은 열심히 고치려고 하죠.
어쨌든 도전은 뭔가 얻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일 텐데, 이번 경험을 통해서 뭘 얻고 싶나요?
이런 얘기를 하면 그 부분만 집중해서 볼 수 있어서 나 혼자만 느껴도 되지 않을까 싶지만, 그래도 하나 굳이 꼽으라면 자신감을 얻으면 좋겠어요. 난 그게 굉장히 부족한 사람이거든요. 그렇다고 어떤 식으로 자신감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아직 공연을 올리지 않았지만, 어쨌든 카메라 앞이 아닌 진짜 관객 앞에서 처음으로 직접적으로 연기를 보여주게 되잖아요. 그 경험이 나중에 연기를 더 자신 있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굳이 기대해보자면 그런 자신감이에요.
긴 경력을 떠올려보면, 자신감은 의외네요?
나만의 기준이죠. 자신만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일 거예요. 자신감이 아예 없으면 사실 아무것도 못하겠죠. 내 입장에서 나라는 배우가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갖고 해나가면 좋겠다는 바람이죠. 할 수 있다는, 잘해낼 수 있다는 마음이 강했으면 하는 바람인데, 그게 부족하니 매번 너무 힘들죠.
주변에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 있으면 더 그런 마음이 들긴 하죠.
그런 분들 중에서도 마음이 막 콩닥콩닥한데 그냥 자신감 있어 보이는 모습으로 이끌어주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함께 연극 연습하는 선배님이나 형, 누나들에게 물어보니 자신도 똑같다고. 나도 떨려, 그래도 해야지, 할 수 있어, 이렇게 얘기해주시더라고요. 그런 모습 보면서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하고 또 힘을 많이 얻었죠.
연습하면서 이번 작품으로 만난 분들과 자주 얘기하나 보네요?
연극이나 뮤지컬 경험이 풍부한 분들과 정말 많이 얘기했어요. 무대 연기 관련해서 그분들이 보는 눈이 정확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분들한테 부탁했죠. 처음에는 사소한 것부터 진짜 뭐가 뭔지 하나도 몰랐어요. 이건 뭐예요? 저건 뭐예요? 다 물어봤으니까요. 현장에 있는 배우부터 스태프까지 그냥 다 물어보면서 많이 얘기하고 있죠. 우리에겐 명확한 목적지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도달하려면 당연히 알아야 하니까 거리낌 같은 건 없죠.
무대 연기를 하는 분들과 함께하면서 전과 다른 신선함을 느꼈나요?
일단은 가장 먼저 소리가 좋다고 느꼈어요. 울림이라고 해야 하나. 실제로 들으니까 매우 멋있더라고요. 또 몸도 무척 다양하게 쓰고요. 계속 함께 연습하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선배들이 발전하는 모습도 볼 수 있잖아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연기를 저런 식으로 해도 되네, 몸이나 목소리를 저렇게도 쓰는 게 가능하구나 하면서 바라봤죠.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시도할 때도 있는데 그게 전혀 어색하지 않았어요. 저분들도 다양하게 많은 걸 도전하면서 열심히 찾아가시는구나. 그걸 보면서 나도 새롭게, 다르게 해볼까 하면서 시도했죠. 어쩔 땐 정말 바보같이도 해보고, 또 어쩔 땐 진지하게도 해보고 다양하게 해봤죠. 이런 과정이 나한테 좋은 경험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죠.
다른 작품에 참여했을 때보다 이번 무대가 어떤 식으로든 기대나 설렘이 확실히 크겠네요.
그동안 굳어진 것들,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이런 과정 속에서 깨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어요. 그리고 진짜 관객들 반응이 너무너무 궁금해요. 그전에 내가 무대에 작품을 올릴 때까지 만족할 만한 그림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크겠죠.
지난 <거래>도 그렇고, 이번 연극도 관통하는 키워드가 도전으로 읽혀요. 지금 배우 유승호의 화두는 도전인가요?
배우라는 직업적 삶의 화두가 도전이나 새로움일 수 있겠지만, 정확하게 이거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어려워요. 이 작품을 선택한 것도 잘 모르지만 뭔가에 이끌려서 했잖아요. 그냥 많은 생각 사이에서 선택한 결과죠. 한때는 계획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이거 했으니까 저거 해야지 하기보다 나도 모르게 여러 생각이 바탕에 깔려 행동으로 나온 거 같아요. 사실 도전이 목적이었다면 이 작품을 흔쾌히 하겠다고 했을 거예요. 그런데 결정하기 전까지 많이 고민했거든요. ‘제가 할 수 있어요?’ 이랬으니까요.
계획하다가 그만둔 계기가 있나요?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웃음) 계획을 세워봤자 의미가 없어서 그냥 안 세우게 됐죠. 더구나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사람이 살짝 무너지더라고요. 왜 난 안 되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자신에게 안 좋았어요. 어느 정도 큰 줄기는 이어가되 느끼는 대로 선택하자고 했죠. 너무 멍청한 선택은 안 할 테니까요. 큰 줄기는 배우로서 어긋나지 않은 길이에요. 어쨌든 배우인 이상 난 연기하면서 다양한 작품을 만날 테니까요.
연기를 오래 했잖아요. 매너리즘에 빠지는 일도 많았을 듯해요.
많았죠. 그런 적이 없다고 하면 참 배우인데 난 참 배우는 아니라서.(웃음) 그런 한계가 왔을 때 피하려고 했어요. 이 길이 내 길이 아니구나 싶은 마음도 들었죠. 그런데 아무리 힘들어도 결국 또 그리워지더라고요. 그러면 역시 이게 내 길인가 하는 마음으로 25년째 반복하고 있죠. 연기하면서 매 순간이 재미있다고 한다면, 솔직히 그건 거짓말이에요. 당연히 흥미가 없을 때도 있고 재밌을 때도 있고 왔다 갔다 하죠. 대신 기대하는 마음은 있어요. 이번 작품이 재미없으면 다음 작품은 재밌을 거라는 기대가 아니에요. 매일매일 촬영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요. 그런 다음을 기대하는 마음이 있죠. 그 마음이 계속하게 하는 힘을 줘요.
한 인터뷰에서 30대를 기대했는데 되고 보니 그리던 모습이 아니었다는 말을 읽었어요. 어떤 모습을 그렸나요?
30대가 되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어요. 모든 일을 프로페셔널하게 처리하는 어른. 어릴 때 본 어른의 모습이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분들이 진짜 훌륭한 어른일 수도 있겠지만, 어린 유승호가 못하는 걸 해내는 존재여서 대단해 보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린 마음에 그 모습이 멋있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법적으로 어른이 되는 20대가 되면 뭔가 달라지겠다 싶었는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죠. 아, 30대가 돼야 가능하구나 하면서 기대했는데 역시 똑같았어요. 난 왜 어른이 되지 못할까라는 생각에 갇혀 마음이 가라앉은 시기도 있었죠. 지금 생각하면 웃기죠. 결국 40대가 되든 50대가 되든 그냥 인간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많이 떨고 긴장할 그냥 나.
어른 유승호가 아닌 지금 유승호에게 어른이란 뭘까요?
힘이 돼주는 사람이요.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요. 맡은 일을 잘하는 건 당연하죠. 그러니까 나라는 사람이 옆에 있을 때 나를 바라보면서 힘든 일도 잘 헤쳐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기운 빠지게 하는 사람이 되기보다 모두에게 어떤 식으로든 힘이 돼주고 싶어요. 지금 생각할 때, 그게 어른인 거 같아요.
이타적이네요.
그래야 나도 편할 거 같아서.(웃음) 내가 힘이 돼야 촬영도 빨리 끝나고 일 처리도 빨라지잖아요. 모두가 함께하는 사회니까요. 다 같이 한 배를 탔으니 그들에게 힘이 돼서 빨리빨리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게 모두에게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살고 싶어요.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