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엔드는 가격을 넘어선 정신과 원칙의 문제다. 눈에 띄게 튀는 걸 만들고 번화가에 매장을 낸 뒤 깜짝 놀랄 가격을 붙인 물건이 유행할 수는 있어도 시간을 견디는 하이엔드가 될 수는 없다.
얄팍한 플랫폼 비즈니스의 전성기 21세기에도 인간에게는 정신이 있다. 이 제품이 왜 이 모습이어야 하는가. 어디를 향상시켜 앞으로 무엇이 되고자 하는가. 이런 고민을 하는 한국의 제작자들을 찾았다.
시장조사, 비용편익, 베끼기, 속도전, 쿠팡과 배민의 검색 상단 점유. 이런 걸 성공 비결이라 여기는 세상에도 전력으로 만든 물건을 모았다. 우리는 기꺼이 이들을 ‘코리안 하이엔드’라 부르기로 했다.
몬어쿠스틱 슈퍼몬 미니 2
매력이 있는 물건은 유행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오디오가 완벽한 예다. 스마트폰이 보급되어 모두가 스트리밍과 무선 이어폰과 블루투스 스피커를 쓰는 세상에도 누군가는 옛날 방식 고급 오디오를 만든다. 좋은 소리를 위해 스피커 박스를 설계해 소리가 튕기는 걸 고려하며 견고한 박스를 만들어 결국 해외로 진출한다. 세계 곳곳에 그런 괴짜들이 나타나는 가운데 한국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수학을 전공하고 재즈 밴드 리더로 활동하다 이제는 통 알루미늄 절삭 하이엔드 스피커를 만드는 서준혁이다. 몬어쿠스틱, 그가 만드는 오디오 브랜드의 이름이다.
“제품을 가져가실 수 있겠어요?” 몬어쿠스틱 스피커 촬영을 문의하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플래그십 스피커인 ‘슈퍼몬’은 한 조에 40kg이 넘어 성인이 들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촬영용으로 받은 슈퍼몬 미니 역시 덩치에 비해 묵직한 건 마찬가지다. 그렇게 만들어진 알루미늄 절삭 스피커는 시각적으로도 상당한 카리스마가 있다. 훌륭한 건 생김새만이 아니다. 공들인 설계, 최고 수준의 부품, 이 모두를 조합한 감각이 슈퍼몬 미니다. 이 매력은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몬어쿠스틱은 2021년부터 북미 오디오 엑스포(AXPONA)에 참가해 실력을 검증받고 있다.
소재 알루미늄 606
무게 5.2kg(1개당)
크기 120×190×210mm
가격 220만원
www.monacoustic.kr
제작자와의 일문일답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기 어렵지 않은가?
하이엔드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오히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와 쾌감을 이해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다. 실제로 북미 박람회에 진출해 해외 리뷰어의 호평을 받았다.
제품에서 가장 자신 있는 부분은?
작은 스피커에서 소리의 균형을 만든 점, 고품질 부품을 빼곡하게 사용한 점, 그래서 오디오의 첫맛, 중간 맛, 끝 맛을 하이엔드적 사운드로 느낄 수 있다는 점.
한국 생산의 장점이 있나?
한국의 알루미늄 절삭 가공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다른 나라와 단가 차이는 있으나 가공 품질이 월등하다. 세계적인 알루미늄 커스텀 키보드 제조사가 대구에 있다.
어디서 판매하나?
도곡동 상투스, 네이버스토어, 11월에 영종도에 열 음악 카페 ‘베토벤하우스’에서 판매할 예정이다. 유럽에서는 네덜란드에 수입사가 있고 북미는 온라인 스토어가 있다.
서준혁(몬어쿠스틱 대표, 수석 엔지니어)
쾨어퍼 하이킹 이어드럼
기능성 제품군에서는 가벼운 무게 자체가 하이엔드 요소가 된다. 가벼워질수록 퍼포먼스에 도움이 되는 종목에서 경량은 중요한 지표다. 비행기, 로드바이크 자전거, 스포츠카, 등산용품, 러닝화, 경량이 하이엔드의 지표가 되는 분야다. 프로의 하이엔드에는 뼈를 깎는 노력이 있고, 그 노력은 고급품을 만드는 자세와 다르지 않다. 그곳에는 음미할 만한 혁신과 노력이 있다. 자전거와 캠핑의 아마추어가 하이엔드 경량 제품을 즐기는 이유다. 리차드 밀 역시 개념적으로는 기존 고급 시계에서 간과하던 ‘경량’을 고급품의 요소로 끌고 들어와 성공한 경우다. 쾨어퍼의 조용진은 ‘경량 하이엔드’라는 개념을 의자로 끌고 왔다.
그는 동물의 진화 같은 느낌으로 의자의 요소를 점점 단순화했다. 경량 소재 알루미늄을 쓰고, 디자인 개선 끝에 10개 미만의 알루미늄 부품으로 무게 2.5kg을 구현한 ‘이어드럼’을 완성했다. 구조적 특징은 디자인으로도 이어진다. 경량을 위한 부품 간소화가 이 의자만의 실루엣을 만들어내고, 그 실루엣이 기억에 남을 이어드럼만의 모습이 되었다. 조용진은 인터뷰에서 운동선수 같은 말을 했다. “의자에 쓴 3mm 두께 파이프를 2mm 파이프로 바꾸는 중입니다. 성공한다면 825g 가벼워집니다.”
소재 알루미늄 파이프
무게 2.51kg
크기 360×460×795mm
가격 69만 5천원
www.koerper.kr
제작자와의 일문일답
이런 제품을 만든 계기는?
장비를 극단적으로 가볍게 만들려는 사람들의 호전성과 실험 정신을 체화해 제품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이쪽 제품군의 하이엔드가 있다면 얼마나 근접했나?
가장 가벼운 알루미늄 의자는 오스카 지에타 스튜디오의 ‘울트라 레제라’. 1660g이다. 나는 아직 850g 뒤져 있다.
품질이나 완성도에서 참고하는 게 있나?
가구를 제외하면 로터스 엘리제.
어디서 판매하나?
지금은 쾨어퍼 홈페이지. 추후 오프아우어 숍에서 판매할 예정이다.
조용진(쾨어퍼 디렉터)
베이퍼룩스 T5 테이블 램프
베이퍼룩스에는 영국 특유의 전통과 어느 한국인의 집념이 있다. 이들은 원래 영국 회사다. 제1차·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이 쓰던 등유 랜턴을 만들었다. 독일의 페트로막스와 함께 이곳의 랜턴이 전선을 밝혔다. 시간에 따라 둘의 운명도 변했다. 페트로막스는 브랜드와 생산권이 각각 분리되어 오늘날 페트로막스는 옛날 페트로막스와 상관이 없다. 베이퍼룩스는 영국 회사가 계속 소유하다 2010년에 매물로 나왔다. 한국의 램프 애호가 원재정이 이 브랜드를 샀다. 기계 제조업을 해본 적이 전혀 없는 채로, 리버풀에서 옛날 선반과 프레스까지 모두 가져왔다.
14년이 지난 지금 아직 원재정은 베이퍼룩스를 직접 만든다. 부천의 아파트형 공장에서 아내와 부품을 닦고 조립해 출고한다. 가격은 50만원 안팎. 도면의 스펙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다. 그에게 베이퍼룩스의 옛날 도면은 종교 같은 것. 옜날 스펙 앞에서 원재정은 타협한 적이 없다. 그의 말을 빌리면 “쪽팔리니까”. 흐르는 시간을 버틴 덕에 이제 베이퍼룩스는 물량의 90%를 수출하고, 원재정은 최근 라인업을 하나 추가했다. T5 테이블 램프. 도면으로만 남아 있던 램프를 80년 만에 복각했다. 이게 그 램프다.
소재 황동
높이 465mm
가격 49만원
vapalux.co.kr
제작자와의 일문일답
높은 품질을 추구하는 이유는?
추구한 적 없다. 스펙대로 할 뿐이다.
제품에서 가장 자신 있는 부분은?
매뉴얼대로 만드는 것. 더도 덜도 말고.
품질이나 완성도 면에서 지향점은?
아이폰. 택배 포장부터 환상적이다.
어디서 판매하나?
우리 홈페이지. 다른 곳은 의미가 없었다.
원재정(베이퍼룩스 대표
바이림 셰이커 박스 0~10호
사진 속의 멋진 상자는 종교의 산물이다. 미국의 퀘이커 교도 중 일부가 독립해 물건을 자력으로 생산하는 소박한 생활을 시작했다. 그들은 기도할 때 몸을 흔들어서 ‘셰이커’라 불렸고, 이들이 만든 가구를 셰이커 가구라 부른다. 셰이커 가구는 간결하며 별 장식이 없다. 그들에게는 ‘단순한 삶이 소명이고 청결한 삶이 신앙’이기 때문이다. 좋은 것은 종교를 넘어 퍼지는 것, 이제 셰이커 박스는 전 세계적으로 만들어지고 팔리며 쓰이고 있다. 셰이커 박스의 얇고 견고하고 간소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오늘날 무엇을 잃었는지 잠깐 생각하게 된다.
이 셰이커 박스는 ‘바이림’의 임건수가 만들었다. “셰이커 박스가 저희 고유 디자인은 아닙니다만, 간결하고 아름다운 디자인의 제품에 저희의 제품 완성도를 접목하고 싶었습니다”라는 말처럼 거슬리는 부분 하나 없이 매끈하다. 소박한 디자인과 범용성 있는 재료는 셰이커 박스의 전통을 따랐고, 표면 처리와 단차 마감, 매끈한 곡선 같은 디테일에서 제작자의 조용한 집념이 느껴진다. 셰이커 박스는 클수록 비싸다. 단순히 값이 비싼지를 말할 게 아니라, 실물을 보고 이 가격에 대해 갖는 의견이 당신의 세계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재 북미산 체리
크기 0호 88×47×27mm 10호 450×314×180mm
가격 0호 4만5000원, 10호 35만2000원. 사진 속 상자 11개 가격을 다 합치면 166만8000원
bi-lim.com
제작자와의 일문일답
높은 품질을 추구하는 이유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품에서 가장 자신 있는 부분은?
기본을 충실히 따른 제품의 완성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품질의 기본이다.
해당 제품군의 세계 수준이 있다면 얼마나 근접했나?
월드 베스트는 아니어도 월드 클래스는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모르는 곳은 있겠지만 적어도 우리보다 뛰어난 곳을 국내에서 보지는 못했다.
어디서 판매하나?
홈페이지, 네이버스토어. 교보문고 광화문점과 강남점의 ‘문보장’.
임건수(바이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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