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8 BOXSTER GTS 4.0
미안하게 됐습니다
기세 좋게 ‘혹한기 드라이빙’ 기획을 냈지만 진짜 통과될 줄은 몰랐다. 막상 기획안이 통과되자 뒤늦게 사진가와 함께해야 한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동행할 사진가 신동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지붕 열고 영종대교를 건널 겁니다.” 그리고 촬영 전날 신동훈에게 메시지가 왔다. “날이 춥네요 주말 잘 보내세요.” 많은 자동차 브랜드는 여름보다 겨울에 자동차 지붕을 여는 게 낫다고 말한다. ‘차를 디자인할 때 주행풍이 실내로 들어오지 않도록 고안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요즘 출시되는 카브리올레를 옆에서 보면 전방 유리가 뒤로 확 눕는 등 확실히 공기가 들어오지 않게 생겼다. 그러나 ‘어느 누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봅니다’ 하는 식으로 기사를 쓸 수는 없다. 이 날씨에 지붕을 연 채 달려봐야 했다. 촬영 당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날씨 앱을 켰다. 바깥 날씨는 영하 2℃였다.
빠를수록 따뜻하다
인천과 영종도를 잇는 영종대교의 길이는 4,420m다. 영종대교는 유독 바람이 강하게 부는데, 2017년에 사람이 날아가는 사고가 있을 정도였다. 공차 중량만 1,460kg에다 무게중심까지 낮은 스포츠카가 날아가기야 하겠냐만 겁이 나긴 했다. 영종대교에 진입하기에 앞서, 지붕을 열기 위해 북인천톨게이트를 지나자마자 차를 세웠다. 우선 패딩 점퍼를 목 끝까지 잠그고 차의 모든 히터를 최대치로 올렸다. 718 박스터의 소프트톱은 약 10초면 전부 열린다. 지붕이 열리자 머리 위로 찬물 같은 공기가 들이닥쳤다. 박스터는 순식간에 영종대교 제한 속도인 100km/h에 도달했다. 막상 신경 쓰이는 건 추위가 아닌 소리였다. 운전석 뒤편 머플러에서 터져나오는 엔진 사운드와 바람 소리에 잠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다 깨달았다. 안 춥구나. 달리는 내내 찬 바람이 닿는 곳은 정수리뿐이었다. 바퀴 달린 욕조를 타고 반신욕하는 기분이다. 속도를 높일수록 실내에 바람이 덜 들어왔다. 윈드실드를 타고 흘러간 바람이 얇은 지붕 역할을 했다.
차가 줄 수 있는 거의 모든 즐거움
오늘 시승한 718 박스터는 그냥 박스터가 아니다. GTS 4.0이다. 보통 718 박스터는 수평대향 4기통 트윈 터보가 올라가는데, 이 차에는 4.0L 6기통 자연흡기 박서 엔진이 들어간다. 최고출력은 박스터 S보다 57마력 높은 데다 요즘 차에서 느끼기 힘든 대배기량 자연흡기 엔진의 마지막 혼이 살아 있다. 이 차의 또 다른 장점은 엔진 위치다. 엔진은 자동차 부품 중 가장 무겁다. 그래서 엔진 위치가 차의 무게중심을 결정하고 차의 무게중심 위치가 차의 운동 성능을 결정한다. 박스터는 포르쉐에서 유일하게 앞바퀴와 뒷바퀴 사이에 엔진을 배치했다. 그 결과 718 GTS 4.0은 상당히 재미있고 매력적이다. 911 카브리올레는 가장 저렴한 모델 가격이 1억8천7백30만원부터다. 718 박스터 GTS 4.0은 그보다 5천만원 이상 저렴하다. ‘포르쉐=911’이라는 상징성을 잊으면 얻을 수 있는 게 많다.
첫 출시 연도 1996년 최저 시작 가격 1억3천5백30만원 전장×전폭×전고 4,390×1,800×1,275mm 파워트레인 4.0L 6기통 자연흡기 박서 엔진 최고출력 407마력 최대토크 43.9kgf·m 복합 연비 8.4km/L 승차 인원 2 공차 중량 1,460kg
“평창까지 오는 내내 발이 시리긴 했지만 견디지 못할 만큼 춥지는 않았다.
적어도 실내에서 입김이 나지는 않았다.
그렇게 고개를 갸웃하며 차에서 내리자 다른 세상이었다.”
EV6 long range 2WD GT-LINE
야구공과 전기차
운동선수처럼 자동차도 장르에 따라 비시즌이 있다. 야구선수와 전기차의 비시즌은 겨울이다. 추운 날씨는 투수보다 타자에게 불리하다. 기온이 낮아지면 공기밀도가 높아지고, 그만큼 야구공이 받는 공기저항도 높아진다. 즉 온도가 낮으면 안타의 비거리가 짧아진다. 실제로 미국 다트머스대학 지리학과는 지구 온난화가 메이저리그 홈런 수를 늘렸다는 연구 결과까지 발표했다.
타구 비거리와는 다른 원리지만 전기차도 겨울 항속거리가 짧아진다. 전기를 저장하는 리튬이온 배터리의 전해질이 액체이기 때문이다. 기온이 떨어지면 전해질이 얼어 성능이 급격히 낮아진다. 실내 온도도 문제다. 내연기관 자동차의 난방에서 걱정할 건 운전자의 피부 나이뿐이다. 엔진 열로 히터를 돌려 추가 에너지 소모가 없다. 반면 전기차는 엔진이 없으므로 히터를 돌리기 위해서도 전력을 써야 한다. 항속거리가 짧아지는데 추가 전력 소모까지 있으니 여러모로 겨울에 불리하다. 그런데 히터를 안 쓴다면 어떨까? 오직 달리는 데만 배터리 용량을 쓴다면?
숫자는 숫자일 뿐
주행 목적지는 두 가지 조건을 갖춰야 했다. 충분히 멀고, 서울보다 추운 곳. 아무리 혹한기 테스트여도 고속도로나 산길에서 차가 멈춘다고 상상하면 아찔했다. 내연기관차라면 휴대용 연료통 하나로 해결할 상황을, 전기차는 보험사를 통해 견인차를 부르거나 다른 전기차와 연결해 전기를 공급받아야 끝이 난다. 그래서 고른 선택지가 강원도 평창과 EV6 롱레인지 2WD GT 라인이다. EV6의 제원상 최대 복합 주행거리는 470km. 고속도로에서는 411km까지 떨어지지만 평창까지는 무난히 도착할 수 있을 스펙이었다.
출발 전 80%까지 급속 충전을 마친 뒤 전원을 켰다. 주행 가능 거리는 391km가 찍혔다. 평창까지 가는 내내 ‘도착까지 남은 거리’와 ‘남은 주행 가능 거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고속도로에서는 실제로 달린 거리가 남은 주행 가능 거리에서 줄어든 숫자보다 더 길기도 했다. i-페달이라고 하는 기아의 회생제동 기술 덕이다. 그럼에도 평창 군청에 도착했을 때 확인한 배터리 잔량은 27%, 주행 가능 거리는 118km였다. 실제로 우리가 주행한 거리보다 50km 정도를 손해본 셈이었다.
상상하지 말 것
운전 습관 탓일까. 평창까지 오는 내내 발이 시리긴 했지만 견디지 못할 만큼 춥지는 않았다. 적어도 실내에서 입김이 나지는 않았다. 그렇게 고개를 갸웃하며 차에서 내리자 다른 세상이었다. 강원도는 강원도구나. 날씨 앱 속 기온은 6℃였지만 실제 체감 온도는 영하였다. 운전 중에 벗어두었던 패딩 점퍼를 당장 집어들었다. “산에서 차 멈추면 어떡해요?” 촬영을 위해 장암산 정상 부근 활공장으로 올라가는 길. 잠깐 화장실을 간 사이 귀가 빨개진 신동훈 사진가가 내게 물었다. 우리는 불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한 채 ‘무충전 서울-평창 왕복’의 목표를 잊고 충전기를 꽂았다. 10분 정도 충전하고 나니 추가로 67km 달릴 수 있는 거리가 확보됐다. 정상에서 내려왔을 때는 회생제동 덕에 배터리 잔량이 2% 늘었지만, 그걸 봐도 돌아오는 건 안도감이 아닌 예측 불허 상황이 주는 불안감이었다. 하루 종일 타본 EV6는 내내 편안하고 잘 달리고 조용한 차였다. 동시에 불길한 상상을 안겨주는 차이기도 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양평 휴게소에서 한 번 더 충전소를 찾았다. 조금씩 올라가는 숫자를 보고 있자니 영화 <타짜> 속 대사가 생각났다. “상상력이 많으면 그 인생 고달퍼.”
첫 출시 연도 2021년 최저 시작 가격 6천3백15만원 전장×전폭×전고 4,695x1,890x1,550mm 파워트레인 77.4kWh 배터리 최고출력 229마력 최대토크 35.7kgf·m 복합 연비 5.4km/kWh 승차 인원 5명 공차 중량 1,930kg(19인치 빌트인캠 미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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