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각형과 원이 겹치는 케이스 디자인은 로마의 고대 건축물
‘막센티우스 바실리카’ 천장에 새겨진 패턴에서 착안한 스타일이다.
남다른 실루엣 뒤에는 굉장한 맥락과 전통이 있다.
규칙과 파격
규칙을 깨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그 규칙에 통달해야 한다. 이건 불가리가 아니라 오데마 피게의 유명한 광고 문구다. 다른 회사의 광고 문구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가 있다. 일단 이 광고 문구가 적용되는 곳이 아주 많다. 광고 문구라기보다는 심오한 인생의 지혜 같은 면이 있는 말이다. 오데마 피게와 상관없는 저 문구를 그냥 표지에 인쇄해 판매하는 공책도 있다.
규칙을 깨기 위해 규칙을 통달해야 하는 건 럭셔리 브랜드의 다른 영역이나 다른 브랜드에서도 많이 일어난다. 다른 분야에도 저 카피가 어울리는 회사가 많다. 실제로 많은 시계 회사들이 ‘규칙에 통달해 규칙에서 벗어난’ 시계를 만든다. 그중에서도 2010년대 들어 가장 눈에 띄는 모습을 보이는 시계 브랜드는 불가리다. 불가리의 다양한 시계 중에서도 옥토 피니씨모 라인업은 여러모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불가리 옥토 피니씨모 라인업은 보통 시계와 다르게 생겼음에도 확실히 고급 기계식 손목시계의 전통을 잇고 있다. 그 전통이란 얇은 두께다. 서양의 고급 기계식 손목시계에는 드레스 워치 분야가 있다. 여기서 ‘드레스’는 서양 남성복의 ‘드레스업’을 말하며, 이 ‘드레스업’은 셔츠와 재킷이 포함된 서양식 정장 차림이다. 서양식 정장 차림에서 손목시계는 셔츠 소매의 단추를 채워도 걸리적거리지 않을 만큼 얇아야 한다. 이른바 ‘울트라 신’ 시계는 이런 실질적인 수요로부터 발전했다. 지금까지 ‘울트라 신’ 지향 시계들이 가죽 스트랩에 (기본적으로) 다이얼이 간소한 드레스 워치의 외형을 띤 이유다. 불가리 옥토 피니씨모 역시 두께가 얇고 다이얼이 간소하다는 점에서 드레스 워치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한다.
동시에 이 시계는 해당 요소를 제외한 드레스 시계의 규칙에서 상당히 벗어난다. 사진의 옥토 피니씨모 8 데이즈처럼 브레이슬릿을 장착한 것부터 대표적인 예다. 원래 전통적인 손목시계의 세계에서 브레이슬릿은 (드레스 워치와 대비되는) 다이버 워치 등 스포츠 계열 시계에 쓴다. 소재 역시 다르다. 지금도 파텍 필립이나 브레게 등 손목시계의 역사성에 충실한 시계 회사들은 드레스 워치를 만들 때만은 골드 케이스를 쓴다. 반면 불가리는 드레스 시계의 정신에 충실하면서도 최신 소재인 티타늄을 라인업에 대거 적용했다.
옥토 피니씨모 스켈레톤 8 데이즈
레퍼런스 103610 케이스 지름 40mm 케이스 소재 티타늄 브레이슬릿 티타늄 무브먼트 BVL 199 SK 기능 시·분·초 표시, 파워 리저브 표시 구동 방식 매뉴얼 시간당 진동수 2만1600vph 한정 여부 없음 가격 3940만원
특수한 보편성
이는 모두 오늘날의 시계 사용 습관을 고려한 합리적 변용이라 볼 만하다. 오늘날 시계 사용자들은 이미 브레이슬릿을 장착한 스포츠 시계를 정장 차림에 찬다. 금보다 가벼운 티타늄 역시 특유의 경량 특성 때문에 고급 시계 소재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여러모로 오늘날 시계 사용자들의 실사용과 수요가 반영된 셈이다.
시계에 큰 관심이 없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보다 남다른 케이스 디자인이 눈에 띌 것이다. 케이스 디자인 역시 ‘규칙에 통달해 규칙을 깬’ 사례다. 일단 케이스 모양부터 다르다. 보통 드레스 워치는 ‘울트라 신’을 구현하기 위해 무브먼트나 케이스를 개조해도 기본적인 원형 케이스는 그대로 지켜왔다. 반면 불가리 옥토 피니씨모는 전체적으로 보면 사각형에 가까운 팔각 시계다. 옥토라는 이름부터가 라틴어로 ‘8’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디자인은 다른 브랜드 어디에도 없다는 점에서 확실히 남다르다.
동시에 옥토의 팔각 케이스는 불가리와 이탈리아의 전통을 잇는 실루엣이기도 하다. 팔각형은 유명 손목시계 디자이너 제랄드 젠타가 손목시계를 디자인할 때 즐겨 쓰던 디자인 방법론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랄드 젠타가 디자인해 지금까지 아이콘으로 남아 있는 파텍 필립 노틸러스와 오데마 피게 로얄 오크, IWC의 인제니어는 모두 팔각 케이스고, 불가리는 2000년 제랄드 젠타를 인수했으니 그의 인장과도 같은 팔각을 쓴 것도 말이 된다. 아울러 팔각형과 원이 겹치는 케이스 디자인은 로마의 고대 건축물 ‘막센티우스 바실리카’ 천장에 새겨진 패턴에서 착안한 스타일이다. 남다른 실루엣 뒤에는 굉장한 맥락과 전통이 있다.
이런 전통과 현대성을 잘 섞어 설계한 뒤 옥토 피니씨모는 다양한 변주를 매년 출시한다. 앞서 언급한 드레스 워치의 전통에 충실한 골드 케이스+가죽 브레이슬릿+핀 버클의 모델도 물론 있다. 소재도 스틸, 티타늄, 세라믹 등을 자유롭게 사용한다. 시계 기술도 발전시켜 크로노그래프, 미닛 리피터, 투르비용 등 각종 고급 옵션을 탑재한 시계를 선보인다(그리고 이 시계들은 출시될 때마다 해당 부문의 가장 얇은 시계 기록을 세운다). 옥토 피니씨모의 방수 성능을 향상시킨 ‘옥토 피니씨모 S’를 출시해 일상에서 쓰기 편한 시계를 찾는 수요에도 대응한다. 안도 다다오나 세지마 가즈요 등의 외부 인사를 모시거나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해 리미티드 에디션도 만든다. 대단한 생산성이다.
지금 소개하는 옥토 피니씨모 8 데이즈 역시 옥토 피니씨모 월드의 일부다. 2022년 8월 열렸던 제네바 워치 데이즈에서 골드 케이스 버전으로 첫선을 보인 뒤 티타늄 케이스 등 다른 케이스에도 담겨 출시되는 중이고, 사진 속 시계는 티타늄 케이스와 티타늄 브레이슬릿 버전이다. ‘8 데이즈’라고 적혀 있는 것처럼 이 시계의 기술적 자랑거리는 태엽을 한 번 끝까지 감으면 8일 동안 시계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기계식 시계가 태엽을 완전히 감은 뒤 완전히 풀리기까지의 시간을 ‘파워 리저브’라고 한다. 보통 파워 리저브는 40~60시간대, 요즘은 파워 리저브가 길어져 약 70시간대가 표준화되는 추세다. 그런 중에도 이 시계의 8일 파워 리저브는 192시간이니 상당히 긴 편에 속한다. 파워 리저브가 짧으면 시계를 자주 감아줘야 하고, 오토매틱인 경우에는 매일 차거나 별도의 와인더에 걸어 계속 돌아가게 해야 한다. 긴 파워 리저브는 그런 면에서 일상생활에서 유용한 기능이다.
아울러 이 제품은 속이 보이는 스켈레톤 시계라 눈에 무척 잘 띈다. 스켈레톤 시계는 별도의 다이얼 없이 속이 보이는 무브먼트를 보여주는 시계를 말한다. 무브먼트라는 기계 자체의 구조를 장식 요소로 활용한 셈이다. 그 덕에 사진에서 볼 수 있듯 뒤가 투명하게 보이는 매력이 있다. 12시 인덱스 뒤편으로는 192시간의 파워 리저브를 상징하듯 일반 기계식 시계보다 훨씬 크고 스프링도 확실히 많이 감겨 있는 태엽(배럴)이 보인다. 7시 방향에 있는 초침 위로는 남은 동력의 양을 보여주는 파워 리저브 인디케이터가 있다.
최근 약 10년간 고급 시계 시장 어디를 둘러봐도
불가리 정도의 역사와 저력이 있는 브랜드 중
옥토 피니씨모처럼 대담한 디자인을 선보인 시계는 없다.
미래의 고전이 되려면
불가리 옥토 피니씨모 제품군은 다양한 의미로 용기 있는 시계다. 시계 자체의 콘셉트와 디자인부터 용기의 산물이다. 보수적인 고급 시계 시장에 이런 디자인을 내세운 것만으로도 용기를 인정해야 한다. 최근 약 10년간 고급 시계 시장 어디를 둘러봐도 불가리 정도의 역사와 저력이 있는 브랜드 중 옥토 피니씨모처럼 대담한 디자인을 선보인 시계는 없다. 고급 시계는 값비싼 물건인 만큼 기존의 관성적인 전통을 따르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 빽빽한 규칙과 관행 사이에서 이런 물건이 나온 건 신기할 정도로 놀라운 일이다.
거기 더해 불가리는 매년 다른 기능과 라인업을 추가한다. 다른 브랜드들의 신제품이 다이얼 색이나 금속 소재 정도를 변주하는 데 비해 옥토 피니씨모는 방수 성능을 추가하거나 거의 매년 새로운 컴플리케이션을 내거나 티타늄이나 세라믹 등 거의 새로운 라인업 수준의 신제품들을 선보인다. 전통적인 시계 아이콘이 아니다 보니 오히려 더욱 진취적으로 여러 시계를 내는 걸까. 특유의 보수성 때문에 필연적으로 고루한 느낌도 드는 기존의 시계 시장과 비교했을 때 불가리 옥토 피니씨모는 새로운 걸 기대하는 맛이 있다.
이런 의미를 떠나 불가리 옥토 피니씨모는 차기 편하다. 얇아서 손목에 가볍게 얹히고 브레이슬릿은 손목에 가볍게 감긴다. 핸즈에 각면을 주어서 고개를 살짝만 돌려도 시간이 잘 보인다. 스켈레톤은 기계장치가 보인다는 시계의 특성상 핸즈가 잘 보이지 않을 때도 있는데, 불가리는 무브먼트와 핸즈의 광택과 톤을 달리 해 가독성 문제도 해결했다. 상징적 의미와 기술적 숙제, 실제로 이 제품을 구매해서 사용할 소비자 사용성까지 고려한 시계라 할 만하다. 노하우와 과단성, 농후한 기술을 두루 느낄 수 있다.
나는 그래서 이 시계의 목표는 미래에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부터 약 50여 년 전 어느 시계 브랜드가 신제품을 출시했다. 당시 기준으로는 너무 큰 크기에, 고가 시계 브랜드에서는 잘 쓰지 않던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에, 어디서도 본 적 없던 케이스 디자인인데 그때 기준으로도 꽤 비싼 시계였다. 이 시계는 사실 출시 직후에는 잘 팔리지 않다가 출시되고 약 10년이 지나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고급 시계라 돈이 있어도 구하기 쉽지 않은 시계가 로얄 오크다. 모를 일이다. 이 시계 역시 훗날의 아이콘이 될지, 지금이 21세기의 상징적 고급 시계의 초창기일지.
끌림 요소
+ 스켈레톤 시계 특유의 미학과 불가리 특유의 완성도
+ 가벼운 중량 덕에 탁월한 사용감
+ 미래의 아이콘이라 본다면 투자 가치가 있음
망설임 요소
- 티타늄에 스켈레톤에 파워 리저브가 길어지니 웬만한 금시계 값
- 사람에 따라 조금 무안할 만큼 화려한 생김새
- 미래의 아이콘이 되지 못했을 경우 투자 책임은 본인에게 있음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