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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혼

랄프 로렌이 지키고 있는 미국 시계와 공예에 대한 역설 같은 이야기와 아름다운 시계.

UpdatedOn February 0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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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소개하는 시계를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한국에 있는 온갖 고급품을 촬영해온, 이번 시계의 사진을 촬영한 박원태 사진가 역시 이런 시계는 처음 본다고 했다. 그는 가격을 듣고서는 더 놀랐다. 7985만원. 여기까지 읽고는 ‘누가 이 가격에 랄프 로렌 시계를 사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랄프 로렌은 진지한 시계를 생각보다 오래 만들어오고 있다. 오늘 이야기는 랄프 로렌의 진지한 시계에 대한 이야기다. 이 시계는 랄프 로렌이 만드는 진지한 시계의 진지한 예시 중 하나다.

패션 하우스들이 진지한 시계를 만들어온 지는 좀 됐다. 샤넬의 J12나 에르메스의 에이치 아워는 기성 고급 시계의 시각에서 봐도 신선한 고급품이다. 하이패션 브랜드는 오히려 시계 제조사의 인습을 뛰어넘는 창의성을 시계에 집어넣기도 한다. 랄프 로렌 시계도 그런 경우라 봐야 한다. 랄프 로렌은 패션 브랜드가 구색용으로 갖춘 적당한 쿼츠 손목시계를 넘어선 시계를 만드는 곳이다. 2010년대 초반부터는 리치몬트 계열의 시계 회사들과 적극 협업해 리치몬트 그룹사의 고급 무브먼트를 이식하는 시도를 했다. 예를 들어 ‘랄프 로렌 스포팅 월드 타임’에 들어간 랄프 로렌 RL939 무브먼트는 예거 르쿨트르의 939 무브먼트다. 시계의 다이얼로 나무껍질을 사용하는 등 실험적인 시도도 계속하고 있다.

랄프 로렌풍 고급 시계는 결국 랄프 로렌의 고향인 미국으로 향한다. 랄프 로렌은 6년 전인 2018년 브랜드 창립 50주년을 맞아 ‘아메리칸 웨스턴 워치 컬렉션’을 발표했다. 말 그대로 개척 시대의 미 서부를 떠오르게 하는 투박하면서도 정교한 세공이 들어간 시계들이었다. 신기한 시계였다. 네이티브 아메리칸의 공예품인 콘초풍 인그레이빙을 가득 새긴 시계가 주를 이뤘다. 오늘 시계 역시 그런 디테일이 상당히 잘 구현되어 있다.

일단 무브먼트가 남다르다. 랄프 로렌은 예거 르쿨트르의 무브먼트를 썼던 과거처럼 이번에도 리치몬트 산하 그룹의 검증된 무브먼트를 사용했다. 이번 무브먼트 파트너는 IWC. IWC의 무브먼트 중에서도 나름 의미가 있는 98295다. 98295는 IWC 창립자 플로렌타인 아리오스토 존스가 살아 있을 때 개발한 IWC의 초기형 무브먼트다. 원래 회중시계에 들어가던 옛날 무브먼트라 크기가 크다. 레이아웃 역시 초침도 없이 간단하고, 시간당 진동수도 옛날 것인 만큼 1만8000회다. 이 무브먼트는 IWC 시계 중에서도 역사적인 의미를 담는 시계에만 들어가는 귀한 물건이고, IWC는 이 칼리버를 아직 ‘존스 칼리버’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거기 더해 랄프 로렌은 이 무브먼트를 뼈만 발라내 ‘스켈레톤’으로 만들고 생선 가시처럼 남아 있는 부분에 일일이 손으로 무늬를 새겼다. 의미적으로나 공예적으로나 보통 물건이 아니다. 98295를 스켈레톤으로 만든 건 IWC에도 없다.

핸드 인그레이빙은 시계의 모든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케이스 역시 콘초 정서가 생각나도록 모든 테두리를 전부 인그레이빙으로 새겼다. 손이 잘 가지 않을 듯한 러그 부분은 물론 버클까지 빠짐없이. 랄프 로렌에 따르면 모든 인그레이빙을 뉴욕의 인그레이버가 직접 손으로 새겼다고 한다. 랄프 로렌은 그 인그레이버가 누구인지 알려줄 수 없다고 했지만 미국에서 활동하는 시계 인그레이버의 홈페이지를 통해 대략의 작업 단가를 가늠할 수 있었다.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에서 활동하는 시계 인그레이버 데에비드 시한의 시세에 따르면 시계 케이스 인그레이빙의 가격은 5000~2만 달러다. 요즘 환율로는 시계 인그레이빙에만 3000만원 가까이 써야 한다는 이야기고, 무브먼트 내부 인그레이빙 가격은 따로 내야 할 것이다. 이 시계는 케이스 소재까지 금이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면 이 시계의 가격이 괜찮아 보이기 시작한다.

이 시계는 스트랩도 보통이 아니다. 손목시계 제조는 워치메이킹의 영역과 줄 등 별도 영역으로 나뉜다. 랄프 로렌이 시계 제조에서는 스위스 친구들에게 밀릴지 몰라도 옷이나 가죽에서는 그럴 리 없다. 저 그림 같은 가죽의 고향은 텍사스의 엘파소다. 거기서 손으로 다듬어 가죽을 만들고 그 가죽을 이탈리아로 보내 버니싱 가공을 진행한 뒤 벨기에의 숙련공이 조립을 마무리한다. ‘대단하다, 멋있다’를 넘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의 디테일이다. 말하자면 이렇게 된다. 무브먼트는 스위스산. 인그레이빙은 미국에서 한다. 그걸 스위스로 보내 조립을 마무리한다. 스트랩은 텍사스에서 만들어 이탈리아에서 가공한다. 이 모든 것을 벨기에로 가져와서 완성한다. 실로 사치스러운 시계다.

랄프 로렌 아메리칸 웨스턴 워치 컬렉션

레퍼런스 RLR0911702 케이스 지름 45mm 케이스 소재 로즈 골드 버클 핀 버클 스트랩 소가죽 스트랩 무브먼트 RL98295 기능 시·분 표시 구동 방식 매뉴얼 시간당 진동수 1만8000vph 한정 여부 없음 가격 7985만원

스켈레톤 무브먼트의 거의 모든 뼈대에 인그레이빙 가공이 되어 있다.

스켈레톤 무브먼트의 거의 모든 뼈대에 인그레이빙 가공이 되어 있다.

스켈레톤 무브먼트의 거의 모든 뼈대에 인그레이빙 가공이 되어 있다.

이 시계의 숨은 럭셔리 포인트는 버클이다. 버클만 따로 팔아도 될 정도의
디자인과 공예적 완성도가 있다.

이 시계의 숨은 럭셔리 포인트는 버클이다. 버클만 따로 팔아도 될 정도의 디자인과 공예적 완성도가 있다.

이 시계의 숨은 럭셔리 포인트는 버클이다. 버클만 따로 팔아도 될 정도의 디자인과 공예적 완성도가 있다.

텍사스와 이탈리아를 거쳐 만들어지는
대단한 가죽 스트랩.

텍사스와 이탈리아를 거쳐 만들어지는 대단한 가죽 스트랩.

텍사스와 이탈리아를 거쳐 만들어지는 대단한 가죽 스트랩.

무브먼트의 뒷면까지, 기능적으로 무리가 갈 만한
부분을 뺀 모든 곳에 세공이 되어 있다.

무브먼트의 뒷면까지, 기능적으로 무리가 갈 만한 부분을 뺀 모든 곳에 세공이 되어 있다.

무브먼트의 뒷면까지, 기능적으로 무리가 갈 만한 부분을 뺀 모든 곳에 세공이 되어 있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비싸거나 여러모로 좋은 시계는 많다.
하지만 이런 시계는 이것 하나뿐이다.”

 

불규칙한 인그레이빙의 모양새가
역으로 수제 느낌을 더 강하게 낸다. 럭셔리는 인간의 손으로부터 온다.

불규칙한 인그레이빙의 모양새가 역으로 수제 느낌을 더 강하게 낸다. 럭셔리는 인간의 손으로부터 온다.

불규칙한 인그레이빙의 모양새가 역으로 수제 느낌을 더 강하게 낸다. 럭셔리는 인간의 손으로부터 온다.

그나저나 왜 여러 가지 미국의 공예적 요소 중 아메리칸 웨스턴 시계를 만들게 되었을까. 랄프 로렌 창립자이자 뮤즈인 랄프 로렌 본인의 기호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 랄프 로렌은 서부 개척시대가 연상되는 옷을 평소에도 많이 입었다. 톤이 다른 데님 팬츠와 데님 셔츠에 예의 콘초 벨트를 두르고 가죽 카우보이모자를 쓰곤 했다. 랄프 로렌의 다양한 브랜드 중 RRL이 그 무드를 극대화했다. RRL 역시 오랫동안 써서 길들인 고급품 특유의 느낌을 띠도록 만들어진다. 잘 길들인 느낌이 나는 물건은 비쌀 수밖에 없다. 길들이려면 원래 소재가 튼튼해야 하니 원 소재부터 비싸고, 조금 낡아 보이는 후가공을 하는 것도 섬세한 절차가 필요한 일이다. 이 시계는 말하자면 RRL 세계관의 고급 시계라 할 수 있다.

RRL 세계관에 고급 시계가 필요할까? 그때 사람들이 시계를 봤나? 손목시계를 찼나? 바로 이게 랄프 로렌의 흥미로운 부분이다. 랄프 로렌은 아메리칸 럭셔리가 맞지만 냉정히 말해 ‘아메리칸 판타지 럭셔리’다. 랄프 로렌이라는 브랜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금씩 논리의 앞뒤가 모호해진다. 랄프 로렌은 어릴 때부터 광야를 달리던 남자가 아니다. 그는 브롱크스에서 넥타이를 팔던 유대계 미국인 랄프 리프시츠다. 리프시츠에서 성을 로렌으로 바꾼 뒤 영미권의 멋지고 값비싼 것들의 이미지를 모두 이식하며 패션 거부 랄프 로렌이 됐다. 사실 랄프 리프시츠 본인의 진짜 뿌리에 가장 가까운 옷은 뉴욕에서 볼 수 있는 유대인 복장이다. 랄프 로렌의 부모는 아들이 랍비가 되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랄프 로렌의 명망이 높아지면서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랄프 로렌이 부자가 되고, 랄프 로렌 브랜드가 글로벌 패션 기업으로 커지면서 랄프 로렌 본인이 꿈꾸던 세상이 정말 현실이 되어버렸다. 그의 어릴 적 꿈은 백만장자였고, 그는 어릴 때부터 옷을 좋아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랄프 로렌의 바로 그 모습이다. 옷을 잘 입는 백만장자. 거기 더해 오늘날 랄프 로렌이 만드는 초고가품의 완성도는 높다. 오늘 소개하는 시계는 랄프 로렌이 아니라면 세계의 어떤 글로벌 브랜드도 감히 엄두를 못낼 니치 럭셔리 상품이다.

이 시계가 처음 나온 2018년 해외 시계 사이트에서는 애호가들의 비판이 좀 있었다. 원래 애호가들은 자기들이 정한 원칙에서 벗어나면 비판을 하게 마련이고, 오늘날 브랜드가 진행하는 성장 일로의 캠페인은 애호가와 자주 부딪힌다. 미국 애호가들은 랄프 로렌 시계의 방법론으로 살 수 있는 다른 좋은 미국 시계가 많다고 했다. 더 섬세한 핸드 인그레이빙이 들어간다거나, 같은 사양이라면 조금 더 저렴하다거나. 나 역시 심정적으로는 작은 독립 시계 브랜드를 좋아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엔 랄프 로렌 시계의 완승이다. 독립 시계들이 랄프 로렌이 구현한 국제적인 규모의 제품 생산과 품질 관리를 따라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어차피 이 시계는 가격이나 디자인 면에서 보통 사람의 시각으로 판별하고 평가할 수 있는 시계가 아니다. 이 시계에 대한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뉠 것 같다. 일단 이런 물건에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을 절대 다수. 두 번째는 이런 물건의 만듦새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 중 가격 때문에 고민할 사람. 마지막으로 이런 물건을 알아보는 눈이 있고 감가상각이 무의미할 정도의 고가품에 약 8000만원쯤은 그냥 써버릴 수 있는 아주 소수의 사람. 그런 사람들이라면 망설임 없이 이 시계를 살 것이고,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는 이 시계에 굉장히 만족할 것이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비싸거나 여러모로 좋은 시계는 많다. 하지만 이런 시계는 이것 하나뿐이다.

끌림 요소
+ 비교 대상이 없을 만큼 높은 공예적 완성도
+ 하나하나 따져보면 의외로 별로 안 비싼 가격
+ 다른 브랜드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강렬한 개성

망설임 요소
- 8000만원 정도 되는 시계인데 핀 버클이라는 점
- 정말 이런 시계를 좋아한다면 독립 시계라는 대안이 있음
- 부담스러울 정도의 고급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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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박찬용
Photography 박원태

2024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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